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3화
“공녀님.”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레바이가 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자연스럽게 웨일을 슬쩍 제 뒤로 숨기면서 말했다.
“외람되지만 그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한 가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예의 바르지만 어딘가 까칠한 낯이었다.
“저희를 책임지시겠다고 하셨지요.”
“그랬지?”
“예, 그런데 어찌하여 약조하시고 저흴 방치하셨던 겁니까?”
방치라니. 나는 눈을 깜빡였다. 절로 고개가 갸웃 기울어졌다.
“방치? 뭐야, 일리아가 너흴 학대라도 했어?”
“……아닙니다.”
“굶겼어?”
“그것도 아닙니다.”
“그럼 잘 먹고 잘 잤네? 너희가 잘 지냈던 건, 일리아가 내게 충성하는 사람이기 때문인데. 여기 어디에 방치를 말할 틈이 있는데?”
“…….”
레바이와 내 눈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흘끗 일리아를 보았더니 일리아는 슬쩍 난감한 빛 도는 시선을 보낼 뿐이었다.
“참고로 말하면, 다그치는 거 아니야. 난 네가 여기까지 계산 못 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왜 이리 까칠하게 나오냐는 거지.”
말투를 조금 누그러뜨리자, 레바이가 움찔했다.
사실 나라고 찾아가고 싶지 않았겠나.
“내가 최근 귀찮을 정도로 시선을 받는단 건 알려 줬을 테고 교육 기관에 있었던 너라면 어떤 분위기였을지도 잘 알았을 거잖아?”
레바이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예. 돌려 말하는 건 저도 소질이 영 없는 듯하니, 그냥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웨일이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웨일? 나는 의아했다. 그도 그럴 게, 걘 지금 네 뒤에서 이글이글한 눈동자로 날 노려보고 있는데?
“혹시 쟨 호감을 노려보는 걸로 드러내는 애야?”
“당신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래? 기특하네. 약속 안 지키는 놈은 처단해야지.”
“……당신 얘기입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고는 웨일을 응시했다.
“웨일. 너 볼수록 단순한 게, 여기 사는 내 친구랑도 닮았다. 내 친구랑 잘 지내야 해?”
“친구라면…… 일리아 님이 말씀해 주신 여기 산다는 공녀님 친우분 말입니까?”
“응.”
일리아를 통해서 이곳에서 살게 되었을 때의 간단한 규칙 등을 전달한 뒤였다.
“지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여기엔 없어. 조금 뒤에 소개해 줄게.”
사실 이 자리엔 에키온이 없다.
내가 아빠 거처에 오면 언제나 껌딱지처럼 내 옆을 졸졸 쫓는 에키온이었지만, 딱 한 가지.
‘지하 공간만은 피하곤 했지.’
처음에 지하 공간에 들어가려 할 땐 사색이 된 낯으로 오길 꺼려 했다.
몇 년이 지난 지금은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여전히 지하엔 들어오려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도 대답이 없더라.
웬만하면 내 질문에 열심히 대답하는 에키온인데 말이다.
……내 추측이지만 지하실과 관련된 나쁜 기억이 있는 듯한데 말하기 싫은 모양이구나 싶었다.
‘아이와 지하실, 뭐겠어.’
내 얼굴로 분노가 스몄다.
‘보통은 학대 정황이지.’
어두운 곳에서 일어나는 학대, 내가 복어 수인에게 당했던 것처럼 말이다.
아무튼 간에 이러한 이유로 에키온은 이 자리에 없었다.
“앞으로 여기서 지낼 거란 이야기는 잘 들었지?”
“……들었어.”
웨일이 머뭇거리다가 덧붙였다.
“……요.”
아무래도 못 본 한 달 사이 교육이라도 받은 걸까.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힘들면 굳이 높여 말할 필요 없어.”
“괜찮으시겠습니까?”
대답한 건 웨일이 아닌 레바이였다. 나는 가볍게 끄덕였다.
“저 애가 가진 특기는 알려진 순간 특기에 걸맞은 대우를 받을 거야.”
“…….”
“설사 아니더라도, 내가 그렇게 만들 생각이야.”
나는 착취하려고 작정한 상어들과는 다르다. 말에 담긴 이런 뜻을 이해한 걸까.
레바이의 얼굴이 조금 편안해졌다.
완전히 보호자 모드네.
‘생각해 보면 애를 키우는 입장이란 게, 나랑 지금의 레바이랑 비슷하단 말이지.’
나는 레바이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 주고는 두 소년을 번갈아 보았다.
“이제 좀 해결됐지?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자.”
내가 이날을 얼마나 기다린 줄 알아?
잠시 뒤 세 사람을 굴리던 아빠가 이쪽으로 왔다.
“안녕하십니까. 피에르 님을 뵙습니다.”
일리아가 정중하게 인사하자, 아빠는 보일 듯 말 듯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아빠만 온 거야? 쟤들은?”
“횟수를 끝내면 오겠지.”
“오, 옛날 생각나네.”
나는 지하 공간 한편에서 나란히 바윗덩어리를 어깨에 얹은 세 범고래를 바라보았다.
곧 시선을 돌렸다.
