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범고래 아기님-149화 (149/275)

제149화

아스엘이 대답하기 무섭게 판테리온 공작이 묵직한 한숨을 참았다.

사실 판테리온 공작으로서는 이번 용의 도시행이 영 내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흑표범 가문 내에는 지켜야 할 연약하디연약한 존재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대가 아니면 용 공작의 이상 증세를 누가 막는단 말이지?”

우군으로서 황실의 명을 어길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함께 떠난 길이었건만.

‘릴리.’

딸아이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현재 흑표범 형제 셋을 비롯해 데려온 기사들 모두 그 아이를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어디에도 도움은 구할 수 없다.’

아이의 ‘특기’가 알려진다면 세상 모두가 탐을 낼 터이니…….

세상엔 욕심을 가진 자가 너무나 많았다.

게다가 이 제국엔 욕심이 가장 큰 자가 황좌에 앉아 있었다.

‘특히나 황실이 절대 알아서는 안 된다.’

아스엘은 고뇌하는 판테리온 공작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돌아간다. 수색은 한순간도 긴장을 놓지 말도록 해라.”

“네.”

아스엘은 제 아비의 뒤를 따라가려다 말고 잠시 한곳을 향했다.

“…….”

칼립소가 사라진 방향이었다.

* * *

“아이고, 통쾌하다.”

나는 소파에 누워 빈둥빈둥 굴렀다. 지난번에 우리가 도착했을 때 일을 기억하는지.

성의 총 집사는 우리를 발견하자마자 사색이 되더니 좋은 방을 내주었다.

지난번에 머물렀던 곳보다 더 좋으니, 최대한 신경 쓴 걸 테다.

“아빠, 방이 참 좋다, 그치?”

“마음에 드나?”

“그럭저럭?”

“그럼 저택에도 하나 만들어주지.”

“아냐, 아빠. 아빠 저택에는 더 큰 방을 만들어주지 않아도 괜찮아.”

이제는 요새 같은 아빠의 저택에 무언가를 더 만들 때가 아니었다.

“우리는 이제, 뺏어야지 아빠. 본성의 가장 넓은 방을.”

가장 넓은 방. 그 방은 성의 주인이 가진 방이다.

“바람직한 말이군.”

“맞아, 나는 맞는 말만 하지?”

어디 옳은 말만 할까.

“내가 하는 말이 진실이 되도록 하는 힘도 가질 거야.”

다시 한번 결심을 다지는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용의 도시에는 잘 도착했다. 이제 어쩔 셈이지?”

나는 산뜻하게 대답했다.

“요란스럽게 일을 벌여야지. 어차피 용 공작은 절대 나타나지 않아. 나타날 리가 있겠어?”

“흑표범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으니.”

“맞아.”

현재 투스가 가짜 용 공작인 게 들켰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간에 손님으로 온 그 누구도 용 공작 얼굴을 볼 수 없다.

저들이 용 공작을 독점하는 건 여전하다.

“요란스럽게 벌이는 일의 구체적인 계획은?”

나는 끄덕이면서 대답하는 대신 먼저 물었다.

“아빠, 아빠는 용의 도시에 대해 얼마나 알아?”

“……남들만큼은 안다만.”

“이곳 용의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건 역시 용의 축제야.”

우리가 다녀왔던 축제다.

“끝내 넌 나가 보지 못한 그 축제 말이군.”

아빠가 아픈 곳을 푹 찔렀지만 나는 태연하게 넘겼다.

노는 거야 가주가 된 후에도 얼마든지 할 수……. 할 수 있으려나?

뭐 상관없지.

저번에 용의 도시에 다녀온 뒤로 이곳에 대한 정보를 샅샅이 훑었다.

여기에 더해 내 지난 회차와 원작을 더듬어 보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이 도시에는 꽤 재미난 전통이 있어.”

용의 도시를 구성하는 건 용을 기리고 존경하는 수많은 영지민이다.

그리고 중계무역이 발달한 이 도시에서 이윤을 챙기는 많은 상인이 있겠다.

마지막으로…….

“지상 최강의 존재이자 유일무이한 존재, 용 수인.”

“…….”

“용이란 이름은 예로부터 이름만으로 맹수들의 피를 끓게 했나 봐. 그래서 이곳엔 아주 커다란 경기장이 있어.”

“페세움 말이군.”

작가가 콜로세움에서 영감을 받은 것일까.

마치 그 경기장을 닮은 거대한 장소가 이곳에도 있다.

오래전엔 그곳에서 투사들의 결투가 열린다거나 공연이 열렸던 모양이지만.

현재에 와서는 유적에 가까운 공간이 된 장소였다.

그런 것치고는 잘 보존되어 있지만.

“아빠, 흑표범이 여기 있는데 이외에 고만고만한 육지 맹수놈들이 없을까?”

“용의 축제에서 여러 육지 맹수들이 모여 있던 걸 말하고 싶은 건가?”

“그래.”

하지만 지금은 축제가 아니다. 나는 다른 곳에 집중했다.

