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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범고래 아기님-152화 (152/275)

제152화

낯설지 않은 단어였다. 게다가 한번 겪어 보기도 한 단어였다.

그럼에도 익숙하기는커녕 ‘폭주’라는 두 글자가 주는 오싹함은 컸다.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던 내 세 번째 삶을 한순간에 엉망으로 만들고 세상을 멸망시킨 단어였으니까.

나는 손을 쥐었다가 폈다.

동요하지 않으려 애썼다. 왜냐.

‘에키온도 함께 듣고 있어.’

게다가 어느새 내 옆으로 와서는 차마 이전처럼 가까이 오지도 못하고 끙끙대고 있었다.

아마 웨일과 정말 무슨 일 없었냐는 말을 질책으로 들은 게 틀림없었다.

‘그래, 그때의 용 공작과 다르게 저 송사리 같은 애를 두고 내가 무슨…….’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무슨 일이든 일어나기 전에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일어나기 전에 막으면 예방이지만, 일어나 버리면 사건이 되고 피해가 생겨 버린다.

“……그러니까, 폭발할 가능성이 있다?”

웨일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아무리 봐도 에키온이 웨일에게 텃세든 뭐든 부린 게 분명하건만 웨일은 전혀 티를 내지 않고.

‘오히려 에키온을 도와준 것 같지.’

지구로 치면 의사로서 NGO나 국경 없는 의사회에 들어갔을 봉사 정신이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웨일이 내 밑에 들어온 것으로 모자라 성심껏 나를 따르는 듯한데.

‘이런 존재가 내게 굴러들어 온 건 호재야.’

자고로 인재는 귀히 여겨야 한다.

나는 방긋 웃었다.

“신경 써 줘서 고마워.”

웨일에게 다가가 어깨를 톡톡 두드려 주었다. 웨일이 흠칫하며 나를 보았다.

뭐야, 가볍게 치하한 것뿐인데, 뭐 묻었다는 듯이 물러날 건 없잖아?

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진심 어린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무리하진 마.”

“……무리?”

“응. 그 진단하는 것도 꽤 힘든 일 아니야?”

“…….”

아빠를 진단하고서 기절한 웨일을 기억한다.

“난 네가 힘을 아끼길 바라.”

“……왜?”

“앞으로 네 힘은 아주 많은 곳에 쓰일 테니까.”

“이용하겠다는 소리야?”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 반대야. 네가 쓰기 싫으면 쓰지 않아도 좋아. 원한다면 레바이와 함께 약조한 아빠와 한 사람만 더 살리고 끝내도 좋고. 네가 내킬 때만 사용해도 된단 소리지. 이게 네게도 좋지 않아?”

강압과 두려움, 폭력만으로는 사람을 지배할 수 없다.

이것이 할머니가 죽자마자 범고래 가문이 혼란스러워진 이유였다.

이솝우화 속 나그네의 옷을 벗긴 건 강한 태풍이 아니라 보잘것없어 보이던 햇볕이었다.

필요에 따라 나도 누군가에게 두려움을 선사하겠지만, 그건 내 수하가 아니라 적을 향할 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꿍꿍이는 없다는 듯이.

“이제 너도 내게 소중한 사람이거든.”

너도 레바이도 말이야.

웨일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새하얀 얼굴이 잠시 발긋 물들더니 손등으로 거칠게 뺨을 문질렀다.

무심한 듯 삐죽 솟아오른 눈매 밑이 빨갰다.

“너, 너는 무슨 말을 그렇게 직설적으로 해?”

“돌려 말하는 건 취향이 아니라서?”

나는 불쑥 고개를 내밀고는 씩 웃었다.

“왜, 별로야? 다음엔 나긋하게 맞춰 줘?”

“누가, 그렇게 해 달래? 일단 좀 떨어져.”

“은근히 까칠하구나.”

나는 차분한 목소리 사이에 숨겨진 쑥스러움을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얘는 자신이 가진 능력과 재능에 비해 영 칭찬을 못 들어 본 것 같다.

인정받지 못하고 자란 이의 눈을 하고 있다.

‘앞선 회차의 내 수하들을 보는 것 같네.’

나는 이런 이들을 아주 잘 알아본다. 내가 같은 처지였으니까 말이다.

나는 웨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웨일은 얼굴을 더욱 벌겋게 물들이면서도 내 손을 뿌리치진 않았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에키온. 거기 있지 말고 이리 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서성이던 에키온이 마치 울 것처럼 얼굴을 흐리더니 얼른 후다닥 내게 달려와 딱 달라붙었다.

내 팔을 꼬옥 끌어안은 채였다.

이제는 나보다 키가 조금 커진 애가 이러니까 조금 웃기기도 했지만 귀여운 게 더 컸다.

‘확실히 유치원 선생이 된 듯한 기분도 나쁘지 않네.’

두 사람이 더는 내 눈 밖에서 은밀하게든 대놓고든 싸울 일은 없을 거란 생각이 들어 안심했다.

“그런데 릴리는 어디로 갔어?”

그나저나 꼭 보여야 할 다람쥐가 보이지 않았다.

웨일과 에키온은 서로를 한번 마주 보더니, 곧 에키온이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여기.”

