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5화
오금이 저려 움직이지 못하는 순간에도 아게노르의 얼굴에는…… 환희가 피어올랐다.
대체 제 여동생의 힘은, 한계가 어디란 말인가?
하지만 동시에 아게노르는 이 상황이 당황스러웠다.
대체 왜, 무엇 때문에 이렇게 분노를 느꼈단 말인가?
한편 그나마 아틀란에게는 칼립소가 분노한 저 모습이 익숙한 모습이었다.
“……죽었어? 어쩔 수 없지.”
“내가 아직 약한 탓이야.”
아틀란이 아는 가주 칼립소 아콰시아델은, 때때로 누군가를 지키지 못하면 이런 모습을 보이곤 했다.
다만 아틀란은 피에르 아콰시아델이 칼립소에게 이만큼 소중한 존재였다는 사실에 놀랐다.
앞선 회차의 삶을 떠올릴수록 현재의 삶은 엉망이 되어 갔다.
다정한 부녀인 체하지만 그럼에도 마음 깊이 허락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아틀란 자신이 그랬듯, 엉망진창이었던 앞선 삶을 기억하는 칼립소 또한 쉽게 주변에 정을 주지 않았으리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야, 야야. 아틀란. 그래도 우린 친구잖아?”
자신에게 지난 삶과 다르게 레빈이라는 친구가 생겼듯이.
칼립소에게도 피에르 아콰시아델의 존재가 남달랐던 것이었구나.
아틀란은 부족한 머리 대신 가슴으로 이해했다.
이러한 몰이해와 이해가 교차하는 사이.
벽에 주먹을 짚은 채 씨근덕거리는 칼립소 주변으로 그 누구도 다가가지 못했다.
레바이는 아직도 몽롱한 표정의 웨일을 안은 채 어쩔 줄 몰라 했다.
‘대체가……. 저분은 보는 족족 색다른 모습을 선사하는군.’
칼립소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저를 압박하는 힘, 아니, 이 주변을 장악한 투기 때문에 말조차 제대로 하기 힘들었다.
적어도 저 피가 뚝뚝 흐르는 주먹은 제아무리 냉철한 저라도 보기 힘들었다.
어쨌거나 칼립소는 자신과 웨일의 은인이었으니까.
“형, 형.”
“응, 웨일.”
“……칼립소가, 아파 보여. 치료해?”
“……글쎄다, 치료할 수 있을까.”
레바이는 겨우 대답한 채 한숨을 쉴 뿐이었다.
그때, 이 순간 유일하게 한 사람만이 칼립소에게 다가갔다.
피에르에게서 흘러나온 물이 칼립소를 들어 올렸다.
피에르는 그대로 칼립소를 제 품에 안은 채, 차가운 낯으로 모든 이들을 향해 말했다.
“잠시 시간을 갖지.”
“…….”
칼립소가 안긴 순간 공기를 짓누르던 투기가 사라졌다.
“모두 나가 있도록.”
좌중 모두에게 행하는 축객령이었다.
어쩔 수 없이 나가게 된 이들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칼립소를 서툴게 토닥거리는 피에르의 모습이었다.
모두 지하 공간에서 계단을 통해 오르는 동안, 계단 끝에 도착할 때까지 누구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형, 나 잘못했어?”
“아니, 넌 잘못 없어.”
레바이는 울상인 웨일을 달랬다. 칼립소는 그렇게 보여도 여덟 살이었던가.
웨일은 칼립소보다 어린 나이였다.
덩치만 커다란, 아직 어린아이.
레바이가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웨일, 어떤 충격은 이성적이지 못한 분노를 불러오곤 해. 나도 만약 웨일 너를 살릴 수 없다는 소릴 들었다면 비슷한 반응이었을걸.”
“……못 살려?”
“넌 최선을 다했어.”
레바이는 웨일을 토닥였다.
그래, 웨일은 최선을 다했다. 이리 생각하며 레바이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살릴 수 없는 게 아닐걸. 아주 힘들기야 하겠지만.”
레바이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한편 일리아는 지하실 계단을 빤히 보았다. 다시 떠올릴수록 오싹한 힘이었다.
놀라우면서도 신기했다.
그간 이런 힘을 가진 채로 숨겨 왔단 말인가?
대체 칼립소는 그 나이에 어떡하면 그런 경지를 이룩했단 말인가?
일리아의 옆에 있던 리리벨이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근소한 차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범고래 중에서도 특히나 공감 능력이라고는 전혀 없는 범고래답게 분함이 먼저 들었다.
분하지만 칼립소와 아주 많은 격차가 나는 건 아니라고 자부했건만.
자부심이 산산조각 난 기분이었다.
“근소는 무슨.”
리리벨이 사납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예쁘장한 얼굴엔 분노가 떠올랐다.
“아틀란 아콰시아델.”
아틀란이 저를 향해 비아냥거렸으니까.
“너 지금은 나도 못 이겨. 그 실력으로 내 여동생에게 비벼 보겠다고? 웃기시네.”
“해보겠단 거야?”
아틀란이 태연하게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해봐.”
리리벨이 피어 올린 힘에 맞춰 아틀란에게서도 사나운 물의 힘이 일렁거렸다.
“머리가 더럽게 좋으니 알 텐데, 우린 본능이 먼저 아닌가?”
