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8화
‘판테리온 공작이 마치 용의 성 주인처럼 행세하고 있잖아?’
손님을 맞이하는 건 주인의 의무다. 그리고 이곳에 나와 있는 건 성주인 용 공작이 아니라 흑표범 공작.
‘물론 용 공작은 나올 상황이 되지 않겠지만.’
에키온이 있었을 때에도 이 애를 앞으로 내세우지 않았던 놈들이다.
투스가 에키온의 자리를 차지한 지금이라고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아빠의 품에 안긴 채로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데바나 판테리온.
이전 회차에서 내 시아버지였던 사람. 뭐, 딱히 이렇게 부르고 싶지는 않지만.
‘육아물 애비로서 역할에 아주 충실한 인간이었으니.’
옆에서 지켜볼 때의 ‘육아물 아빠’란, 편집증에 약간의 과대 망상에 피해 망상 또한 있는 인간이란 걸 알았다.
물론 어디까지나 이 책 속의 주인공 아빠였던 데바나 판테리온을 볼 때 이야기다.
‘뭐든 내 탓이라고들 했으니.’
뭐, 내겐 최악의 인간이었지만 릴리에게는 좋은 아빠였을 것이다.
‘잘됐네. 릴리를 수도나 흑표범의 영지로는 어떻게 보내나 했더니.’
이 영지에 있으니 기회를 봐서 보내기만 하면 될 것이다.
나는 판테리온 공작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기억하는 것보다 조금 더 날카로운 느낌이었는데, 아마도 얼굴 살이 내려서인 듯했다.
육지 동물 중에서 강하기로는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인간이 살이 빠질 이유가 뭐가 있겠나.
‘걱정으로 이렇게 된 건가?’
아마 저들도 릴리를 최선을 다해 찾고 있었던 거겠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곧 붉은 눈동자가 내게로 향했다.
홍옥처럼 밝고 맑은 느낌을 주는 둘째놈의 눈동자 색과 다르게 이쪽은 어두운 듯한 검붉은색이 특징이었다.
작중에서도 살벌함으로 대표되는 동물이자 가문이었다.
게다가 동공은 보통 수인보다 더 크니, 육지 맹수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곧 묵직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나는 용 공작의 부탁을 받아 현재 용의 도시 수호 및 재정 상황을 책임지고 있는 판테리온 공작이다.”
용 공작의 부탁은 무슨.
금붕어가 자기 지느러미 잘라 버리는 소릴 하고 있어.
이어서 대답하는 아빠의 목소리는 저 판테리온 공작 못지않게 낮고 더 듣기 좋았다. 암.
“용 공작은 이번에도 자리에 나오지 않는단 소리인가?”
아빠는 이미 알면서도 시치미를 뚝 뗐다.
‘세상에, 우리 아빠…… 연기가 제법인데? 아니, 그냥 표정이 없는 건가.’
판테리온 공작의 굵직한 눈썹이 꿈틀거렸다.
“질문하기 전에 소개가 먼저 아닌가?”
“날 모르나?”
“……허?”
“아니면 기억 능력이 부족해 벌써 잊은 건가? 젊은 나이에 참 안타깝게 됐군.”
이야, 우리 아빠 주둥아리 잘한다!
“…….”
굳이 예식에 집착하겠다면 맞춰 주겠다는 듯 아빠가 툭 이름을 뱉었다.
“피에르 아콰시아델. 아콰시아델의 대표로 왔다.”
“……금번 용의 신부를 데려왔다지?”
“그렇다만.”
아빠가 짤막하게 대꾸하자, 판테리온 공작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대는…….”
그사이 나는 판테리온 공작 옆에 서 있던 한 소년을 보았다.
왜 지금까지 몰랐을까.
판테리온 공작과 더불어 마차에 타고 있을 에키온과 릴리만 생각하느라 미처 살피지 못한 얼굴이었다.
나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나보다 두어 살 많은 듯한 소년이었다. 실제로도 이 정도로 많을 것이다.
아는 놈이니까.
‘저놈을 여기서 보네.’
삐죽 솟은 검은 귀가 보였다. 짐승의 귀다.
새까만 머리카락, 에키온과는 또 다른 채도의 금빛 눈동자를 가진 소년이었다.
희고 매끄러운 얼굴은 유려하기만 했지만…… 나는 곧 인상을 와락 찡그렸다.
저놈은.
‘하, 그래. 릴리가 이곳에 있을 정도면 저놈도 있을 거란 걸 깜빡했지.’
아스엘 판테리온.
흑표범 공작의 첫째 아들이자, 차기 흑표범 가문의 후계자다.
그리고 이전 회차.
내 약혼자였던 놈이었다.
우리의 시선은 한순간 교차했을 뿐 나는 냉정하게 시선을 돌렸다.
“내가 알기론 품속에 안고 있는 건 네 딸이 아니던가? 피에르 아콰시아델.”
판테리온 공작의 목소리에서 어처구니없음이 느껴졌다.
“설마 딸을 직접 제물로 바치러 온 건가?”
그렇지 않아도 사위가 고요했다.
“야만스럽기 짝이 없군.”
주변으로 용의 성 기사들이 경멸하듯 아빠를 보는 것이 느껴진다.
이 썩을 놈들이 어디다 눈깔을 비비고 있어?
“역시 미개한 물고기들답게 자식도 서슴없이 버린다는 건가?”
