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2화
“하나?”
아빠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어쩐지 그 사람이 혹시 엄마 아닌가 싶었지만.
예전에 엄마의 손수건을 발견했을 때처럼 영 물어볼 얼굴이 아닌지라 모른 척해 주었다.
“그나저나 지극히 범고래다운 말이었다.”
“그럼 당연하지? 내가 범고래인데.”
이기심, 탐욕, 제멋대로 구는 데는 1등이라 할 수 있는 수인이다.
사실 내가 앞선 회차에서 사랑을 하지 않은 건 차라리 상대에게 잘된 일일지도 모르겠다.
일단 좋아하면 갖고 싶은 생각부터 드는 놈이 바로 우리 범고래들인데.
이것이 사랑이랑 엮이면 이래저래 좋은 꼴을 못 봤다.
‘그나마 희망 편이 백부인 로데센과 백모인 헤일라일까.’
백부가 백모에게 집착하다 못해 엄청난 애처가라는 사실은 범고래 사회에 이미 자자한 이야기였다.
“칼립소.”
“응, 그래.”
나는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엔 애가 뭘 보고 배우겠냐 걱정했지만.
사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에키온은 아마도 앞으로도 내 가치관을 그대로 닮아 갈 터다.
세 번이나 회귀한 내 가치관, 신념이 그다지 정상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래서 바라는 점이 하나 있다면.
나는 네가 우리 범고래들의 좋지 않은 집착은 닮지 않으면 좋겠어.
“네 마음은 고마워.”
난 웃으며 에키온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다시 고민에 잠겼다.
고민은 다시 웨일에 대한 것으로 넘어갔다.
어떡하면 웨일을 자연스럽게 아빠의 거처에 살도록 할 수 있을까.
‘안 되겠어, 이제 정공법은 무리야.’
이렇게나 시선이 몰린 상황에서 아이를 하나 더 들였다간 웨일의 정체를 들킬 위험이 너무 컸다.
사실 아빠의 저택 내부 자체는 철통같은 보안을 자랑했다.
에키온이 문제없이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것만 봐도 말이다.
다만, 영원히 밖에 나가지 않을 수는 없으니 어떻게든 정식으로 데려오려 했지만.
‘역시, 사람은 모든 걸 손에 쥘 수는 없는 법인가.’
결정했다.
“그냥 숨겨서 데려와야겠어.”
사실 몰래 데려오는 방법이 없어서 안 데려온 것은 아니었으니까.
나는 고개를 돌려 아직도 씩씩거리며 물의 힘으로 투닥투닥 싸우기 바쁜 둘째와 셋째를 보았다.
이전에도 아빠의 응접실에서 싸운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꽤나 크게 싸워서.
‘내가 둘을 바닥에 한 방에 눕혔지, 아마?’
사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아빠한테 응징당할 것 같아서였다.
그때 내가 직접 이곳에서 주먹 쥐고 싸웠다가는 다시는 출입 못 하게 할 거라고 경고했더니.
그 후로는 저렇게 물의 힘으로 싸우더라고.
남들이 보기엔…….
‘사이좋은 물장난으로 보인단 말이지.’
나는 피식 웃으며 하늘을 보았다.
‘인원이 늘었지.’
레바이와 웨일의 거처를 옮기는 일에 더해 조금은 어수선해진 주변을 정리할 필요를 느꼈다.
“어차피…… 한 번쯤 중간 정리가 필요하긴 했으니.”
* * *
며칠 뒤, 아빠의 거처 지하에 아틀란과 아게노르가 모였다.
이외에도 한 사람 더 불렀지만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끄응, 끄으응.”
나는 허리를 짚고 콩콩 두드리는 아게노르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너 며칠 전부터 왜 자꾸 끙끙대는 거야?”
생각해 보니, 얼마 전 응접실에서 아틀란과 투닥거릴 때에도 저렇게 앓는 소리를 내지 않았던가?
“스승님께 사랑과 애정이 담긴 특훈을 받아서야.”
“……세상에, 대체 왜 네 발로 지옥길에 들어간 거냐?”
아빠가 빡세게 굴렸고, 그걸 자처했다는 소리인데. 사실 아빠가 작정하고 굴리면 나조차도 이게 사는 건지 지옥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일 때가 많았다.
내가 이러한데 아게노르에게는 어떠했겠나.
더한 지옥이었을 터였다.
그런데 어쩐지 아게노르의 얼굴엔 씩, 뿌듯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괜찮아, 스승님이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셨어.”
“……네 갈비뼈는 안녕하냐?”
“갈비뼈?”
“분명 사실 기반 독설에 뼈가 부러져도 한 열댓 번은 부러졌을 텐데.”
“……여동생님, 사실대로 말하자면 난 이미 오징어 수인인지도 모르겠어.”
“저런, 뼈가 사라졌구나.”
아게노르가 남몰래 눈물을 훔치는 척 과장스럽게 내게 기댔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 손을 잡아 꺾었다.
아게노르는 죽는다고 아아악, 소리치면서도 얼굴엔 뿌듯한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
때마침 지하에 들어서는 사람을 보면서 나는 아게노르를 툭 놓아주었다.
“모두 모인 건가?”
“응, 다 왔네.”
마지막으로 들어온 이는 가녀린 체형에 로브를 푹 뒤집어쓴 모습이었다.
그 사람이 로브를 벗자, 지금까지 한곳에 조용히 앉아 있던 아틀란이 벌떡 일어났다.
“뭐야, 저 계집애가 왜 여기 있어?”
막 들어선 이는 리리벨이었다.
리리벨 또한 아틀란의 모습을 확인하고 인상을 팍 찡그렸다.
“누가 품위 없는 단어를 쓰나 했더니, 뇌까지 근육으로 들어찬 범고래가 여기 있었네?”
“뭐야?”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음, 역시나.’
3회차에서도 아틀란과 리리벨의 사이는 매우 좋지 않았다.
일단 나이 대가 비슷한 데다가, 난 몰랐지만 어릴 때 함께 교육 기관에 있으며 스치는 순간이 많았던 모양이다.
“걘 교육 기관에서도 재수가 없었어! 나보고 뇌까지 근육이면 뭐 하러 사냐고 했다고!”
“……사실 아냐?”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