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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범고래 아기님 (125)화 (125/275)

제125화

레바이가 놀란 얼굴을 한 채 눈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생각지 못한 소리에 얼이 빠진 상황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칼립소는 태연한 얼굴이었다.

“뭘 그리 놀라? 세상에 공짜가 어딨어.”

분명 인형처럼 예쁜 얼굴이었다.

그런데 왜일까. 저 얼굴이 어째서인지, 악덕 업주처럼 보인 것은.

“도와줬으면, 너도 보답해 줄 거잖아?”

……야근을 잘 시킬 것 같은 얼굴이다.

왜 이런 감상이 든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저 공녀에 대해선 소문으로 접한 것과 시종들의 감상 말고는 들은 것이 없으면서.

감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내가 고통에 눈이 잠시 돌기라도 한 걸까.’

뭐, 그가 잘못 판단한 거라면 어쩔 수 없다. 도움을 주었으니 보답을 바란다는 저 말은 타당하긴 했다.

레바이가 소파에 누운 채 눈을 감았다.

“……바라는 것이 있는 사람처럼 말씀하시는군요.”

레바이는 문득 떠올렸다. 고통 속에 잠시 잊었지만, 칼립소가 분명히…….

‘내 이름을 불렀지.’

알려 주지도 않은 이름을 불렀던 것을 떠올렸다. 퍽 친근하게 불렀다는 사실도.

평소의 자신이라면 바로 알아차리고 경계부터 했겠지만, 고통 때문에 정신없던 상황이다.

실책이다.

레바이가 낮게 한숨 쉬었다.

무어라 다시 말하려는 찰나, 앞에서 털썩 앉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뜨자 소파 바로 앞에 앉은 칼립소가 보였다. 레바이가 깜짝 놀랐다.

“지금 무슨……!”

“쉿, 조용히 해 봐. 지혈부터 해야 할 것 아니야? 아. 붕대는 바닥에 떨어져 있길래, 좀 쓴다?”

“…….”

“똑똑하지만 응급처치는 엉망이구나.”

칼립소의 손에는 붕대가 들려 있었다.

레바이는 상처에서 대충 묶어 놓은 천이 떨어지는 감각을 느끼며 찌푸렸다.

……어째서 공녀님이 이리도 붕대를 잘 감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범고래들은 쌈박질에 익숙하니 이 정도는 당연한가?

아니다.

그들 아래 딸린 시종과 의원이 무수히 많을 텐데 뭐 하러 본인이 직접 하겠나.

역시 이 사람은 이상하다.

아파서 잘못 느낀 게 아니었다.

레바이는 이렇게 오래 칼립소를 머무르게 할 생각이 아니었다.

그의 눈으로 초조함이 스쳤다.

칼립소를 만난 순간부터 모든 일이 그의 예상을 벗어나고 있었다.

웬만해선 똑똑한 제 머리로 흘러가는 흐름을 파악하고 결과를 예측하는 레바이에게 생경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런 낯선 감각을 달가이 여기지 않았다.

“……공녀님. 치료는 됐으니까, 돌아가 주십시오.”

“음? 나 받을 거 있는데.”

“네, 보답은 꼭 하겠습니다. 바다의 맹세를 해도 좋으니. 일단 돌아가 주세요.”

“흐음?”

칼립소는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갸우뚱했다.

확실히 사랑스러운 소녀의 모습이었으나, 레바이는 고통 속에서도 신경이 곤두서는 기분을 느꼈다.

푸르른 눈동자가 웃음기 없이 자신을 응시했다.

이는 잠시뿐 곧 눈이 휘어졌다.

“왜? 집에 보물이라도 숨겨 뒀어?”

적어도 소문은 과장된 것이 아닌 듯했다.

저 나이 대 범고래에서 느낄 수 없는 위압감이었다.

그는 바이얀과 소르테, 그리고 아틀란과 벨루스가 저 나이 대일 때 본 적 있었다.

