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3화
“어쩐 일이냐? 날 보자고 하다니.”
다음 날 점심.
보통 시종들이 가져온 점심 식사라거나, 루가루바가 꼭 챙겨 오겠다며 가져온 점심을 먹는 나이지만.
오늘은 특별히 금붕어똥처럼 따라다니는 아게노르와 쌍둥이를 떼어 놓은 채였다.
내 앞에는 아틀란 놈이 서 있었다.
이곳 중급 기관에는 오늘같이 날이 좋은 날 야외에서 점심을 먹을 만한 공간이 준비되어 있었고.
우리가 앉아 있는 곳도 파라솔과 예쁜 테이블이 있는 장소였다.
‘다만, 우리 주변엔 다들 얼씬도 하지 않고 있지만.’
제아무리 아틀란이 내 밑으로 들어오다 못해 발닦개(?)가 되었다는 소문이 돌아도.
여전히 아틀란의 위명이 무서운 건지, 중급 기관 아이들은 우리를 피해 후다닥 짐을 싸는 모습을 보였다.
‘차라리 잘된 일이긴 하지.’
이놈과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참이었으니까.
“꼭 오랜만에 만난 것처럼 말한다? 내가 보자고 하지 않더라도 네가 불쑥불쑥 잘만 찾아왔잖아.”
“뭐, 그거야…….”
아틀란이 머쓱하게 목 뒤를 주물렀다.
나이를 감안해도 커다란 덩치라 그런지 어울리지 않을 법도 한데.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네가 날 보지 않을 것 같아서…….”
이런 어수룩한 행동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것에서 새삼 놈과 내가 어린 모습으로 마주하고 있구나 싶었다.
눈치를 보는 놈과 마주하며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뭘 그리 눈치 보면서 말해? 눈치 볼 줄도 모르는 놈이.”
“뭐야? 나라고 안 보고 못 보는 건 아니거든?”
“그래, 장하다.”
“……칭찬 같은데 왜 기분이 나쁘냐?”
당연히, 칭찬이 아니니까?
나는 고개 숙여 웃다가 다시 들어 올렸다.
표정에서는 이미 웃음기를 뺀 뒤였다.
“둘째야, 너 물의 힘으로 소리 차단할 수 있지? 차단 좀 해 봐.”
“어? 어어.”
곧 우리 주변으로 투명한 막이 펼쳐졌다.
아틀란의 물의 힘은 범고래 중에서도 색이 짙은 편이었다.
아빠랑은 또 다른 색의 예쁜 물색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야, 그런데 너 소문처럼…… 진짜 각성은 못 한 거야?”
“어, 맞아. 그래도 너 하나 때려눕히는 건 문제없을걸.”
“그거야, 당연하겠지. 주먹 들지 마라?”
“덤비게? 알려 줄까?”
“……까불지 않을 테니까 주먹 좀 내려.”
아틀란이 양손을 들어 올렸다. 웃음이 절로 나온다.
“너만 보면 예전에 호전적이던 내가 떠올라.”
“…….”
유쾌하게 중얼거렸더니, 아틀란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넌 왜 예전이랑 달라 보여? 아니, 똑같으면서도 달라.”
“다른 생을 살고 있으니까 당연하지 않을까?”
“…….”
그러자 아틀란이 더 알 수 없단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이놈과는 오늘 이런 얘기를 하려고 만났다.
“너도 지난 생에는 친구 하나 없었잖아. 지금은 레빈이란 친구가 있고. 그거랑 똑같아.”
“……네가 피에르 아콰시아델 거처에서 살다시피 하는 거랑 내가 친구놈을 사귄 게 같은 거라고?”
“어.”
“그리고 네가 처음 보는 벨루가들이랑 푸른 머리 놈이랑 같이 있는 거랑도 마찬가지고?”
“맞아.”
회귀했다고 해서 삶이 똑같이 흘러가진 않는다.
“그럼 넌, 네 수하들은 찾아가지 않을 거냐?”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야. 하지만 모든 놈들을 데려올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은 들어.”
내가 바꿔 놓은 것들은 나비효과처럼 퍼져서, 어떤 일들은 더 좋게 바꿨을 것이고.
또 어떤 일들은 나쁘게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바이얀이 일찍 죽어서 벨루가들이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미래를 피한 것처럼.
