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범고래 아기님-140화 (140/275)

제140화

지구에서 정치 이슈들이 자극적인 연예 기사로 덮이는 것처럼.

커다란 사건을 터트리고, 다시 연이어 사건을 터트려서 귀중한 재료가 이동하는 것도, 투스의 조용한 부재도 덮어 버리는 거다.

그럼 원하는 것만 취할 수 있다.

“…….”

내가 할머니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모두 말했을 때.

할머니는 대답 없이 나를 빤히 응시했다.

“……그건 누구의 생각이더냐?”

할머니의 검푸른 눈동자가 어둡게 빛을 냈다.

“혹 네 옆에 있는 내 아들놈의 의견이더냐?”

“아니요.”

“그럼…….”

“제 의견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시는 건가요?”

“…….”

“제 생각이에요.”

나는 그 시선을 두려움 없이 마주했다.

“마음에 들지 않으세요?”

마음에 들지 않을 리가 있나.

계획대로 되면 당신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일 텐데. 안 그래?

“돌멩아, 네가 말한 제안은 실로 흥미로운 동시에…… 내륙과 수중의 갈등을 한 30년은 들여다본 놈과 이야기하는 것 같구나. 너처럼 꼬맹이가 아니라.”

“…….”

당연하지. 내가 이 갈등을 보고 있던 시간만 따지자면 50년이 넘을 테니까.

할망구 당신의 전성기보다 길다. 알아?

겉으론 표나지 않게끔 속으로 삐딱하게 웃었다.

“만약 이게 마음에 드신다면.”

나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했다.

“제가 돌아왔을 때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 주세요.”

사실 딱히 기대하진 않았다.

그저 아무 말 없이 도시행이나 허락했으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좋다.”

고개를 돌리면, 흥미롭다는 듯 날 응시하는 가주의 얼굴이 보였다.

그 위로 나를 냉정하게 버리던 이가 겹쳤다.

“할머니, 제발, 가주님 제발! 보내지 마세요, 저도, 제 쓸모를 증명하게 해 주세요!”

“…….”

“제발……!!”

이전에는 없던 일이었으나, 지금 이렇게 겹쳐 보이는 건.

‘아틀란 때문인가.’

아틀란이 앞선 회차를 기억하는 걸 안 뒤로 부쩍 더 과거를 생각하거나 겹쳐 보는 일이 잦아졌다.

3회차뿐만 아니라 더없이 잔인하게 쫓겨났던 그 이전 회차도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네가 기어이 바윗덩어리가 된다면.”

“…….”

“그땐 내게 이름을 불릴 자격이 되겠지.”

나는 몇 번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살짝 웃었다.

“감사해요.”

속으론 비웃음을 흘리면서.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네 인정 따위 필요 없어.

당신은 지금처럼 그 자리에서 희희낙락해.

“무서워요, 제발, 무서워요, 누가 좀…….”

첫 죽음 이후 악에 차 기어 올라왔다.

당신은 방심한 사이에 끌어내려질 것이다.

내 손에 의해서.

난 맑게 웃었다.

“허락 감사합니다.”

* * *

가주 집무실을 나왔을 때 반쯤 후련한 기분이었다.

‘좋아, 허락은 받았단 말이지.’

나는 홀로 복도를 걷고 있었다.

조금 전 아빠는 누군가를 만나고 오겠다며 저택 앞에서 만나자고 했다.

기다리기 싫으면 먼저 돌아가도 좋다며 쿨하게 말하더라.

좀처럼 없던 일이라 신기하긴 했다. 수하들도 잘 만나지 않던 사람인데.

‘라일라를 보러 가는 건가?’

본관은 교육 기관과 그리 멀지 않으니.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이상하긴 한데.

‘뭐, 아빠한테 생각이 있겠지.’

이 복도를 홀로 걷는 건 오랜만이었다.

우선은 아빠를 기다려 볼 요량으로 복도 끝에 다다랐을 때였다.

“여기 있었구나.”

나는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사실, 기척을 느꼈지만 설마하니 말을 걸 줄은 몰랐다.

돌아본 곳엔 훌쩍 큰 청년. 아니, 막 성인이 된 벨루스가 서 있었다.

“첫째?”

“날 그렇게 부르는 것도 여전하고.”

