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범고래 아기님-145화 (145/275)

제145화

나는 이 호칭을 듣는 순간 움찔했다.

한순간이지만 그 호칭 하나로 과거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가장 자랑스러웠던 3회차? 아니, 너무나 고통스러웠던 1회차.

나는 어느새 낡고 엉망이 된 치마를 구겨 쥐고 있었다. 내 앞으로는 서성거리는 발이 보였다.

나는 이 발의 주인공을 안다.

살랑 흔들리는 꼬리의 폭신한 생김새만큼이나 다정한 성격을 가졌다는 것도.

원작 여주인공, 하지만 이름은 다시 부르고 싶지 않았던.

“언니 탓이 아니잖아요.”

다정했던 소녀가 겹쳐 보이는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아이가 울먹였다.

“엉니는 누구세……여?”

천천히 과거에서 빠져나왔다.

사실 이제는 특정한 기억을 제외하면 무뎌진 탓에 괴로웠던 기억이 떠올라도 그러려니 하지만.

이 시기에 유일하게 떠올려도 괴롭지 않은 기억이 있다면.

바로 눈앞의 이 애.

‘릴리’와 함께했던 기억이었다.

다만…….

‘기억이라고 하기엔 같이 보낸 시간이 너무나 짧았지.’

착하고 맑고 다정한 소녀였다.

아가씨가 되어서도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지나치게 많은 사랑과 과보호를 받았기에.

“네가 릴리랑 대화를 했어? 괴롭힌 거 아니고?”

“네 말을 어떻게 믿지? 릴리가 다쳤는데!”

“꺼져, 비린내나 나는 주제에!”

나는 저 아이를 과보호하는 흑표범들과 남주인 황태자로 인해 거의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그저 스치는 순간순간이 따뜻했음을 기억할 뿐.

‘참 우습긴 하지.’

보지도 만지지도 말조차 나누지 않았는데, 왜 항상 내가 괴롭혔다고.

앞으로 괴롭힐 거라고 단정짓던 건지.

‘내 편 하나 없는 그 상황이 참 더럽게 서러웠는데 말이야.’

나는 앞을 응시했다.

내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아이는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눈이 하도 땡그래서 보통 사람보다 감는 데 시간이 더 걸리지 않을까. 엉뚱한 생각이 든다.

‘나 참.’

순간이지만 호칭만 듣고 저 애도 아틀란처럼 과거를 기억하는 건가 싶었다.

그만큼 친근함이 느껴지는 호칭이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이 세계에 와서 언니라 불려 본 게 쟤 말고는 없었지, 아마?’

그래서 좀 더 특별하게 여겨진 걸까.

“다 울었어?”

애들은 울 때 달래 줄수록 더 크고 서럽게 운다고.

오히려 관심을 두지 않으면 울음을 그친다고 했다.

릴리 또한 이런 예시에 딱 맞았던 것인지 눈물을 대롱대롱 매단 채로 나를 열심히 보기 바빴다.

히끅히끅, 별안간 딸꾹질을 하기도 하면서.

눈은 열심히 내게서 떼어내지 않았다.

“엉니……!”

그보다 아까부터 언니라니.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나 알아?”

이미 회귀 전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단정 지었지만.

혹시 모를 마음에 물어보았다.

아이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몰라여.”

다행이다.

나는 사실 그 누구도 과거를 기억하길 바라지 않았다.

‘뭐 좋은 기억이라고.’

물론 이 애처럼 사랑받고 자란 아이라면 기억하는 것이 해가 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정말 그런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느낀 건데, 육아물의 과보호가 본인에게도 좋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더라.

‘좋아하는 음식도 먹지 못할 때가 있고, 좋아하는 곳도 가지 못할 때가 있었고.’

하기야 1회차 내 처지에 비교하자면 어디 선녀가 따로 없겠다만은.

“나 모른다면서 왜 덥석 언니라 불러?”

“엉니니까…….”

릴리가 경계심 없는 얼굴로 입술을 우물우물 움직였다.

그러더니 조금 움츠러든 채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부르면 앙 대여?”

“……아니, 안 되진 않고.”

예스다못해 오예란다. 이 초롱초롱한 시선을 어떻게 거부할까.

딱히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에 큰 감흥이 있는 편은 아니지만.

‘역시 세상엔 취향을 깨부수는 미모란 게 있는 법이지.’

릴리가 조금 더 망설이더니 살짝 속삭였다.

“팔라야 님이, 예쁘면 모두 엉니라고 해써여…….”

팔라야. 흑표범네 둘째 아들이다.

훗날 대단한 바람둥이가 되는 놈으로.

어릴 때부터 싹수가 다분했던 놈이었다.

“아아, 걔라면…… 예쁘면 다 누나라고 말한 거 아니고?”

릴리가 헉, 하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팔라야, 님을 아라여?”

“모르진 않아. 아니, 정확히는 그냥 모르고 싶고.”

“…….”

“어려우면 이해하려 하지 않아도 돼.”

나는 릴리 앞에 쪼그려 앉았다.

자, 이제 너를 어떡하면 좋을까.

‘이번 내 인생에 너를 단 한 번도 염두에 둔 적이 없는데 말이지.’

여기서 사정을 물어봐야 할까.

만약 듣는다면 감당이 될까?

내가 생각한 도움은 그저 이 애가 다시 안전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 거기까지였다.

어차피 이 애에겐 ‘흑표범 가문’이라는 안전한 둥지가 있으니까.

다만 어째서 이 둥지에서 멀리 떨어진 여기까지 오게 된 건지.

왜 너는 원작과 다르게 완전 수인화가 가능해진 건지.

이것을 물어야 할까 고민이 되지만.