다르다.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낯선 사람이 집에 오래 머무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습니다.”

“아, 그건 우리 아빠도 그래. 그래서 수하들도 못 오는 곳이 되어 버렸지.”

칼립소가 태연하게 받아쳤다.

레바이는 붕대를 감아 주는 칼립소의 손이 확연하게 느려지는 것을 보았다.

마치 네가 무엇을 숨기는지 궁금하다는 듯이.

섣부른 축객령이 오히려 칼립소 아콰시아델의 호기심에 불을 지핀 듯했다.

낭패였다.

“……도망친다거나, 이대로 잠적할까 봐 걱정하시는 거라면 바다의 맹세를 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생각 안 했는데?”

칼립소가 고개를 기울였다.

“너, 도망 안 갈 거잖아.”

“…….”

“빚지는 것도 싫어하잖아?”

또다. 자신을 잘 아는 듯한 말투. 이번엔 착각이 아니었다.

“저를 아십니까?”

“응. 잘 알아.”

칼립소가 싱글싱글 웃었다.

“귀하디귀한 공녀님께서 어떻게 한미한 돌고래 가문의 수인을 아신다는 겁니까?”

“그러게. 귀하디귀한 공녀님이 관심 가져 주면 좋지는 않고?”

“예? 농, 이십니까?”

“농일까?”

칼립소가 턱을 괸 채 싱긋 웃었다.

“난 너처럼 잘생긴 애들은 알아 두는 취미가 있는데.”

“……예?”

능글맞은 말투에 한 번 놀라고, 조금 가까워진 듯한 소녀의 얼굴에 또다시 흠칫 놀랐지만.

누워 있던 탓에 물러날 곳도 없었다.

아틀란이 칼립소의 어깨를 잡지 않았더라면…….

레바이는 아마 다시없을 깊은 당황을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냈을 터였다.

“그만해.”

아틀란이 확 찡그렸다.

“쟤가 당황한 거 안 보여? 너 지금 말투 완전히…… 이전으로 돌아갔어.”

“아.”

칼립소가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눈을 깜빡였다.

‘아틀란이 있고 레바이 놈도 있으니, 나도 모르게 과거에 몰입했나 보네.’

칼립소도 제 실수를 깨달았다.

레바이가 반가워 말을 붙인다는 게, 어느새 레바이만 보면 자연스럽게 놀리던 말투와 태도가 흘러나왔던 것이다.

이게 다 당황하는 모습이 3회차와 전혀 달라지지 않은 저놈 탓이다.

‘재미를 느껴 버렸지 뭐야.’

칼립소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더니 레바이를 슬쩍 바라보고는 씩 웃었다.

“빨개졌네?”

“예?”

“아니, 뺨이 예쁘게 빨개졌다고.”

음. 이제는 그만두려고 했는데, 저 모습을 보니 놀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가까워, 가깝다고!!”

“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좀 놔.”

“야, 그러니까 그 말투가 문제라는 걸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들을래?”

“왜? 예쁘다는 말 때문이야? 둘째야, 너도 예뻐. 됐지?”

“…….”

아틀란이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참, 좋다고 따라 나온 내가 등신이지.”

“좋으면서 또 그런다.”

칼립소와 아틀란이 가볍게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레바이가 정신을 차렸다.

“제게 부탁하실 게 있다면 차라리 지금 빨리 말씀하시고 돌아가 주십시오. 힘에 부칩니다. 제가 기절한 모습을…… 구경하실 생각은 아니지 않습니까.”

칼립소의 시선이 레바이를 향했다.

칼립소는 능숙하게, 레바이 얼굴에 어린 초조함을 읽어냈다.

레바이가 왜 이런 얼굴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모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가 빠르네? 맞아. 나는 바라는 게 있어.”

레바이가 안심한 얼굴을 했다.

이렇게까지 쫓아내고 싶은 건가.

‘기억이 없다는 사실은 알지만 조금 서운해질 지경인걸.’