막 성인이 된 벨루스는 여전히 소년일 때처럼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유지했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얼굴은 잘 만든 조각상처럼 미려했다.

잘생겼다는 말보다는 아름답다는 말이 어울리는 외모였다.

냉기가 풀풀 흐르고 까칠한 낯은 여전했지만.

“보통은 인사가 먼저 아닌가.”

평온한 목소리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거야 인사를 주고받을 만한 사이일 때 얘기고.”

나 또한 평온하게 대꾸하며 성의 없이 손을 흔들었다.

“옛다, 인사.”

“…….”

나를 빤히 응시하던 벨루스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하더니, 이내 픽 웃었다.

“5년이나 흘렀건만 참 여전하군.”

“그럼 사람이 바뀌겠냐.”

벨루스는 형제들 중 가장 먼저 교육 기관을 졸업했다.

입학보다 졸업이 더욱 어려운 교육 기관이었지만 벨루스는 이 말이 우습다는 듯 손쉽게 해치워 버렸다.

‘유력한 후계자 후보인데 당연한 일이지.’

이 정도도 못하면 되겠나 싶었지만…….

졸업 후 본격적으로 가주 경쟁을 준비할 거란 모든 이들의 예상을 뒤엎고.

벨루스의 행보는 파격적이었다.

나는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눈썹을 들어 올렸다.

“너야말로 왜 여기 있는 거야? 중급 기관에서 논문이나 써야 할 놈이?”

놀랍게도 이놈은 교육 기관을 졸업하고 조교가 되었다.

최연소 교수를 노리는 중이었다.

‘……미친 건가 싶었지.’

범고래 수인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로 두드러진다.

하나는 호전성, 누구 하나 다를 바 없이 쥐어 패는 것 참 좋아한다. 본능적 깡패성이다.

또 다른 하나는 호기심 혹은 집착.

이러한 특징은 범고래 수인 자체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어져.

이따금 범고래 자체를 연구하는 학자가 되는 놈들도 심심찮게 나왔다.

‘하지만 내가 아는 바로는 벨루스 저놈이 걸을 길은 절대 아니야.’

저놈은 얌전하고 곱상해 보이는 얼굴과 다르게 타고난 전사였다.

그런데 학자?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이곳에서 조교란, 한국에서의 대학원과는 조금 다르지만…….

어쨌거나 대학원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그런 곳을 제 발로 가다니.’

친구 언니 중에 대학 조교이자 대학원생이 있었는데, 늘 얘기했다.

자긴 대학생 때 죄를 지어서 이곳에 온 거라고.

뭐, 우스갯소리겠지만 이곳의 조교들도 한국의 조교와 그리 다르지 않은 상황이다.

‘게다가 직계손인 주제에.’

다만 벨루스 이놈은 그야말로 교수 아래 노예가 아니라 교수를 벌벌 떨게 만드는 갑질 조교 노릇을 하고 있었다.

“대체 뭘 하는 거야, 조교? 다시 봐도 진짜 안 어울려.”

“난 그저 교육 기관에 남고 싶었을 뿐이야.”

“왜?”

“말했잖아? 널 옆에서 관찰하고 싶었다고.”

“변태냐?”

“…….”

벨루스가 멈칫했다. 나는 놈이 움찔한 거라 생각했지만.

“……보통 이런 경우 변태라고 하는 건가? 그저 관찰인데?”

진지하게 고민하는 놈을 보며 떠올렸다.

……그래, 이놈도 만만찮은 또라이였지.

나는 팔짱을 꼈다.

“그래서 교육 기관에 있어야 할 놈이 여긴 웬일인데?”

“네가 보여서 왔어.”

“할 말 있어?”

“칼립소, 어디 갈 예정이야?”

“……아니?”

어떻게 알았을까.

나와 벨루스 놈은 5년 전 용의 도시행 이후로 가깝지도 그렇다고 멀지도 않은 관계를 유지했다.

이런 애매함은 저놈이 만든 거리였다.

아게노르 같은 맹목도 아니고 처음의 아틀란처럼 적의도 아니다.

이놈은 저 회색지대에 서서 뭘 하고 싶은 걸까.

나는 팔짱을 꼈다.

“넌 가주는 노리지 않는 거냐?”

기왕 말꼬를 튼 김에 그냥 줄곧 궁금했던 것을 묻기로 했다.

