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7화
흑표범들이 용의 도시에 있다.
릴리가 무구한 표정으로 더듬더듬 흘리는 말을 듣고 어찌나 놀랐던지.
왜냐, 한창 여주인공을 끼고돌 시기였다.
현재 시점에서 그놈들은 수도에 있을 자신들의 저택에서 나오지 않았어야 했다.
‘외출도 거의 하지 않았던 거로 기억하는데.’
내 이전 회차를 돌이켜 봐도, 원작 내용을 생각해 봐도 마찬가지였다. 똑같았다.
그런데 이번 회차에서는 어째서?
‘혹시 에키온 때문인가?’
이전 회차에서 나는 용 공작이 어떤 취급을 받고 그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완전 접점이 없던 인물이었으니까.
‘하나 가정해 보자. 만약…… 용 공작과 관련해서 주요한 사건이나 일이 생겨 흑표범들이 용의 도시에 상주하고 있는 거라면?’
흑표범들은 황실의 우방으로서 황실이 대놓고 나서지 못하는 일을 대신해서 처리해 주기도 했다.
우선 이건 용의 도시에 가면 모두 알게 되겠지만.
이제야 릴리를 이곳에서 발견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래, 흑표범놈들이 절대 홀로 둘 리가 없지.’
그놈들이 용의 영지에 있었던 거라면 이해가 간다.
물론 한편으로 그놈들이 옆에 있었음에도 그 길에 몇 날 며칠은 헤맨 듯한 상태로 쓰러져 있던 건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건 릴리가 하도 겁에 질린 얼굴이라 더는 물을 수가 없었지.’
나는 들판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아직 모든 대답을 들은 건 아닌데, 현재 용의 도시에 판테리온 가문이 있고.”
“…….”
“이 애는 모종의 사건으로 우리가 발견한 곳에 버려진 것 같아.”
아빠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발견 당시 릴리의 모습을 생각하면 험한 일을 겪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게 이상할 정도로 엉망이긴 했다.
“모두 이해했다. 다만…… 그렇게 이야기했다는 저것의 상태는 왜 저런 거지?”
아빠의 말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조금 난감한 얼굴로 천 덩어리를 안고 있는 레바이의 모습이 보였다.
그 옆으로는 웨일이 무뚝뚝한 얼굴 위로 호기심을 보이며 기웃거리고 있었고…….
세 걸음 떨어진 곳에 아틀란이 무슨 원수를 쳐다보듯이 레바이 쪽을 이글이글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잔뜩 찡그린 채였다.
‘저놈 저거, 노려보지 말라니까 또 저러네.’
참고로 둘째놈은 화를 내는 게 아니다.
그때, 레바이의 품에 안긴 천 덩어리 사이로 조그마한 다람쥐가 쏙 얼굴을 내밀었다.
웨일뿐만 아니라 지켜보던 기사들이 오오, 하고 감탄사를 뿜었다.
“수인으로 돌아가 이야기를 했다고 하지 않았나?”
“응. 그랬지. 그랬었는데…….”
그래, 릴리는 수인으로 돌아와 내게 이야기를 했다.
나는 들판에서 있었던 일을 반추했다.
릴리가 내 품에 안겨 더듬더듬 모든 이야기를 마쳤을 즈음…….
“에, 에, 엣췽~!”
아직은 서늘한 아침 바람에 릴 리가 작게 재채기를 했다.
그와 동시에 펑! 소리가 나더니.
내 품 안에 아기 수인은 어디에도 없고 조그마한 다람쥐만 있었다.
얼떨떨해하기도 잠시, 옆에 있던 아틀란 놈 때문에 정신을 차렸다.
“……네가 안아도 쪼그라드네?”
“쪼그라들었다고 할래? 표현이 그게 뭐야.”
표현이 하도 어처구니없어서 도리어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람쥐가 된 릴리는 인간의 언어를 하지 못했지만 다행스럽게도 말을 알아듣고 의사 표현은 가능했다.
“혹시, 재채기하면 다람쥐가 되니?”
도리도리!
“그럼 일정 시간마다 다람쥐가 되는 거야?”
도리도리!
“……설마, 일정한 조건 없이 이렇게 되는 거니?”
끄덕!
열심히 표현해 준 덕분에 릴리도 조건을 모른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막막한 건 마찬가지였다.
“펑 소리가 나더니 저렇게 되던데.”
나는 이렇게 말하고는 레바이 품에 꼬옥 달라붙은 아기 다람쥐를 보았다.
‘다행히 레바이는 마음에 드는 모양이네?’
게다가 레바이가 웨일도 볼 수 있게 몸을 낮춰 줬는데.
웨일이 손을 뻗자, 릴리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가까이 다가가 킁킁 냄새를 맡았다.
그러더니 자기 이마를 꽁! 하고 웨일의 손가락에 가져다 댔다.
나도 모르게 슬쩍 턱에 손을 가져다 댔다.
“뭐 하는 거지?”
“……고민 중이야, 아빠.”
“무엇을?”
“……잘생긴 거랑 귀여운 게 같이 보이는 건 나쁘지 않구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닌 듯한데.”
“응……. 반려동물은 신중하게 들이는 거랬는데.”
그러자 아빠가 슬쩍 레바이와 릴리 쪽을 보고는 평온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건 동물이라고 할 수 없지 않나?”
“끄으응.”
그렇지. 그냥 말이라도 해 본 거야. 말이라도.
“어쨌거나 험한 일을 당한 것 같으니 당분간 보호하려고.”