“그나저나 왜 여기까지 뛰어온 거야?”

나는 잠시 결정을 보류한 채 질문을 던졌다.

“눈을 뜨니 마차였지?”

“…….”

끄덕. 릴리가 겁에 질린 눈으로 나를 보면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어나면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러지?

‘아틀란 그놈이 코라도 거칠게 골았나. 아니, 잠버릇이 나쁜 건 아게노르 쪽이었나?’

“그 마차는 내 일행의 마차야. 우린 너를 주워서 보호하고 있었고.”

“……엉니가요?”

“응.”

툭 떨어트린 손에 체온이 닿았다. 단풍잎처럼 자그마한 손이 내 새끼손가락을 꼬옥 쥐고 있었다.

‘개구리밥 같네.’

정말 작은 손이다.

“그럼, 이뎨 무뗘운 따람 업써요……?”

“무서운 사람?”

나는 손을 내준 채로 눈을 깜빡였다.

아이가 탄 마차에 함께 있던 인물들은 하나같이 외모가 빼어났다.

하다못해 일리아가 붙여 준 탐지 능력을 가진 수인 또한 모나지 않은, 평범하고 사람 좋은 외양을 가진 사람이었다.

‘기사들 중에 험악한 놈이 있던가……. 음, 짐작가는 인간이 너무 많군.’

범고래 수인들은 날카로운 눈매가 특징이라, 자칫 험악하게 생긴 외형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누굴 본 건지 모르겠지만, 네 오해야. 우린 널 해칠 생각이 없어.”

아무래도 이 애가 날 좀 친근하게 여긴 건 상대적으로 동글동글한 내 얼굴 때문인가 싶기도 했다.

“업써여……?”

“응. 없어. 그리고 집에 가고 싶지 않아?”

어디 보자, 우리가 직접 흑표범 가문에 데려다줄 순 없지만.

용의 도시에 가서 의뢰할 수는 있지 않으려나.

여기까지 생각하는데, 내 뒤에서 수풀이 흔들렸다.

곧이어 거친 발소리가 들리더니 수풀 사이에서 누가 거의 날아오다시피 툭 튀어나왔다.

‘어라. 둘째잖아?’

아틀란이었다.

오자마자 킁킁 냄새를 맡는 걸로 모자라 이미 주변에 물을 둥둥 띄운 채였다.

물의 힘으로 오감을 더욱 끌어올린 걸 거다.

“야. 둘째야.”

아틀란이 흠칫 떨더니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매우 놀란 얼굴이었다.

“뭐야, 너 왜 여깄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이제야 찾은 거야?”

나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내가 먼저 찾았다.”

“……어쩔 수 없었다고. 숲에 동물이 더럽게 많아서 짜증나.”

“뭐, 그건 그렇더라.”

“넌 대체 이 동물 기척 사이에서 어떻게 찾아낸 거야? 쪼끄매서 찾기도 어려웠을 건데.”

“이게 다 여동생님의 위대함이란 거란다. 잘 배우렴.”

“누가 너 대단한 거 모른대?!”

“……넌 화를 내거나 인정을 하거나 둘 중에 하나만 해라. 하나만.”

아틀란의 머리에 나뭇잎이 가득했다. 게다가 어깨에도 잔풀이 묻어 있다.

‘되게 열심히 찾았나 보네.’

의외였다. 아니면 나한테 혼날까 봐 절박하게 찾은 건가.

“너도 온 김에 인사나 해. 아직 인사 나누기 전이지?”

“인사는 무슨. 눈 뜨자마자 뛰어가는 쟤 꽁무니 보고 달리기 바빴어. 젠장, 배고파.”

아틀란이 투덜거리며, 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리는 동시에 내게 쿵쿵 다가왔다.

나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리다가 멈칫했다.

‘어라, 어디 갔어?’

눈앞에서 내 손을 꼬옥 잡고 있던 아이가 그새 사라진 것이다.

곧 내 허리에서 미약한 힘이 느껴졌다.

어라라.

“둘째야, 너 거기 멈춰 봐.”

“뭐야?”

아틀란이 다가오다 말고 멈춰 섰다. 얼굴은 불만 가득하면서 몸은 착실하게 명을 지켰다.

나는 아틀란을 멈춰 세우고 다시 아이를 보았다.

아이가 나를 꼬옥 껴안은 채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엉니, 엉니! 무, 무뗘운 사람!”

“엥?”

“어엉?”

나는 고개를 홱 돌렸다. 한 손으로는 아이를 안아 주며 눈썹을 휙 들어 올렸다.

“너 뭐 했냐?”

“뭘 해?”

“얘가 너 무서운 사람이라는데?”

“엥? 미친, 억울해. 가주, 아니 야, 내가 어제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어? 돌고래놈 자리까지 빼앗아서 잠자리도 마련해 줬거든?”

“……레바이 자리는 왜 뺏는데. 마차 넓잖아.”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레바이 그놈이 아틀란 등살에 쉽게 밀리는 놈이 아닐 텐데…….

“돌고래 그놈이 안 비켜 줘서 내가 구겨져서 잤다고! 구겨져서!”

“오…….”

역시나.

그나저나 아틀란은 진심으로 억울해 보였다. 그럼 대체 왜 이렇게 아틀란을 무서워하는 거지?

“저기, 저 사람이 너한테 뭐 했어?”

릴리는 히끅, 하더니 나와 아틀란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고는 대답하는 대신 조심스럽게 손을 거두더니 이번엔 내게 양팔을 뻗었다.

울먹이는 얼굴로 간절하게 보았다.

“엉니…….”

커다랗고 귀여운 눈매가 왈칵 흐려지고 울망울망한 눈동자 가득 내가 담겼다.

“안아 주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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