질문하기 좋은 장소는 아니었지만 상관없었다.

“아니면…… 네가 조교나 하는 건 그런 소일거리를 하면서도 할 수 있다는 자만심이냐?”

“글쎄, 칼립소 네가 없었다면 모를까. 이 일을 하면서 준비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보는데?”

벨루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가주 경쟁을 포기할 생각이야.”

“……뭐?”

“오늘은 네게 이 얘기를 하러 온 거야. 그러다 네가 피에르 님과 가주님을 방문했다는 얘길 들었고.”

“…….”

“어쩌면 5년 전처럼 또 어딘갈 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지.”

조금 충격을 받은 나머지 뒤의 얘기는 뭐라고 하는지 잘 듣지 못했다.

아니,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포기할 것처럼 군 적 없으면서!’

분명 첫째와 나는 한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특별히 싸운 것도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놈을 라이벌 목록에 올려두었다.

그런데 제 스스로 자리를 박차겠다니?

“대체 왜?”

“내가 여덟 살일 적, 너만큼 못했으니?”

“……뭐?”

“내가 한 말을 지키려는 거다.”

나는 반문하려다가 말고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나나 이놈이나 주변 기척을 알아차리는 데 능해서 다행이지.’

이 이야기를 아무도 듣지 못했을 테니까.

“야, 그럼 앞으로 어떡할 건데? 뭐, 너 내 밑으로 들어올 거냐?”

“아니?”

이건 또 뭐야.

“그럼 누구 밑에도 들어가지 않고 후계 경쟁도 포기하겠다?”

심판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뭐야. 나는 눈을 찡그렸다.

“할머니에게 보고할 거냐?”

할머니는 이런 이를 두고 ‘패배자’라고 불렀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알아차린 것인지 벨루스가 끄덕였다.

“할머니에게 할 말은 생각해 뒀어. 다만 당장 이야기할 생각은 없고.”

“…왜?”

“네가 자릴 비운 동안에 나라도 있어야 시답잖은 놈이 날뛰지 않겠지.”

“……?”

“네가 가주가 될 거잖아.”

……뭐지. 이 기분은.

“내가 가주가 될 거라고? 왜 넌 확신하는 얼굴이지?”

“그거야…….”

벨루스는 차가운 낯으로 나를 응시했다. 흡사 업신여기듯 마치 그것도 모르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대체 너 외에 누가 가주가 된다는 거지?”

……뭐야 이놈.

‘이게 대체 날 따르는 거랑 뭐가 다른데?’

김첨지냐? 설렁탕 좋아해?

그러니까 내가 떠난 사이에 주변을 잘 견제해 주겠다는 소린데.

대가도 없이, 그것도 나를 위해서?

나는 입을 뻐끔거리다가 그냥 멈췄다.

‘이 새끼…….’

내가 이런 눈치는 또 빠르다. 왜냐, 무수히 많은 수하를 영입하면서 몸소 깨달은 감각인데.

이놈은 지금.

‘입덕 부정기네.’

아니, 입덕이 아니라 대장 호칭 부정기라고 해야 하나? 표현은 좀 이상하지만 아무튼.

‘……얘, 졸업하고 조교 된 지 몇 년이나 지났잖아?’

설마하니, 이게 입덕 부정 증상이었다면, 대체 그 기간이 얼마나 길었던 거야?

나는 하려던 말을 삼켰다.

“됐고, 일단 다녀와서 얘기해.”

벨루스는 말이 없었다. 나는 놈이 긍정으로 받아들였음을 알았다.

허, 참. 이번 생엔 저놈을 이상한 방식으로 얻게 되네.

이렇게 생각하다 말고 나는 걸음을 옮겼다.

너무 어처구니없는 일을 겪어서일까. 순간적으로 모든 일이 다 귀찮아졌다.

아무래도 아빠를 기다리는 건 포기하고 돌아가는 게 낫겠다.

‘어차피 집에서 볼 건데 뭐.’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걸으려다 말고 멈칫했다.

“야. 첫째야.”

시선을 돌리니 벨루스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나는 아빠와 아빠가 내게 준 손수건을 떠올렸다.

저놈이 내게 호의적이라면…… 꼭 한번 묻고 싶은 질문이 있었다.

“너, 혹시 엄마에 대해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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