또 누군가는 바이얀의 죽음으로 일어난 나비효과로 과거와는 다른 일을 겪었을지도 모른다.
“이번 생에서는 나와 만나지 않는 게 차라리 나은 놈들도 있어.”
사실 내 수하들 중에는 바이얀 무리와 그놈을 따르던 방계 놈들에게 당한 애라거나.
가문이 거의 몰살당하다시피 한 놈들이 다수였다.
“너 설마 버…….”
“버리는 게 아니야. 예전에 내 수하들은 원한을 기반으로 움직이는 놈들이 많았어. 나도 마찬가지였고. 근데 이번엔 다를 수도 있다는 거야.”
“……잘 모르겠어. 그게 버리는 거랑 뭐가 다른 건지.”
“너처럼 기억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 아닐까.”
지금은 바이얀 쪽과 원한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 놈들도 있을 테니까.
“…….”
나는 양손을 겹쳐 잡았다.
웃음기를 천천히 지우며 진지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넌 어디까지 기억해? 전에 완전하진 않다고 했지.”
아틀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선명했다가도 어떤 땐 그렇지 않기도 해.”
“응.”
아틀란은 지난 시간 내내 그랬다고 했다.
어떤 날에는 어제 일처럼 모든 것이 생생히 떠올랐다가도 또 어느 날에는 이 기억들이 10년 전 추억을 떠올리는 것처럼 희미해진다고.
“하지만 가문 회의에서 널 마주한 순간에 제일 선명했던 것 같은데.”
“그 후로는?”
“장례식. 바이얀 그놈 장례식에서 부딪쳤을 때 더욱 선명해진 걸 보고 알았지. 이젠 찾아가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하고?”
“…….”
“그리고 너랑 멀어지면 다시 희미해지는 듯해. 그래서 미칠 것 같아.”
“뭘 미치기까지 해.”
나와 가까워지면 선명해진다고?
투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더러 시간을 견뎌 낸 자라고 했던가.
아틀란이 기억하는 건 내가 회귀하는 것과 관계있는 건지도 모른다.
‘이번 회차는 뭔가 달라도 많이 다르단 말이지.’
나는 턱을 문질렀다.
“그래, 얘기는 여기까지면 됐어.”
“야, 근데 너 진짜 네 수하들은 찾지 않을 거냐? 그놈들이 너를 지극정성으로 따랐잖아?”
“지금의 걔들이 기억이나 하겠어?”
“그래도…… 그 까칠한 돌고래놈이랑, 그 뭐냐. 애정결핍 더럽게 심하던 놈은. 너도 없으면 아쉬운 거 아니야?”
“잘 기억하고 있네. 사람 얼굴을 맨날 헷갈렸던 놈이.”
그러자 아틀란이 얼굴을 문질렀다.
“그래, 네 말대로 나도 뭔가 변한 건지도 모르겠다. 내 성격이라면 그 일각고래 새끼들도 받아 주는 게 아니었는데.”
“좋은 변화야, 아틀란.”
“…….”
“나는 이렇게 생각해. 한 5년 전쯤에 생각한 건데 말이야…… 내게 이번 생이 주어진 의미는.”
“…….”
“이 가문을 더 선하고 평화롭게 만들기 위함이라는 것을.”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3회차에 내가 강해진 뒤 가문으로 돌아왔을 때 약하고 선한 이들은 이미 많은 수가 죽은 뒤였다.
“나는 결심했어. 이걸 가장 방해하는 인간은 현재 가주이고. 목표를 위해서라면 가주를 끌어내리는 일도 서슴지 않을 거라고.”
“네 손에 피를 묻히겠다고?”
“필요하다면?”
“……내가 네 무기가 되고 싶다고 다시 찾아오긴 했지만.”
아틀란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한숨을 쉬었다.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는 한숨이었다.
“그래도 나는 네가, 내 여동생이 한 번쯤 평화롭게 사는 모습을 구경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어.”
“…….”
“감히 나한테 이런 소리가 나오게 한 네가 나빠.”
“그래? 나는 장하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턱을 괸 채 웃었다.
“난 지금 평화로워. 이번 생엔 아빠도 있고, 내가 살린 사람도 있고……. 그리고 이젠 외롭지 않게 나처럼 과거를 기억하는 동지도 있고.”
“…….”