만약 용 공작을 감시한다고 치자, 정말 극소수의 맹수 가문으로만 이 거대한 성을 감시하는 게 가능할까?

‘제아무리 허름한 건물에 감금해놓고 감시한다고 해도 말이지.’

상대는 용이었다.

그들도 방심한 게 아니니까, 내가 에키온을 데려간 때에도 하이에나씩이나 되는 이를 일개 경계병으로 배치해 둔 거겠지.

“네 말은 용 공작에 대한 건 여전히 비밀을 유지하더라도, 감시 체계를 지키기 위해 어중이떠중이 같은 놈들이 동원된다는 말인가?”

“응. 아빠, 느끼지 못했어? 5년 전보다 이 성, 더욱 경계가 삼엄해.”

들어오면서 느꼈다.

‘위화감.’

단순히 판테리온 공작이 우릴 맞이해서가 아니다.

이 성 곳곳에 병력이 배치되어 있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서?

아니지.

‘누군가의 도망을 염두에 둔 거거나.’

혹은…… 새어 나가선 안 될 비밀을 지키고 있거나.

“투스가 새삼스럽게 도망을 갈 리가 없어.”

나와의 약속이 있기도 하지만 에키온을 대신하는 이상 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으리라.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건 한 가지야.”

투스의 상태에 이상이 생겼다.

“들어오면서 듣기로 용 공작은 아직도 아프다는 이유로 대외 석상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지?”

“그래서 주인 자리를 잠시 내줄 정도라고 하지 않았나.”

나는 고민 끝에 결론을 하나 내렸다.

“어쩌면 투스가 정말 아픈 걸지도 몰라, 아빠.”

“…….”

“혹은 그놈들이 아플 정도로 괴롭힌 걸지도 모르고.”

“찾아갈 건가?”

아빠의 나직한 물음은 내 갈등을 부추겼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마음이야 당장 달려가고 싶다.

‘5년 전과 다르게 경비가 훨씬 더 삼엄해.’

섣부른 방문은 일을 그르친다.

“한 번이라도 실패하면 상대의 경계는 더욱 강해질 거야. 그뿐이겠어? 다음은 더욱 어려워지겠지. 신중해야 돼.”

차라리 제국의 수도나 황실이라면 좀 더 내게 유리할지도 몰랐다.

나는 그곳을 이미 정복해 본 적 있으니까.

하지만 여긴 우리에게 익숙한 공간이 아니다.

‘대신 적들에겐 익숙한 공간이지.’

우리에겐 단 한 번의 기회만 있으면 된다.

투스를 구출할 기회.

오랫동안 헤어져 있던 주종을 이제는 꼭, 반드시 만나게 해 주고 싶었다.

돌아갈 땐 팔 가득 수북하게 재료를 안고…….

“손목엔 귀여운 아기뱀을 칭칭 감고 갈 거야.”

“……취향이 독특하군.”

“진짜 감고 싶어서 할 말이겠어? 그보다 아빠,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뭐든 말하도록.”

“든든하네.”

그럼 사양 않고 말해야지.

“아빠, 혹시 말이야.”

내 목소리가 은밀해졌다.

‘뭘 예시로 들면 좋을까…….’

눈으론 방을 살피다가 곧 적절한 예시를 발견했다.

“아빠, 성 부술 수 있지?”

“……요란스럽게 시선을 끈다는 게 혹시 깽판에서 오는 것이었나?”

나는 씩 웃었다.

“아빠, 작은 소란은 깽판이라고 하지만…….”

“…….”

“일정 규모가 되면 그건 더는 깽판이라고 안 해.”

나는 웃는 그대로 말했다.

“‘사건’이라고 부르지.”

아빠는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아빠. 이 성, 얼마나 부술 수 있는데?”

나는 슬쩍 전성기의 나를 떠올리며 물었다.

“어느 건물을 안 부숴도 되는지를 알려주는 게 빠를 거다.”

자신만만한 목소리에 더불어 당장 폭발할 듯 일렁이는 물의 힘이 느껴져 나는 슬쩍 기겁했다.

“잠깐만, 잠깐만. 지금 당장 성을 부숴 달라는 게 아니야!”

“모두 부숴 줄 수도 있다.”

“알았어. 솔직히 다 부숴 주겠다는 말은 별을 따다 주겠다는 말처럼 들리지만.”

“못 믿을 것 같으면, 직접 보여 주는 게 편하겠나?”

“……농담이야.”

할머니 아들 아니랄까 봐 아빠에게도 은근 급발진하는 성격이 조금 있단 말이야?

곧 나는 악동처럼 웃었다.

“아냐, 아빠가 부술 건 이 건물이 아니거든.”

* * *

콰아아앙!

지축을 울리는 거대한 소리와 함께 땅 위로 거미줄처럼 균열이 퍼져 나갔다.

흔들리는 땅에서 수인들이 가까스로 균형을 잡거나 비명을 질렀다. 혹은 쓰러진 자도 있었다.

칼립소는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며 중얼거렸다.

“크으, 좋아, 아주 좋아. 저 역할을 내가 했어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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