“네 뜻대로 하도록.”
아빠는 내가 했듯이 턱에 손을 얹었다.
문득 아빠가 작은 고민에도 입술에 검지를 얹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건 내 버릇이었다.
‘언제 내 버릇을 따라 하게 된 걸까.’
처음 만날 때는 이러지 않았으니, 내게 영향을 받은 게 분명했다.
부모가 자식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뿐 아니라 자식이 부모에게 영향을 주기도 하는구나.
새삼스러운 사실에 뺨을 긁적였다.
“용 공작은 잠들었나?”
“응? 응. 아까 내가 일어날 즈음엔 눈을 떴었는데, 다시 확인해 보니 자고 있더라.”
“그럼 아직 저걸 본 건 아니라는 거군.”
“응? 릴리 말이야? 그렇지?”
그러고 보니 에키온은 자느라 아직 릴리를 보지 못했구나.
이렇게 어젯밤이고 오늘 아침이고 꽤나 소란스러웠는데 말이다.
“노파심에 말해 두는 거지만 대면은 되도록 동물 모습일 때 해 두는 게 좋겠군.”
“다람쥐 모습 말이야? 난 상관없지만 왜?”
“네가 데려온 용 공작은 집착이 심하다.”
“…….”
“설마 모른다곤 하지 않겠지.”
나는 고민하다가 끄덕였다.
“좀 비정상적으로 나를 좋아하는 건 알아. 다만, 그건 그냥 아직 내가 유일한 보호자라고 생각해서 그러는 거라고 보는데.”
“…….”
“아빠는 더 심각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빠는 잠시 침묵을 한 끝에 조용히 물었다. 흡사 아주 위험한 무언가를 대하듯이.
“저 집착이 네 사람을 해치면 어떡할 거지?”
“글쎄.”
“버릴 건가?”
“음?”
“아빠.”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애가 잘못하면 혼을 내야지. 버릴 게 아니라.”
“…….”
“나는 적어도 저 앨 데려와 보호하는 순간부터 가족이라 생각했어. 가족이라 여기긴 힘들더라도 그래도 그런 말은 하지 마.”
“……그러지.”
“아빤 아직 많이 배워야겠네.”
아빠는 나를 빤히 보다가 돌연 내 머리에 툭 손을 올렸다.
“그러게. 아직 갈 길이 멀었군. 나도. 하지만 저 용 공작을 버리길 종용하려 한 것은 아니다.”
“응, 알아. 그리고 나한텐 잘하니까 됐어.”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빠 말처럼 아빠가 정말 에키온을 버리라고 한 말은 아니었을 것 같았다.
“그보다 아빠. 나 문득 궁금해졌는데, 셋째랑 둘째에겐 일부러 ‘스승님’이라고 부르도록 시킨 거야?”
아빠가 고개를 갸웃했다.
“한 번도 그런 일은 시킨 적이 없다만.”
“……그럼 알아서 부르는 거였구나.”
왜 아빠라고 안 하나 했네.
“됐어.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그보다 아빠, 할 말이 더 있었던 거 아니야?”
그러자 아빠가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됐다. 경각심이 없는 건 아닌 것 같으니.”
그렇게 우리의 짤막한 대화가 끝났다.
우리는 여주인공을 실은 채로 출발했고.
쭉 달린 끝에 얼마 지나지 않아 용의 도시에 도착했다.
두 번째 방문이었다.
* * *
‘흐음, 뭔가 이상한데.’
드디어 용의 도시로 들어섰다.
지난번엔 아콰시아델의 일원으로 이곳에 온 것이라면.
이번엔 수중 동물 수인 사절 대표로 온 것이었다.
‘용의 신부’로 이 자리에 온 것이니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문지기들도 용의 신부라고 하니 환영하는 얼굴이었지?’
용의 신부는 반드시 죽는다는 이야기가 파다하다.
그러나 곧 죽을 아이가 있는 마차를 보면서 찝찝하게 여기는 인원은 없었다.
‘그나저나 이상하네.’
지난 회차에서는 너무 당연해서 생각을 못 했는데, 만약 황실이 지난 회차에서도 용 공작을 세뇌할 것같이 굴었다면.
세뇌당한 용 공작이 용의 신부를 죽일 이유는 없지 않나?
‘황실놈들 생각할수록 뒤가 구리단 말이지…….’
이리 생각하는 사이, 성에 도착했다. 두 번째로 오는 용의 성이었다.
“에키온은 아직 자네. 어떡하지?”
“일단 마차에 두고 내리지. 네 하녀들과 둘째에게 이야기해 뒀다고 들었다만.”
“맞아.”
만약 용의 성에 도착해서도 에키온이 일어나지 않으면, 우선 나와 아빠는 집사 같은 용의 성 일원을 만나고.
아틀란과 레바이가 에키온을 책임지고 안전하게 옮기기로 하였다.
‘시선을 잘 끌어야겠네.’
그리 생각하는 동안 마차가 멈춰 섰다.
마차 문을 열고 아빠에게 안겨 마차에서 내렸을 때, 문 앞에서 마주한 인물에 크게 놀랐다.
“용의 성에 온 것을 환영하지.”
날렵하고 거대한 체구, 무뚝뚝한 듯 무겁도록 차가운 인상.
범고래 수인과는 또 다르게 날카롭고 벼려진 듯한 느낌의 사내였다.
온몸 가득 새카만 옷을 걸치고, 머리카락마저도 까만 저 사람은…….
판테리온 공작.
흑표범 가문의 수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