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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범고래 아기님-136화 (136/275)

제136화

아게노르는 뚱한 표정인 데다, 리리벨은 의구심 가득한 얼굴이었고.

게다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아틀란은 옷이 흐트러진 채였다.

‘왜 둘째 저놈 옷만 저 모양이야?’

만약 리리벨과 싸운 거라면 좀 더 엉망인 꼴이 되었어야 할 텐데. 애매했다. 게다가 리리벨은 멀쩡해 보였고 말이다.

난 의아함을 느끼며 아틀란에게 물었다.

“……그사이 쌈박질이라도 했어?”

“넌!”

아틀란은 뜻밖에도 매우 발끈하는 모습이었다.

생사람을 잡았다고 길길이 날뛰려나 싶었는데, 날뛰다 말고 나를 빤히 노려보더니 고개를 홱 돌렸다.

어째 할 말이 매우 많은 표정이었다.

“하, 아니다. 됐다. 나중에 이야기하고.”

아틀란이 고개를 내저었기에 더욱 의문이 들었다.

‘왜 저래?’

하지만 일단 지금은 끄덕이고는 급한 용무부터 꺼냈다.

아니, 꺼내려고 레바이와 웨일 쪽을 보았더니…….

뭐 때문인지, 이쪽은 이쪽대로 묘했다. 웨일이 애타게 나를 보고 있었으니까.

‘쟨 또 왜 저래?’

우직한 얼굴 위로 불안한 기색이 가득했다. 위태로운 낯을 보고 있자니, 걱정이 되었다.

‘아까 아빠를 진단할 때 시간이 엄청 오래 걸렸지?’

땀도 많이 흘리고.

게다가 끝나자마자 기절하기까지 했는데…….

내가 무어라 걱정을 건네기도 전에 웨일 쪽에서 불쑥 말했다.

“저기, 칼립소. 안 아파?”

“응? 뭐가?”

웨일은 말로만 하려니 답답했는지, 레바이 품에서 나와 쪼르르 달려왔다.

어쩐지 다급한 표정이었다.

웨일이 손을 뻗기 무섭게 나는 본능적으로 뒤로 움찔했다.

아빠의 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그대로 멈췄지만.

전투태세부터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는 몸의 버릇이었다.

“손.”

“아.”

자연스럽게 손을 내려다보다가, 어느새 손에 둘둘 감겨 있던 손수건에 놀랐다.

‘이건 언제 감긴 거지. 아, 아빠가 해 둔 건가?’

아빠에게 손수건이 있던가?

깔끔한 걸 좋아하니 손수건 하나쯤 들고 다닌대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손수건을 품에 들고 다니는 아빠라니…… 좀 생경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손수건을 바라보던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거 엄마 손수건 아닌가?’

손수건의 모양을 보고 흠칫 놀랐지만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여기서 이야기하기엔 듣는 귀가 너무 많기도 했고, 아빠가 대답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우선 웨일에게 안심하라는 듯 대답해 주었다.

“괜찮아. 이 정도는 침 바르면 나아.”

벽 좀 두드린 것쯤이야. 손톱이 부러지거나 빠진 것도 아니고, 뼈가 부러진 것도 아니다.

금방 낫겠지.

“외람되지만 공녀님, 수인의 침에는 그런 효능이 없습니다.”

“레바이, 넌 농담이라는 걸 모르는구나. 정진하렴.”

“……뭘 정진하라는 겁니까?”

“난 재밌는 책사가 좋단다.”

“누가 당신 책사입니까.”

찬물을 끼얹은 레바이의 말 덕분에 어수선하던 분위기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래그래, 네 직책에 대해서는 차차 이야기하자고.”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아빠의 품에서 내려왔다.

“레바이, 웨일. 우선 여기까지 찾아와 줬는데 놀라게 해서 미안하게 됐어.”

진지하게 사과하자, 레바이와 웨일은 서로를 바라보더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아니야.”

나는 웨일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 주고는 레바이를 향해 다가갔다.

“생각해 보니 아깐 내가 잊은 게 있더라고. 재료를 듣고 화낼 게 아니라 먼저 물었어야 하는데 말이지.”

나도 참. 웨일을 이번 생에 처음 보는 것이다 보니 잠시 한 가지를 간과하고 말았다.

“하나 물어볼게.”

조금 전 나는 내 아픈 과거를 떠올리며 이입해 화를 낼 게 아니라,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물었어야 했다.

웨일의 능력이 무엇이던가.

나는 눈매를 날카롭게 좁히며 물었다.

“웨일이 말하는 재료들, 이 세상에서 구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기도 하나?”

찰나의 침묵 끝에 레바이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모든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입니다.”

“…….”

“등가교환이니까요.”

등가교환.

세상에 없는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교환이 불가능하니까.

“웨일의 특기는 참 신비롭습니다. 반드시, 치료받는 상대가 찾아올 수 있는 재료를 말해요.”

“……그렇지?”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등가교환이란 단어에서 이것부터 떠올렸어야 했는데 말이지.

‘찾아올 수 있는 재료라.’

뭐 지금이라도 떠올렸으니 됐다.

‘그래. 좋아, 불가능한 건 아니란 말이지?’

곧 내 미소는 자신만만한 쪽으로 바뀌었다.

