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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범고래 아기님 (128)화 (128/275)

제128화

나는 치료의 힘이라길래, 게임이나 판타지에 나오는 ‘힐러’ 혹은 ‘치료사, 신관’ 같은 사람을 생각했다.

왜, 마법사들처럼 주문을 외우면 빛이 뿅 하고 나와서 감쪽같이 치료하는 것 말이다.

게다가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던 게, 여주인공의 힘은 이쪽에 가까운 힘이었단 말이다!

“보셨지요? 말처럼 간단한 힘이 아닙니다.”

“……대체 내가 뭘 본 거지?”

얼떨떨하게 중얼거리자, 레바이가 이해한다는 듯 끄덕였다.

“예, 그런 감상이 나올 수 있을 겁니다. 저도 처음에 그랬으니까요.”

레바이가 웨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웨일은 어느새 얼굴에 몽롱함은 어디로 가고, 처음 봤던 모습 그대로 또랑또랑한 눈이었다.

다만 레바이에게 향하는 웨일의 눈은 신뢰로 가득했다.

“웨일의 힘은 치료의 힘이긴 하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등가교환을 통해 치료할 수 있는 힘’입니다.”

“지금 네가 보여 준 것처럼…… 어떠한 대가가 필요하다?”

“네. 상처와 병증에 따라서 웨일이 필요한 대가를 말해 줍니다. 정확한 재료가 준비 되어야지만이 치료되는 것이지요.”

절로 입이 벌어지는 느낌이었다.

‘뭐야, 왜 그리 복잡한 건데?’

조금 억울하기도 했다.

여주인공은 요술봉을 들고 ‘뿅 나아라!’ 하면 치료되는 힘이었다면, 이쪽은…….

‘집을 짓게 벽돌부터 가지고 와라? 완성은 해 드릴게.’

……이런 소릴 들은 기분이라고!

갑작스럽게 분노가 치밀었다.

이건 뭐지? 또 수중 동물 수인만 차별하는 거냐? 왜 우리 애들만 이런 힘을 주는 건데?

갑자기 보이지 않는 신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화가 나신 겁니까? 그, 치료엔 협조할 예정입니다만.”

“아니, 아니야.”

얼른 분노를 가라앉혔지만, 레바이는 눈치 빠르게 내 분노를 알아차린 뒤였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대가가 인간의 목숨이라거나 하진 않습니다. 보다시피 인간을 제외하고 자연에 존재하는 것들을 요구합니다.”

“……인신 공양 같은 건 생각도 못 했는데, 아니라니 다행이긴 하네. 그보다 넌 어디까지 생각한 거야?”

“위험한 힘이라면 미리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건 잘했네.”

똑똑한 놈답게 이미 웨일의 힘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한 듯했다.

그 덕에 간편하게 누릴 수 있으니 다행이긴 한데.

‘저 말에 따르면 상처 혹은 병이 심할수록 요구하는 물건의 희귀성이 커진다.’

레바이 표현처럼 이건 등가교환이니까.

“죽기 직전의 상처와 심각한 병을 고치는 데는 그만한 대가를 요한다는 소리입니다.”

조금 전 눈이 몽롱해진 웨일의 모습을 보아, 제 의지로 뱉어내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끄응 하는 신음을 흘렸다.

‘솔직히 대가가 없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런 대가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나는 고민하다 말고 눈을 깜빡였다.

“그럼 우리 아빠는 어떻게 치료할 수 있는데?”

“일단 이 아이가 가서 ‘진단’을 내려야 합니다.”

“네 손을 잡은 것과 같이?”

“예.”

아빠랑 웨일이 만나야 한다는 소리였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아틀란은 내가 대체 뭘 본 건가, 하는 얼굴이었다.

“뭘 그리 놀라? 넌 수중 동물 수인들의 별별 특기를 다 봐 와 놓고서.”

“아니, 그렇긴 한데……. 제길, 그 망할 아귀 놈들의 세뇌 이후로는, 아니 그만큼 놀란 건 처음이라고.”

“욕은 왜 하냐? 애 겁먹게.”

“겁먹기는, 눈 하나 꿈쩍 안 하는데 무슨.”

이렇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와중에도 내 머리는 열심히 돌아가고 있었다.

‘아빠의 병은 공식적으로 불치병이라 알려진 병인데.’

과연 이 병을 치료하는 데엔 어떤 대가가 필요한 걸까?

거대한 힘에는 대가가 따른다.

나는 이 말의 의미를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다.

‘생각할수록 좀 열받네? 아빠가 아프고 싶어서 아픈 것도 아닌데.’

치료하는 대가는 왜 크단 말인지.

한참 생각하는데, 누군가 우리 방의 문을 두드렸다.

레바이는 잽싼 몸짓으로 웨일에게 로브 모자를 뒤집어씌우고 자신도 모자를 썼다.

“그리 경계할 것 없어, 내가 초대한 손님일 테니까.”

“손님이라니요?”

나는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만, 레바이와 웨일에게 로브를 벗으란 말은 하지 않았다.

“보면 알아.”

그리고 직접 나가서 문을 열자, 이 호텔의 지배인이 보였다.

“손님, 말씀하셨던 손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아, 응.”

그는 깊이 고개를 숙이고는 돌아서서 사라졌다. 더는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겠다는 듯이.