놀랍게도 에키온이 가리킨 곳은 자신의 모자 주머니였다.

“으응?”

그리고 얼떨떨한 대답을 한 동시에 에키온의 모자에서 조그마한 다람쥐가 쏙 고개를 내밀었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아빠도 그렇고, 아틀란 그놈마저 에키온이 릴리를 그리 달갑지 않게 여길 거란 생각이 공고해 보였고.

사실 나도 그런 분위기를 모르진 않았다.

그래서 최대한 에키온과 릴리의 대면을 늦추거나, 웨일에게 릴리를 잠시 맡겨 두었는데…….

아기 다람쥐가 나를 보고 눈을 크게 뜨더니 에키온의 몸을 쪼르르 달려 내게 날아왔다.

순간 다람쥐가 아니라 하늘다람쥐인 줄 알았다.

“어어, 조심해. 다친다.”

나는 얼떨결에 아기 다람쥐를 받아 내고는 그대로 두 사람을 향했다.

“왜 얘가 에키온 로브 모자에서 나와?”

“걔, 쟤를 좋아하던데?”

“웨일, 걔가 릴리고 쟤가 에키온 맞니?”

“알면서 왜 다시 물어보는 거야?”

그거야 믿기지 않으니까 그렇지. 에키온을 바라보면,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듯 내 팔을 끌어안고 있었다.

‘내 노파심이었나?’

웨일은 조금 난감한 얼굴로, 내가 시킨 대로 최대한 데리고 있으려고 노력했으나.

에키온을 보자마자 달려 나간 건 저쪽이었다고 설명했다.

“에키온, 귀찮지는 않았어……?”

내가 아니면 다른 사람과 닿기는커녕 대화도 하지 않는 에키온이었다.

에키온은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끄덕였다.

“쟤와 얘. 칼립소에게 필요해.”

나는 눈을 깜빡였다.

‘……뭘 알고 하는 이야기일까?’

하필 에키온이 더는 경계를 하지 않거나 혹은 처음부터 경계를 하지 않는 웨일과 릴리.

두 사람의 특기가 ‘치유 능력’이었다.

나는 무어라 하려다가 일단 릴 리가 듣고 있다는 생각에 릴리부터 고쳐 안았다.

“릴리. 듣고 있지?”

어차피 동물일 때도 말은 알아들으니. 괜찮을 것이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때야.”

그러자 릴리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사실 흑표범들이 릴리를 애타게 찾는 듯해 좀 더 시간을 끌어 볼까 했지만.

다시 보니 릴리가 너무 어렸다.

‘가족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을 이용하고 싶진 않아.’

“이 성엔 네 가족들이 있어. 그렇지? 기회를 봐서 보내 줄게.”

물론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오해는 없어야 할 테니까.

“대신 부탁할게. 우리 덕분에 성으로 돌아왔다는 말은 하지 말아 줘.”

“…….”

“아니, 정확히는…….”

나는 조금 고민하다가 싱긋 웃었다.

“내가 필요할 때 이 말을 해 줄래?”

나는 릴리가 기뻐하며 끄덕일 거라 생각했다. 어쨌거나 가족에게 돌아가는 일 아닌가?

그런데 왜일까.

‘표정이 왜 이래?’

릴리는 전혀 기뻐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내 소매를 잡고 열심히 조그마한 고개를 내저었다. 빙글빙글 돌거나 끙끙대기도 했다.

곧 펑 소리와 함께 내 품에는 아기 다람쥐 대신 아기 수인이 꼬옥 안겼다.

“엉니!”

나는 영문은 모르지만 일단 진정할 수 있게 토닥여 주었다.

왜 이러는 거지?

“엉니, 버리지 마세요…….”

“응? 버리다니, 누가 누굴 버려?”

그러자 우물쭈물 어찌할 바를 모르던 릴리가 자그마한 손으로 내 옷자락을 잡았다.

“엉니, 데려가 주면 앙대여? 돌아가구 싶찌 않아요.”

“……왜?”

속으로 무척 놀랐지만 나는 당황하는 대신 침착하게 물었다.

이럴수록 차분하게 들어줘야 상대도 진정하는 법이었다.

내가 동요하지 않자, 릴리는 안심한 것인지 꾹꾹 입술을 깨물다가 눈물이 고인 눈으로 조그맣게 속삭였다.

“……아픈 거. 무서어…….”

아파? 누가? 릴리가?

설마. 흑표범 집안의 보호는 완벽했다. 보는 내가 숨이 막힐 때는 있더라도 그 애정만은 진짜였다.

나를 배제했을지언정 릴리만은 오매불망 바람에 날아갈까 아끼던 이들 아니었던가.

“……흑표범 놈들이 널 괴롭혔어? 아니, 혹시, 때렸니?”

릴리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무서운 사람, 이써요. 아주 무섭구, 금색……. 머리카락…….”

금색 머리카락.

이 세상에서 금발을 가진 이들은 단 하나뿐이었다.

바로, 사자들.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황제인가, 황태자인가.

원작에서도 릴리가 어린 시절부터 엮이던 이들이었으니, 릴리가 이들을 본 건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그런 수준이 아니라 두려워한다?

“이상한 거, 먹운 뒤에 릴리 동물로 변해요……. 아푼 거 먹기 시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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