“아빠, 전에 말했지? 이제 곧 훈련 조교가 아니라 더 산뜻한 삶을 살게 될 거라고.”
아빠에게는 웨일과 레바이가 여기 살게 될 거란 이야기를 간략하게 설명해 둔 뒤였다.
이때 웨일의 능력에 대해선 자세히 설명하기보다는 선물 같은 능력이라는 정도만 얘기해 뒀지.
“산뜻한 삶이라, 그 삶에선 무얼 하게 되는데?”
“훈련 조교.”
“…….”
“산뜻한 훈련 조교인 거지.”
“……뭐가 다른 거지?”
“당연히 농담이지.”
나는 싱글싱글 웃었다.
“여기 있는 웨일의 능력은 ‘치료’ 능력이야. 살아 있는 치료약이라 불릴 정도로 대단한 특기를 가졌어. 어떤 병이나 상처든 고칠 수 있거든.”
병이라는 단어에 아빠 또한 별수 없었는지,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이.
“정말 어렵게 찾았지.”
그래, 어렵게 찾은 게 맞다. 한 회차가 지나간 뒤에야 쓸 수 있게 된 정보니까?
“아빠의 병을 고칠 수 있어.”
“……그런가.”
아빠는 기쁜 얼굴도 슬픈 얼굴도 그렇다고 화가 난 얼굴도 아니었다.
모든 것이 뒤섞인 듯 기묘한 표정으로 짧게 끄덕였다.
“일단, 바로 치료가 되는 게 아니라, 음 웨일, 아빠의 손을…….”
나는 웨일 쪽을 돌아보았다가 조금 놀랐다.
“웨일?”
웨일이 레바이 뒤에 숨은 채로 움찔했다. 하필 어린애치고 덩치가 커서 숨겨지지도 않았는데.
흡사 커다란 고래가 숨겠답시고 머리만 구멍에 넣은 듯한 모양새였다.
나는 레바이에게 눈짓했다.
쟤 왜 저러는데? 눈짓을 받은 레바이가 웨일에게 물었다.
“웨일, 왜 그래?”
“……무, 무서워. 형.”
아하. 나는 웨일의 또 다른 능력을 떠올렸다.
‘웨일의 눈에 아빠가 착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건가?’
저 태도로 보아 그럴 가능성이 커 보이니, 나는 얼른 아이를 진정시켰다.
“괜찮아, 우리 아빠가 착한…… 착한…….”
이런, 차마 말이 나오지 않는군.
“음, 착한 사람은 아니지만 자기 편한테는 착할 거야! 아마도?”
사실 지금은 잘 지낸다지만. 자식을 한번 버린 아빠를 착하다고 하기엔, 음, 나도 양심이란 게 있다.
금붕어 똥보다 작아서 그렇지.
“그렇지 아빠?”
“네 편이라면.”
“음, 정정할게. 내 편이면 착하게 구실 거래.”
“…….”
어째 순간이지만 맹수의 목줄을 쥔 조련사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몇 번이고 비슷한 말을 한 뒤에야 웨일은 겨우 안심한 얼굴을 했고.
그럼에도 우직한 낯에 미심쩍은 시선을 한 채로 드디어 아빠의 손을 잡았다.
이때 즈음.
언제 온 것인지 저 끝에서 구르던 아틀란, 리리벨, 아게노르 세 사람도 다가와 동참한 채였다.
“쟨 누구인데 피에르 님의 손을 잡고 있는 거야?”
“이번에 새로 온 신삥, 아니 신입이래.”
“그럼 내 밑이네?”
제일 먼저 말을 꺼낸 건 리리벨이었다. 순순히 답을 해 준 건 의외로 아게노르였다.
그러고는 아게노르가 거만한 눈으로 이렇게 말하더라.
“크흠. 순서로만 따지면 리리벨, 아틀란, 두 사람 다 내 밑인 거 알지?”
“지랄하네.”
……우리 애들은 왜 이리 서열에 예민할까. 나는 혀를 쯧 찼다.
“마침 잘됐어. 능력을 보기 전에 소개부터 해야겠네. 이쪽에 덩치 크고 잘생긴 아기는 웨일, 저쪽에 안경 쓰고 나름 잘생긴 친구는 레바이야. 이상 끝.”
나는 반대로 레바이와 웨일을 보며 말했다.
“그리고 이 세 범고래는 내 수하들. 누군진 말 안 해도 알지?”
“……소개는 그게 끝이냐?”
“그럼 뭐가 더 필요한데? 네 존재 자체가 증명이란 소리야.”
그러자 아틀란 놈이 헛기침하며 슬쩍 좋아하는 티를 냈다.
그 모습에 리리벨이 혀를 차긴 했다.
“……단순하긴.”
“뭐야?”
또 한 번 싸울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나는 두 사람이 싸우도록 두지 않았다.
“앞으로 내 세력은 계속 늘어날 거야. 내 목표는 너희 모두 알고 있겠지?”
“…….”
“그리고 여기 있는 모두는, 내 세력의 중심이 될 거야.”
내 진지한 이야기가 끝나기 무섭게 레바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잠시만요. 저는 아직 당신을 따르겠다고 한 적이…….”
“안 따르게?”
“네?”
“지금부터 따르면 되겠네.”
“네??”
“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