“네가 말한 대로 모든 수하를 데려오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아. 못해도 몇몇은 찾아갈 거야. 다만, 무작정 끌어들이지는 않을래. 지금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다면 그냥 둘 거고.”
너희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죽기 전까지 내 행복을 빌었던 너희는…….
“아틀란, 나는 이걸 버렸다고 생각하지 않아. 오히려 기억하지도 못하는 놈들을 억지로 끌어들이는 게 이상한 일이지.”
“……넌 줄곧.”
“응?”
“아니야.”
아틀란은 다리를 꼬았다. 불만 어린 표정이었다.
“아, 근데 미안하게 됐지만 네가 말한 돌고래 그놈은 꼭 데려올 거야.”
“네 금붕어똥?”
“오, 걔가 그 말 제일 싫어했던 거 알지?”
“알게 뭐야. 어딨는지는 알고?”
“그게 문제야.”
나는 툭툭, 테이블을 두드렸다.
“돌고래들이 모조리 짐 싸 들고 고향으로 돌아갔대.”
“고향으로 튀었다고?”
“말이 왜 그렇게 되냐? 아무튼 그렇대.”
“짐작 가는 건 있고?”
“뭐……. 없진 않아. 확신할 수는 없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을 돌이켜보니 확실히 돌고래 그놈이 나한테 힌트를 주긴 했다.
‘바이얀의 이른 죽음으로 인한 영향이 이놈한테 나타날 줄이야.’
아틀란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송곳니를 보이며 씨익 웃었다.
심술궂은 얼굴이었다.
“알고 보면 돌고래 그놈도 널 기억하고 있어서 다시는 착취당하지 않으려고 튄 거 아니냐?”
“……뭐?”
나는 화들짝 놀랐다.
어떻게 그런 말 할 수 있지? 그러다가 진지하게 얼굴을 굳혔다.
“……그런가?”
“……미친. 농담이야.”
“응. 나도 농담이야.”
그래, 농이지만 순간적으로 그럴 수도 있겠는데 싶었다.
그놈과는 함께 굴렀던 기억이 가득해 양심에 찔렸으니까.
미안하다. 이번 생에도 널 찾아가는 주군을 용서하렴.
“아무튼 간에 이미 한 놈만 빼고 떠났고, 그 한 놈을 만나러 갈 건데, 너도 같이 갈래?”
“나도?”
“그래. 너도 잘 아는 놈을 만날 것 같거든.”
나는 씩 웃었다.
“마침 운명인 건지. 딱 한 놈 남은 돌고래가 누군지 알아?”
“뭐? 설마 그놈이냐?”
“응. 맞아.”
딱 한 사람 이곳에 남은 돌고래.
그는 애석하게도 중급 기관 퇴소 관련 일을 해결하기 위해 이곳에 남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건 겉으로 알려진 사정이었을 뿐.
앞서 말했듯 그놈은 바이얀이 이전 회차랑 다르게 일찍 죽어서 피해를 받은 모양이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책임은 져야지.
“나 때문에 고생 중인 듯해서, 잡으러 가야 할 것 같네.”
“오랜만에 사냥이냐.”
아틀란이 어깨를 붕붕 돌렸다.
“너랑 나만?”
“응. 그래.”
아틀란의 미소가 더욱 깊어졌다. 옛날 생각난다며.
“우리, 돌고래 구출 작전이나 해 볼래?”
* * *
아콰시아델 영지 내 뒷골목.
강을 끼고, 바다를 앞둔 이 거대한 영지는 곳곳에서 물의 냄새 혹은 바다 내음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복도에 막 숨은 소년은 그러한 물 내음 대신에 어떻게든 피비린내를 가리기 바빴다.
“이야, 어디선가 피비린내가 나네?”
“신선한 냄새야.”
소년을 쫓는 놈들은 이 땅의 수중 생물 수인 중에서 범고래들 못지않게 피 냄새를 잘 맡는 이들이었다.
소년은 팔을 감고 있던 붕대를 둘둘 풀었다.
곧이어 소년이 있던 자리로 사나운 생김새의 성인 둘이 나타났다.
“뭐야, 붕대잖아?”
“멀리 가지 않았을 거다. 붙잡아.”
“좋아.”
남자들이 어깨를 붕붕 돌렸다.
“이번에야말로 돌고래놈을 우리 대장에게 끌고 가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