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8화
“거기서 뭐 해? 선배님.”
좀 크게 외쳤으니 잘 들렸으리라. 내 부름에 레빈이 움찔하더니 기둥에서 빠져나왔다.
“어, 음, 난 꼼짝없이 싸움이 일어나는 줄 알고?”
“도망이 빠르기도 하네.”
“하하하, 범고래 싸움에 등 터진 새우가 되고 싶진 않거든. 그래서 너희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진 모르지만…….”
레빈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여차하면 교사를 데리러 갈 각오로 지켜보고 있었지!”
나와 아틀란의 대화에서 중요한 부분은 내 쪽에서 목소리를 낮췄다.
나는 레빈이 근처에 서 있단 사실을 잘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설사 대화를 들었다고 한들 모두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긴 했다.
“레빈이라고 했죠? 선배, 데려가요. 이제 그 중요한 조별 과제 빼먹지 않을 거예요.”
“어, 응? 어어?”
갑작스럽게 말을 높이는 내 모습에 레빈은 당황한 듯했다.
그러다 말고 아틀란을 어색하게 보았다.
아무래도 아틀란이 퐁퐁 솟아낸 울음을 봐서인지 영 적응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신기하지? 나도 그런데 넌 오죽하겠어.
“그렇지? 아틀란.”
아틀란은 삐딱하게 나를 돌아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야, 그 과제인지 뭔지, 안내해.”
“어어?”
“어디로 가야 되냐고.”
“……일주일 전부터 4층 A교실로 오라고 알려 줬지만, 괜찮아! 매일매일 안내해도 되니까 진급만 하게 해 줘!”
“알았으니까 안내하라고.”
나는 돌아서는 아틀란에게 손을 흔들었다.
“둘째야, 또 보자.”
아틀란은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무슨 생각인지 침울하게 가라앉아서는 바닥을 보았다.
“……진짜 또 봐?”
얜 왜 또 갑자기 시무룩해져서는 침울해지는 건지. 조울증에 가까운 변화 같아서 조금 당황했지만.
티 내지 않고 웃었다. 괜찮다는 듯이.
버림받은 자의 목소리를 너무 잘 알아서인지 침울하게 두고 싶지 않았다.
“응.”
이렇게 말하면서 차분하게 물었다.
“……하나만 묻자. 너, ‘죽음’을 기억해?”
네가 죽은 날을 기억하니?
이건 내게 참으로 중요한 부분이었다.
레빈을 생각해 누구의 죽음인지는 생략했지만 놈은 충분히 이해한 것 같았다.
아틀란은 나를 빤히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기억 못 하는 것이 조금 있어. 그중 하나가 그거야.”
“그래. 알겠어.”
나는 끄덕였다.
“이젠 내일이 있을 거야. 너와 내게.”
“…….”
아틀란은 나를 한 번 더 물끄러미 보더니, 그제야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이제야 다시 볼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
나는 손을 흔들다가 천천히 내렸다.
다행이다.
담담하게 눈을 감았다.
이 세상에, 네 죽음을 기억하는 게 나뿐이라서.
“여동생님.”
익숙한 목소리에 눈을 뜨고 고개를 돌리면 아게노르가 서 있었다.
‘기척은 느꼈지만…….’
뛰어온 모양인지 흐트러진 모양새였다. 나는 아게노르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보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왔냐.”
“응. 싸움 구경이 있대서 왔는데, 쟨 왜 한바탕 운 얼굴이야? 설마 울 만큼 때렸는데, 내가 놓쳤어?!”
“어디서부터 봤는데?”
“여동생님이 기둥 뒤에 숨은 웬 놈한테 말을 걸 때부터?”
“아하.”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게노르, 내가 했던 말 하나는 철회해야겠다.”
“뭔데? 아, 아틀란이 네 밑으로 들어가기로 한 거야?”
역시 눈치가 제일 빠르다니까.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게노르는 고민하다가 나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내게 한 말을 신경 쓰는 거라면 괜찮아. 여동생님에게 필요한 인재라고 판단한 걸 테니까. 게다가…… 저놈이 내 후배로 들어오는 거잖아? 들어오면 선배 소리 들어야지.”
놈의 얼굴은 어느새 상기되어 있고, 황홀한 표정이었다.
“꼭, 시킬 거야…….”
“적당히 해. 적당히.”
흐드러지듯 화사하게 웃는 아게노르를 보며, 결국 이 또라이들의 화합을 또 한 번 보는구나 생각했다.
‘더럽게 많이 싸우겠네.’
이왕 이렇게 됐는데 어쩌겠나 싶어 어깨를 으쓱했다.
“……약속은 지켜 줄게.”
그러자 아게노르가 신난 듯 웃었다.
눈동자가…… 오늘도 세상에 없는 의성어를 하나 갖다 붙이자면, 초롱초롱이 아니라 ‘집착집착’ 하게 빛나는 듯했다.
그러다 문득 아게노르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여동생님. 표정이 왜 그래?”
“왜?”