나는 흘끗, 조금 전 웨일이 진단하던 소파를 바라보았다. 아래쪽엔 종이 몇 장이 떨어져 있었다.

레바이는 웨일이 재료를 읊기 시작하자 기다렸다는 듯 손에 펜을 쥐고 움직였다.

빠르게 손을 움직이던 모습을 기억한다.

“아까 웨일이 말한 재료들 네가 적는 걸 봤어, 모두 적은 거야?”

“그렇습니다.”

“그럼 그 재료, 모두 구하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아?”

레바이가 반사적으로 대답을 하려 하다가 멈추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얼굴로 의심이 스쳤다.

“……그걸 왜 제게 물으시는 겁니까?”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기 위해 잠시간 고민했다.

하지만 역시나 지금 중요한 건…….

레바이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했다.

누군가 억지로 시켜서가 아니라, 레바이 스스로가 협조하는 것.

‘그러려면 깊은 이야기가 필요하겠지.’

나는 흘끗 옆에 있던 이들을 순서대로 보았다.

“다들 잠시만 나가 있어.”

“허 참, 내가 심부름꾼이냐,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

“응, 여동생님!”

“흥, 주군이 말씀하시면 얌전히 따라야지. 뭘 그리 토를 단담.”

“…….”

리리벨의 말은 누가 봐도 아틀란을 겨냥한 말이었지만.

‘리리벨…… 그러는 너도 고분고분한 쪽은 아니잖니?’

나는 하려던 말을 멈추고 셋을 얌전히 돌려보내는 데 성공했다.

일리아는 잠시 멈칫하더니 조금 고민하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으음, 칼립소 님. 이 이야기가 끝나면 지하실 밖으로 한번 나가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응? 어, 그래.”

허튼소리를 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니, 나는 끄덕였다.

그렇게 레바이와 웨일을 제외한 모두를 잠시 문밖으로 내보냈다.

문이 닫히는 순간 고개를 돌렸다.

“자, 이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눠 볼까?”

레바이가 이상하다는 듯 경계 어린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무슨 이야기를 말입니까?”

레바이는 나와 아빠만 남자 슬쩍 웨일을 제 뒤로 숨기며 불안을 숨기지 못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우린 여러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지.”

“…….”

“예를 들면, 네가 이 세상에 유일하게 하나 남은 흰수염고래 수인을 보호하는 이유라거나?”

레바이의 눈이 잔잔해졌다.

역시 저 나이에 맞는 시선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욱 마음에 들었다.

“이상한 소리를 하려 하시는군요.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아신단 말입니까?”

“내 정보력을 너무 우습게 보는 게 아닐까? 이미 흰수염고래의 능력을 알고 있는데, 그것도 모를까?”

“…….”

레바이가 세상에 하나뿐인 흰수염고래를 보호하게 된 이유.

그 이유는 바로…….

“저 애의 모친, 그러니까 또 다른 흰수염고래 수인이 네 스승이었지?”

“무슨 소린지 모르겠습니다.”

“왜? 넌 약사를 꿈꿨잖아.”

“…….”

“너랑 딱히 입씨름하고 싶지 않아. 그렇다고 네 비밀을 여기저기 떠벌릴 것도 아니고.”

차차 시간을 들이면 좋았겠지만. 그럴 시간이 없다.

“지금 여기서 나온 모든 말은 네가 원한다면 내가 죽을 때까지 비밀에 부쳐질 거야.”

나라고 정보를 이렇게 흘릴 생각은 없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속도가 생명이다.

하루라도 빨리 재료를 찾아야 할 테니까.

“나는 물론, 여기 있는 아빠 모두 바다의 맹세를 하게 해 줄게.”

“……정말입니까?”

이 불신 가득한 책사의 입을 열게 하는 건 맹세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빠르게 정말 바다의 맹세를 해 버렸다.

아빠도 같이.

그제야 레바이가 입을 열었다.

“하아. 유령에게 홀린 기분이군요…….”

레바이의 표정은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지?’라고 말하는 듯했다.

“대체, 당신은 어디까지 알고 계신 겁니까?”

“네가 예상하는 것보다 많이?”

나는 장난칠 생각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미소를 지워 냈다.

“그리고 난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내 아빠를 살리는 데 진심이야. 그러기 위해서 같은 가문인 돌고래들조차 모르는 네 비밀? 얼마든지 비밀로 해 줄 수 있어.”

“…….”

“너도 사실 사람을 살리는 거 싫어하지 않지? 그래서 사람을 살리다 저 능력, 상어들에게 들킨 것 아니야?”

이건 추측이었다.

흰수염고래의 능력이 어째서 상어에게만 알려졌을까.

어쩌면 누군가를 돕다가 들킨 거라면?

“어째서 당신은……. 모든 것을 아는 사람처럼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화가 난 것처럼 들렸지만, 나는 안다. 이건 레바이식의 항복 신호였다.

“게다가 왜, 말씀하시는 것이 모두 다 진실인지도. 제가 어째서 당신을 한 번쯤 믿어 보고 싶은 것인지도 참 모를 일입니다.”

말없이 나를 노려보던 레바이는 이내 작게 한숨을 쉬었다.

“……10년 걸립니다.”

하, 10년?

내가 그렇게 둘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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