뭐래. 이 노린내 나는 XX가?
“제물이라.”
아빠는 고요하게 단어를 읊조렸다.
“이곳에 들어오는 동안 문지기고 용의 도시 내 영주민이고 전부 영광스러운 자리라는 듯 보았다만, 실제로 판테리온 공작가는 그리 생각하나 보군?”
아빠가 조용히 뱉었다. 나직하지만 힘 있는 어조였다.
“한낱 제물이라고.”
판테리온 공작이 눈꼬리를 씰룩하기에 나는 얼른 입을 열었다.
“이봐요, 아저씨.”
생각지도 않은 단어가 튀어나오자 날 선 분위기 속, 판테리온 공작의 낯짝으로 당혹스러움이 스몄다.
“넌…….”
“뭘 넌이야. 보다시피 용의 신부고. 하나만 물읍시다?”
마치 이런 호칭은 난생처음 들어봤다는 듯이.
하긴, 판테리온 공작씩이나 되는데 처음 들어 봤겠지. 하지만 내 알 바 아니다.
게다가 저 얼굴을 보니 말이 곱게 안 나온다.
“내가 신부가 되는데 댁이 금화 하나라도 줬어?”
“지금 뭐라고 했나?”
“왜 괜한 참견질이냐고 했는데?”
“이런 건방진…….”
용의 신부. 어디 한두 번 되었던가. 지난 생 내내 점찍혔던 나였다.
“용의 신부는 신부로 있는 동안 용 공작과 같은 직위를 가진다.”
“…….”
“맞지?”
뭐, 이것도 용의 신부가 곧 죽을 제물이다 보니 구색 맞추기용으로 세운 규칙이지만.
어쨌거나 규칙은 규칙이다.
“나의 대우와 처우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건 오직 용 공작님뿐이다.”
“…….”
“이것도 맞을 테고?”
그러니 지금 나는 용 공작과 같은 작위인 판테리온 공작과도 맞먹는단 소리다.
“반말이 불만이면 황제 폐하라도 데려오든가.”
“……이런 건방진.”
근처의 땅이 진동했다. 황실과 흑표범들만 쓸 수 있는 ‘땅의 힘’이다.
그러나 아빠가 딛고 서 있는 땅은 굳건했다.
“힘겨루기라도 할 생각인가?”
“과연, 딸의 건방짐은 아비에게서 온 모양이군?”
“나는 아콰시아델의 대표로 왔다. 그러니, 이 순간만큼은 내 어머니 오큘라 아콰시아델 대행으로서 공작과 동등한 지위에 있다.”
아빠가 피식 웃었다.
“설마 판테리온씩이나 되어서 이런 것 하나 모르는 건가?”
“범고래들은 하나같이 입조심이란 단어를 모르는군.”
“우리가 그럼에도 살아 있다는 건.”
“…….”
“강하다는 증거지.”
아빠의 눈동자가 어둡게 빛났다.
‘잘한다, 애비야!’
그래, 싸움은 기 싸움이고 패싸움이고 뭐든 이겨야 한다.
“용의 신부로서 의식을 거행할 때까지 나와 아콰시아델의 기사들은 마지막까지 신부를 지킬 것이다.”
“불허한다.”
아빠가 서늘하게 픽 웃었다. 비웃음이었다.
“권한 따위 없는 이에게 들을 생각은 없으니, 불만이면 용 공작에게 직접 전해.”
“…….”
“나와서 말하라고.”
나올 수 없을 것이다. 그럴 리가 없지.
‘본인들이 가둬 두고 있을 텐데.’
나는 기 싸움에서 밀리지 않는 아빠를 보며 마음 깊이 뿌듯함을 느꼈다.
‘이야, 악당답다! 마음에 들어!’
이제 누가 우리 아빠를 보고 삶을 체념한 시한부라 생각하겠어.
아주 좋아.
나는 싱긋 웃으며, 아빠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가자, 아빠.”
아빠는 기다렸다는 듯 판테리온 공작을 스쳐 지나갔다. 차가운 시선이 우리를 좇아왔다.
어째서인지 판테리온 공작 옆에 있던 아스엘 또한.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아빠에게 안긴 채로 눈썹을 찡그렸다.
‘……저것들에게 릴리를 돌려주려니 새삼 짜증이 좀 나네.’
* * *
범고래 가문, 아콰시아델이 멀어지는 동안 데바나 판테리온은 주먹을 꾹 쥐었다가 폈다.
건방진 수중 동물 놈들이었다.
어차피 죽을 여자애나 데려온 주제에 당당한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물며 그것이 제 친딸이라니 꺼림칙하기 그지없었다.
역시 수중 동물 수인들이란…….
“아버지.”
나직한 목소리에 판테리온 공작이 고개를 돌렸다.
“수색은 어떻게 되었느냐.”
아스엘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이에 판테리온 공작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대체 호위를 어떻게 했길래, 릴리 그 애 하나를 보호 못 해……!”
이를 악문 음성이 이어지다가 곧 줄이 끊어지듯 탁 끊겼다.
판테리온 공작은 곧 평소의 냉정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용 공작의 상태는 어떠하지?”
현재 이들은 용 공작을 감시하는 세력을 최소한으로 배치한 채 수색 중이었다.
급한 상황이지만 용 공작 관리를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아스엘이 말했다.
“여전합니다.”
무뚝뚝한 어조였다.
“어제보다 더 위독한 것 같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