“그냥. 음…… 음, 표현이 좀 이상하지만, 지금 네가 편안한데 불편한 표정 같아서.”
“그게 뭐야.”
나는 웃음을 터트리면서도, 그 말이 지금 심정에 딱 맞다는 점을 인정했다.
* * *
아틀란에게 우스갯소리로 ‘이번 생엔 인재를 영입하는 기준을 바꿨으며 그 조건은 지혜로운 머리다.’ 하고 말했지만.
그놈에게 그만 울라고 건넨 농이었고, 아게노르에게도 밝혔듯 어쨌거나 아틀란 또한 함께하기로 결심한 상태였다.
그저 필요한 건 약간의 마음 정리였기에 시간이 필요했던 건데…….
아틀란, 이 단순한 망나니는 짧은 시간 동안 내 말을 어떻게 생각한 것인지.
아니, 매우 마음에 걸렸던 것인지.
전혀 생각지도 않은 해결책(?)을 가지고서 내 앞에 나타났다.
“야!”
아틀란을 본 후로 며칠이 흘렀다.
오늘도 교육을 마치고서 아빠의 거처에 온 상황이었다.
아빠와 에키온과 나란히 시간을 보내던 참이었는데…….
다른 곳도 아니고 이 응접실에 아틀란이 나타난 건 정말이지, 예상 밖의 상황이었다.
그것도 거의 쳐들어오다시피 말이다.
“칼립소 아콰시아델!”
쾅, 아주 둘째놈 성격과 똑같이 소란스러운 등장이었다.
나는 찡그리면서도 에키온을 보호하듯 내 뒤로 숨겼다.
‘쟤가 갑자기 여긴 웬일이야?’
저놈이랑 나름 화해 비슷한 걸 한 것 같지만, 범고래 남매에게 있어 싸움이란 거의 숨 쉬듯 당연한 일이었으니.
특히나 호전적인 저 인간이 반긴답시고 덤벼들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우리 용용이는 신체만은 연약한 어린애라고!’
바위를 던져도 멀쩡할 것 같은 우리랑 다르단 말이다!
물론 아빠가 어련히 알아서 보호해 주겠지만, 기분 문제다.
‘그나저나 아빠의 영역에 들어왔는데, 멀쩡히 여기까지 들어왔다고?’
나는 고개를 돌렸다.
“아빠, 아빠가 들여보내 줬어?”
“네 손님이라 생각했다만.”
아빠에게는 며칠 전 있었던 아틀란과의 일을 대충 이야기해 두었다.
조만간 이 저택에 찾아올 인간이 하나 늘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게 오늘은, 또 이런 식은 아니었는데 말이지.’
내가 끄응, 하며 미간을 찌푸리는 사이 아틀란은 날 바라보다 말고 고개를 갸웃했다.
“걘 뭐야?”
내가 누군가를 보호하는 게 신기하다는 듯한 눈이었다.
“같이 사는 식구.”
내 대답에 곧이어 알겠다는 듯 끄덕였다.
“너…… 음, 뭐냐. 연애하냐?”
“넌 그냥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입을 다물어라.”
도대체 보호하고 선 모습 어디에서 이런 말이 나올 수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저 푸른 머리 새끼가 날…… 아니다, 됐어. 내 얘기 좀 들어 봐.”
“남의 집에 쳐들어오듯이 와서는 무슨 소릴 하려고? 헛소리면 3개월 뒤에야 볼 줄 알아.”
“……헛소리 아니야!”
나는 그제야 아틀란과 함께 나타난 레빈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틀란이 워낙 강렬했던지라 놈에게 시선을 모두 빼앗겨서 그렇지, 둘째놈은 레빈과 함께 여기 들어왔다.
“아하하, 안녕, 아, 안녕하세요 피, 피에르 님. 그리고 공녀님…….”
교육 기관 밖임을 잘 인지하고 있는지 호칭도 말투도 바뀐 인사였다.
아틀란이 괜히 데려온 건 아니었는지, 놈이 의기양양하게 레빈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야, 너 나더러 지혜로운 머리가 있어야 받아 준댔지?”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은 어디로 잡수셨냐?”
“……모르겠고, 내가 그거 해결하면 지금 받아 줘.”
아무래도 난 농이었건만, 지혜로운 머리 운운했던 것에 충격이 컸거나 위기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생각지도 않은 방법을 들고 갑자기 방문한 걸 봐서는 말이다.
놈이 말한 방법은 이것이었다.
“이놈도 같이 줄게! 받아 줘!”
“……듣는 ‘이놈’의 의사는 물어본 거지?”
“당연하지. 내가 그런 것도 생각 안 했을 것 같아?!”
……너 그런 것까지 생각하는 놈 아니었잖아.
제 딴에는 열심히 생각해 본 것 같은데, 대체 왜 레빈과 같이 오면, 내가 받아 줄 거라 생각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원 플러스 원 행사도 아니고.’
“대체 멀쩡한 네 친구는 왜 잡아 왔는데?”
“얘, 일각고래에서 난 천재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