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7화
10년,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더럽게 길었다.
‘그 전에 아빠가 먼저 죽겠네.’
하지만 나는 조금 전처럼 당황하는 대신 산뜻하게 말했다.
“줄여.”
“네? 뭘 어떻게 줄이란 말입니까?”
“천문학적인 돈과 사람이 있다면 어때? 가정을 물어보는 거야.”
레바이가 고운 미간을 찡그리더니, 이내 항복하듯 양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5년입니다.”
“길어.”
“4년. 정말 마지노선으로 이게 최선일 겁니다. 이마저도 저와 탐지 능력이 있는 수인이 적극 협조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래?”
나는 곰곰이 고민하다가 싱긋 웃었다.
“2년으로 줄여 볼까?”
우리 책사님을 굴리면 뭔들 나오지 않을까.
그건 내가 3회차에서 아주 잘 터득한 사실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레바이의 얼굴이 쓰레기 구겨지듯이 확 구겨졌다.
“저기, 몇 번 뵈지 않은 사이에 이런 말이 외람되지만 말입니다……. 저를 무슨 버튼 꾹 누르면 재료가 튀어나오는 도구처럼 생각하시는 건 아니시지요?”
응, 맞는데.
“제가 무슨 버튼 누르면 책략이 툭 튀어나오는 도서관인 줄 아십니까!”
이전 회차의 레바이의 단말마가 메아리처럼 겹쳐지는 듯했다.
나는 유쾌한 기분이 되어 씩 시원하게 웃었다.
“불가능하다고는 하지 않네?”
“…….”
“그리고 내가 이렇게 말하면, 싫어하려나?”
“무슨 말씀을 말입니까?”
“그래도 목숨값치고는 싼 것 아니야?”
“……젠장.”
레바이가 투덜거렸다.
“저와 웨일 목숨을 더럽게도 비싸게 쳐 주시는군요.”
이는 곧 승낙의 의미였다.
‘불가능하다면 불가능하다고 했겠지.’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으면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하지 않았을 놈이다.
더군다나 저 눈은 하겠다고 마음먹은 자의 눈이었다.
“좋아. 2년.”
나는 이렇게 말하곤 고개를 돌려 아빠를 응시했다.
“들었지, 아빠? 2년이면…… 치료할 수 있다네?”
이제 당신을 절대 죽게 두지 않을 거야. 아빠는 죽고 싶어도 절대 못 죽어.
그러게 누가 범고래의 집착 범위 안에 들랬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이, 아빠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엄청 기쁘지?”
복잡한 감정이 아빠의 잘생긴 얼굴에 파도처럼 일렁거렸다.
적어도 무뚝뚝하고 늘 태연한 아빠가 보인 것 중 손에 꼽히게 요동치는 얼굴이다.
그러나 끝내 밖으로 표현된 건 머리로 툭 닿은 손과 차분하고 침착한 목소리뿐이었다.
“……그렇군.”
말끝이 아주 살짝, 나만 알 수 있을 정도로 흔들렸다는 사실은 나 홀로 아는 비밀로 간직하기로 했다.
아빠가 어떤 기분일지 짐작도 하지 못하겠으니.
‘세상에 안 될 게 뭐가 있어?’
회귀하는 인간도 있고 시간을 다루는 용용이도 있는데.
병을 고치는 게, 그 어렵다는 재료를 공수하는 게 무에 어려운 일이라고.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걱정하지 마. 아빠. 이해할 수 없는 소리겠지만……. 아빠 눈앞에 있는 난, 살아 있는 기적이나 마찬가지거든.”
이 순간만큼은…… 아빠가 살 수 있는 단서를 찾게 해 주었으니.
나는 처음으로 이 회귀를 축복이라 여겨 보기로 했다.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아주 오래전부터 그리 생각하기도 했지.”
아빠가 작게 웃으며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딸이 있어 든든하다는 기분을 느낄 날이 올 줄은 몰랐군.”
나는 함박웃음을 짓고는 시선을 돌렸다.
“레바이, 가서 모두를 불러와.”
이제 필요한 사람은 모두 모였다.
2년, 그 사이에 해야 할 일은 아빨 위한 재료를 모으는 것. 이게 최우선의 과제다.
그리고…….
“……하여 2년간 전력을 다해 재료를 수집할 거야. 하지만 이 사이에 너희가 해 줄 일은 따로 있어.”
나는 장차 내 세력을 떠받쳐 줄 미래의 기둥들을 보며 목을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느슨하게 풀었다.
무언가를 시도할 때 내 버릇이었다.
“무슨 일인데?”
아틀란이 대표로 물었다.
긴장 어린 기색의 아게노르, 고운 눈썹을 들어 올린 리리벨.
침착한 표정의 일리아와 레바이. 그리고 웨일까지…….
“너희가 강해지는 것.”
처음 가리킨 손가락은 아틀란, 아게노르, 리리벨 범고래 셋을 한데 묶어 가리켰다.
다음 손가락은 레바이를 가리킨다.
“네가 더 똑똑해지는 것.”
레바이놈은 찌푸리면서도 토를 달지 않았다. 내 시선이 다음으로 일리아를 향했다.
“세력을 늘리는 것. 큰 세력이든 작은 세력이든 뭐든 좋아.”
일리아가 가리키기도 전에 자신의 역할임을 알아차리고는 끄덕였다.