칼립소가 아틀란을 잠깐 응시했다가 다시 레바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 내가 바라는 건…….”

칼립소는 서서히 웃음기를 지워 냈다.

조금 전 예쁘니 마니, 장난스러운 말을 할 때와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범고래에게서는 볼 수 없는 동그란 눈매에다 줄곧 웃고 있었기에 상상할 수 없던 위압감이 레바이를 다시금 찾아왔다.

“너, ‘살아 있는 치료약’이 어디 있는지 알지?”

레바이는 칼립소에게서 흘러나온 말에 흠칫 놀랐다.

하필 상상도 못 한 말이 튀어나온 탓에 그는 놀람을 숨길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게 무슨 말인지…….”

“당황이 얼굴에 보이는데.”

“…….”

* * *

정곡을 찔린 듯한 표정이 한순간에 스쳐 지나간다.

“제아무리 평정심 유지가 주특기라도 이 정도로 아프면 유지가 어렵지?”

이렇게 말하긴 했으나 이놈의 포커페이스는 훌륭했다.

제 딴에는 놀란 걸 드러냈다고 생각했겠지만, 옆에 있던 아틀란이 몰랐을 정도로 거의 변화가 없었으니까.

‘와 이놈은 이 나이 대에도 난놈이었네. 데리러 오길 잘했다.’

내가 알아볼 수 있었던 건 이놈과 십수 년을 함께한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놈은 현재.

‘대체 어떻게, 이 공녀가 그걸 안단 말인가? 자신의 생을 건 비밀을.’

……하고 생각할 법한 얼굴이었다.

이곳 세계관은 육지 동물 수인과 수중 동물 수인이 대립하는 동시에 또 다른 특징이 있다.

바로 이 두 세력 간의 힘이 대척점, 혹은 대칭을 이룬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수중 동물 수인들의 대장인 범고래들에게는 ‘물의 힘’이 주어진다.

이 소설의 남자주인공이자 황실, 육지 동물 수인들의 대장인 사자에게는 우리와 유사하게 ‘땅의 힘’이 있다.

말 그대로 땅을 매개로 하는 힘이다. 서로 생명의 원천을 바탕으로 한 힘이 있단 소리다.

그리고 다람쥐 수인이자 이 소설의 여자주인공은 육지 동물 중 유일무이한 ‘치료’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수중 동물 수인 중에서도 비슷한 힘을 가진 수인이 있다는 말일까?

바로 그렇다.

‘지난 생에는 이걸 가주가 된 이후…… 한참 뒤에야 알았지.’

치료의 힘을 특기로 가진 수인은 없다.

소설의 여주인공인 그녀와 대척점이 되는 수중 동물 수인 외에는.

정확히는 똑같지 않고 비슷한 힘을 지닌 것이다.

내가 소설 내용에 집중한 탓에 이 사실을 잠시 간과했다.

‘설마하니 유일무이한 여주인공과 비슷한 능력이 있을 거라곤 생각 못했지.’

그리고 애석하게도 3회차에서 내가 이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지.’

그들은 모두 멸종당한 지 오래였다.

범고래들에게? 아니, 범고래들도 몰랐던 일이다.

범고래들 못지않은 악랄한 세력, 상어들에게 죽어 사라진 것이다.

그러니, 만약에 내가 3회차에서 살아 있는 아빠와 마주했다고 가정할까.

병을 치료해 주고 싶다고 마음먹었다 한들 그때는 불가능했을 거다.

치료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죽어 버렸으니까.

이 사실은 나도 우연하게 알았다.

“가주님, 제가 유언을 하나 남겨도 됩니까?”

“재수 없는 소리하지 마라, 확 너한테 유언장을 남겨 버리기 전에.”

“……제가 줄곧 돌보던 무덤이 있습니다. 제 동생 같은 아이인데, 제가 아니면 돌봐줄 이가 없어서요. 위치를 알려드릴 테니 꼭 챙겨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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