본디 타고난 재능은 리리벨이 앞섰다. 하지만 아틀란은 지난 생의 기억이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힘의 숙련도가 남달랐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아틀란과 리리벨의 힘 사이로 아름다운 푸른빛의 물이 끼어들었다.
아게노르였다.
“……난 감정적인 이해력도 낮고 공감도 잘 못 하는 사람이지만, 여기서는 닥치고 있는 쪽이 맞다고 생각하는데. 여동생님에게 쫓겨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야.”
아게노르의 말에 리리벨과 아틀란의 힘이 사라졌다.
아게노르의 말이 맞았다.
그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지만. 어쨌거나, 아기 범고래들이 할 일은, 제 주인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계단 앞에선 레바이가 웨일을 달래는 말만 울려 퍼졌다.
그때였다.
자그마한 그림자가 그들이 있는 공간에 드리워졌다.
심상치 않은 느낌에 아틀란이 고개를 홱 돌렸다.
‘뭐야, 이건…….’
아틀란은 이 힘을 안다. 어찌 모를까?
‘용.’
……자신이 죽기 전에 마주했던 힘이다. 폭주한 용 공작의 힘.
고개를 돌린 곳엔 자그마한 소년이 서 있었다.
칼립소가 매번 친근하게 ‘용용이’라 부르던 소년이.
사실 아틀란은 에키온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듣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저 칼립소가 잠시 보호하게 된 소년이라기에 그러려니 했다.
알아보지 못한 이면엔, 3회차의 용 공작은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존재였으며.
성인이 된 용 공작의 얼굴을 흐릿하게 기억하는 탓도 있었다.
에키온을 본 웨일이 흠칫 놀랐다. 그러나 웨일이 이토록 사색이 된 이유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에키온은 이들을 하나씩 돌아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갸웃했다.
“칼립소, 왜, 슬퍼해?”
아틀란은 온몸에 힘을 끌어 올렸다. 여차하면 제 힘을 모두 끌어모아 막을 작정이었다.
저건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약하지만 분명 용 공작의 힘이었다.
“누가, 울렸어?”
그리고 아틀란뿐만 아니라 모두가 고요 속에서 심상치 않은 힘을 느꼈다.
아틀란이 숨을 삼켰다.
젠장, 이 여동생이 대체.
‘뭘 키우는 거야?’
* * *
끄으응.
나는 양손에 얼굴을 묻은 채 열심히 고민했다.
‘대체 언제쯤 고개를 들어야 아주 자연스럽고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우습게 보지 말아 주었으면 한다. 나는 현재 아주 치열한 고민 중이었으니까.
‘대체 왜 그렇게 화를 낸 거야?’
이해할 수가 없네.
마치 관객석 사이에서 갑자기 우아아악 소리를 지르며 공연 중인 무대 위에 올라간 기분이랄까.
아까 거기 있던 우리 애들 중에 내가 이러는 이유를 이해한 사람이 하나라도 있을까.
‘없지.’
그나마 있다면 아틀란일까.
그놈은 소중한 걸 잃는 기분을 잘 알 테니 말이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제 진정된 건가.”
아빠의 나지막한 소리에 다시 움찔하고 말았지만.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지 못하는 거라면 계속 그리 있어도 좋다.”
“……그렇게 말하면 더 쪽팔린 거 몰라?”
조그맣게 중얼거리자, 머리 위에서 작은 바람 소리가 들렸다.
아, 웃었다.
“난 네가 평생 이리 있어도 좋으니, 편히 행동하란 소리였다.”
“평생 이러고 있고 싶겠어?”
나는 마침내 손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하도 힘주어 가리고 있던 탓에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불빛이 눈부셔 살짝 찡그렸더니, 커다란 손이 차양을 만들어주었다.
아빠를 다시 보자니 기분이 묘했다.
“날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
“부끄러우니?”
“응. 사실…… 진짜 부끄러운 건, 이런 일에 평정을 유지 못 한 내 모습이야.”
난 솔직하게 말하며 중얼거렸다.
‘그래, 갑작스럽게 화를 내는 건 아니었지.’
사실 좀 더 알아보고 화를 냈어도 좋으련만. 하필 그 순간에 모두가 죽던 그때가 떠오를 건 또 뭐란 말인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인정해야 했다.
눈앞의 아빠가 3회차의 수하들만큼, 그 세 놈의 오빠들만큼 소중해져 버렸다는 것을.
“난 나쁘지 않았다.”
아빠가 나를 안은 채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날 생각해서 그런 것 아닌가.”
“멋대로 화를 내는 게?”
“평생 날 위해 화를 내는 이는 없었으니, 그 또한 나쁘지 않았지. 벽을 부숴 버린 것은 놀랐지만.”
아빠가 잠시 고민하더니 이어서 말했다.
“다만 온 힘을 다해서 두드린 게 그것밖에 못 부순 거라면 좀 실망이군.”
“……나름의 이성을 가지고 부술까 봐 힘 뺀 거거든?”
“그렇더라도, 그 정도의 힘인가.”
어딘가 살짝 장난스럽게마저 느껴지는 목소리에 조금 어이가 없어졌다.
동시에 웃음이 흘러나왔다.
“됐어. 취소야. 아빠 생각해서 화를 낸 건 아닌 걸로 해.”
아빠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점차 진정하는 동시에 차분해질 수 있었다.
조금 뒤 일리아와 아이들을 다시 불렀는데…….
이게 웬걸.
‘얘네들, 표정이 왜 이래?’
다들 표정이 매우 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