나이 든 지배인에게서 고개를 돌리자, 익숙하고도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공녀님.”

나는 생긋 웃었다.

“응, 어서 와.”

나는 옆으로 비켜서며 그녀를 반겼다.

“들어와, 일리아.”

벨루가의 수장 일리아였다.

“혼자 왔어?”

“아뇨, 아래층에 로바와 아이들이 함께 있습니다. 아무래도 가족끼리 단란한 시간…… 정도로 보이려 하다 보니 말이지요.”

“응, 핑계로 딱 좋네.”

싱긋 웃으며 집 안쪽을 고갯짓했다.

“나도 마침 가족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으니까.”

대외적인 핑계가 될 명분을 주고받으며 나는 일리아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급하게 연락을 받아서 놀랐을 텐데 이렇게 빨리 와 줘서 고마워.”

“아닙니다. 주군께서 원하시면 제국 북단이라도 달려가는 것이 도리 아니겠어요?”

“……미리 말해 두지만 그런 명령은 내리지 않아.”

안으로 들어선 일리아는 흠칫했다. 팔짱을 낀 아틀란을 보고서 잠시 놀란 듯했다.

“……음, 가족이란 게 아틀란 님이셨다니. 확실히 남매간에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계셨군요.”

“글쎄다, 저놈도 오붓하다고 생각하려나?”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보다 네가 봐 줬으면 하는 건 저쪽.”

나는 레바이를 가리켰다.

레바이는 여전히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넌 계속 그렇게 있을 거야?”

이렇게 말하자, 레바이가 일리아를 확인하고는 천천히 모자를 벗었다.

일리아가 살짝 놀랐다.

“어머나. 레바이니?”

“안녕하세요, 일리아 님. 오랜만입니다.”

“그러게. 칼립소 님이 갑자기 이곳으로 날 부를 때만 해도 혹시나 싶었는데, 역시 너였구나.”

“그렇습니까?”

“이 동네에 돌고래들이 많이 살았으니 말이야.”

“…….”

레바이는 일리아를 완전히 신뢰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일리아, 일단 시간이 없어서 본론부터 말하자면 벨루가 측에서 레바이와 레바이의 가족을 보호했으면 해.”

“……가족, 말인가요?”

일리아의 눈이 아직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웨일 쪽을 향했다.

나는 설명하는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자, 레바이. 네가 직접 말해. 따로 시간을 줄 테니.”

내가 잡은 방은 넓었기에 지금 우리가 있는 거실 말고도 다른 방이 있었다.

방을 향해 고갯짓했다.

레바이가 웨일에 대해 밝힐지 말지는 선택에 맡기겠다는 듯.

“아콰시아델로 데려가지 않는 건, 더 눈에 띄기 때문입니까?”

“잘 아네. 전시장의 고래가 되고 싶진 않지?”

“…….”

“……지켜 주겠다고 하신 건 진심이셨군요.”

“그럼, 바다의 맹세가 어디 뉘 집 청어 이름이든?”

레바이가 조금 생경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바다의 맹세일지라도 말의 틈을 노려 얼마든지 꼼수를 부릴 수 있으니까요.”

“너 똑똑한 거 알아서 그런 수작질 안 해.”

할 수는 있지만 뭐하러.

“둘이 얘기나 나눠. 너도 벨루가가 더 편할 거 아니야.”

“…….”

레바이는 부정하지 않았다. 일리아에게 눈짓하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방으로 가.”

레바이는 웨일을 홀로 두고 가는 것이 조금 불안한 듯했지만 나를 한번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아틀란에게도 눈짓했다.

“너도 가.”

아틀란은 불만 가득한 표정을 하면서도 툴툴거리며 두 사람의 뒤를 쫓아갔다.

그렇게 거실에는 나와 웨일만 남았다.

“이제 그만 모자 벗어도 돼. 답답하지 않아?”

그러자 웨일이 천천히 모자를 벗었다.

“어차피 레바이 저놈은 일리아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을 거야.”

“……어떻게 알아?”

“왜 모르겠어. 일리아에게 바다의 맹세를 시켜 놓고서라도 제 편으로 만들 놈일걸.”

“…….”

그 정도는 해야 내 책사지.

나는 턱을 괸 채 웨일을 관찰했다. 쌍둥이와 마찬가지로 내 3회차에는 없었던 인물.

레바이가 마지막까지 미련을 가졌던 가족 같은 존재.

“앞으로 잘 부탁해.”

“뭐를?”

“레바이 저놈에게 소중한 존재라면, 내가 지켜야 할 존재기도 하니까.”

나는 씩 웃었다.

알아듣기 어려운 소리겠지만 상관없었다.

“그보다 너랑 이야기 나누고 싶었어.”

그래서 아틀란 저놈을 쫓아낸 거였는데, 의외로 눈치를 채고 움직인 것 같아 신기하긴 했다.

아니면 그냥 명령이라서 간 걸지도 모르지만.

“네 능력은 흰수염고래라면 모두 가지고 있던 능력이야?”

“……그래.”

웨일은 조금 까칠한 낯으로 끄덕였다. 확실히 레바이가 있을 때와는 달랐다.

경계 가득한 눈이다.

아무 말도 못 들으려나? 상관없다. 신뢰는 차차 쌓으면 될 테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레바이 형은 모르는 게 하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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