끝으로, 손가락의 종착지는 내 가슴이었다.
마지막으로.
“나 역시, 더 강해지는 것.”
아게노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저기 여동생님…… 뭘 더 어떻게 강해질 건데? 넌, 지금도 많이 강하지 않아?”
“같은 의견이다. 안 그래도 지금도 징그럽게 강한 인간이.”
“아니, 부족해.”
나는 느긋하게 기다릴 생각이 없다.
물살을 세차게 가르는 바닷속 맹수처럼 저 정상에 있는 가주에게로 달려갈 테니까.
“그거 알아?”
내가 웃으며 묻자 아틀란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아니, 뭘 말하려는진 모르겠고, 네가 그딴 표정을 할 때가 제일 무서운 건 아냐?”
“어떤 능력은, 목숨을 오가는 위기에서 꽃을 피우기도 해.”
“……그런데?”
“특히나 싸움과 전투 관련 능력치는 연습이 아니라 오히려 실전에서 크게 성장한다는 것, 너흰 이 사실을 모르지 않을 거야.”
그러자 내 밑에서 굴러 본 두 사람, 아게노르와 아틀란의 얼굴이 각기 새하얘지거나 핼쑥해졌다.
리리벨의 얼굴만 이해 못 하겠다는 듯 찌푸려졌지만 나름의 짐작 가는 바가 있는 듯 토를 달지 않았다.
“그래서 뭐 어떡할 건데. 가문에서 전쟁이라도 벌일 거냐?”
“아니? 현재 시점에서 지나친 갈등은 역효과야. 오히려 외부로 시선을 돌렸지.”
“외부?”
“그래, 현재 우리가 할 일은 가주의 눈에 드는 거야.”
내가 강력한 후보로 떠올랐다고는 하나, 결국 후보 결정은 가주의 손에 달린 것.
그리고 나는 그 할머니가 제일 마음에 들어 할 만한 일을 알고 있다.
“가주의 눈에 띄면서도 적절한 훈련이 되는 자리가 또 어딨겠어.”
이 땅에 가장 유구한 갈등은 바로, 바다 생물과 육지 생물의 대립이다.
게다가 나는 마침 이런 핑계를 댈 수 있다.
“난, 용의 신부야.”
“……!!”
갑작스럽게 나온 사실에 모두가 의아해하거나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
나는 누군가 입을 떼어내기 전에 말을 이었다.
“그리고 조만간 용의 도시에 용의 신부로서 다시 갈 예정이지.”
아빠의 병을 치료하는 데 하도 많은 재료가 나왔던지라 모든 재료를 기억하진 못하지만 이건 안다.
주의 깊게 들었던 재료들.
‘몇 가지 재료는 육지 동물 수인의 땅에서만 구할 수 있다.’
그리고 용의 도시는 사실…… 육지 동물 영역과 수중 동물 영역의 모든 물건이 모이고 교차하는 곳이었다.
‘재료 모으기엔 아주 좋다는 거지.’
단, 재료를 위해서 레바이도 같이 가야겠지만. 어느새 내 마음속에 필수적인 일행이 되어 있으니 괜찮다.
‘물론 재료를 듣지 않았더라도 용의 도시는 반드시 가려 했어.’
5년간, 마음 한구석에는 언제나 에키온을 위해 자신은 그 지옥 같은 곳에 남아 버린 아기 뱀이 빚처럼 남아 있었다.
‘에키온이 좋아하겠는걸.’
자, 투스에게 약조한 것보다 2년 일찍 우리 아기 뱀을 데리러 갈 차례다.
* * *
당연하겠지만 칼립소의 결정은 반대에 부딪혔다.
물론, 칼립소 아콰시아델이 어디 수하들의 반발을 신경이나 쓰는 인물이었던가.
아틀란은 이리 생각하면서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말을 숨기지 못했다.
“……너, 미쳤어?”
“응. 어때, 참 좋은 핑계지? 용의 도시로 가기에 아주 좋은 핑계야!”
“핑계고 나발이고!”
여기 있는 이들은 ‘용의 신부’가 무엇인지 누구보다 가장 잘 아는 이들이었다.
죽으러 가는 자리 아닌가!
물론 칼립소가 쉽게 죽을 인물은 아니란 걸 모두가 잘 알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이야기였다.
‘게다가 그 망할 용 공작 새끼가 바로 여기 있는데 가긴 어딜 간다는 거야?!’
다만 다른 수하들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사이에서 아틀란만이 길길이 날뛰었다.
여기서 육지 동물을 향한 원한이 강한 사람을 꼽으라면 칼립소 못지않게 깊은 사람이 바로 아틀란이었다.
‘내 이리 길길이 날뛸 줄 알았지.’
한동안 아틀란의 고함을 들어 주던 칼립소가 툭 말했다.
“조용히 해 봐.”
칼립소라고 어디 생각을 하지 않고 말했겠는가. 실상 이건 핑계고 깽판만 조금 치고 올 것이다.
암.
“나한테 좋은 계획이 있거든?”
씩 웃는 칼립소는, 아틀란이 기억하는 어떤 모습과 똑같았다.
‘……쟤, 딱 전쟁 선언할 때도 저런 얼굴 아니었나?’
* * *
며칠 뒤, 일이 잘 풀려 싱글싱글 웃고 있어야 할 내 얼굴은 심각하기만 했다.
그도 그럴 게…….
‘용용이가 눈을 못 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