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4화
착각이 아니었다.
내 다리 위로 동그란 물 자국이 생겼으니까.
단 한 방울이었지만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지금, 그러니까 내가 물을 만든 거라고? 나는 손을 쥐었다가 폈다.
“에키온, 방금 그거 다시 할 수 있어?”
혹시나 싶어 목소리를 낮췄다.
아게노르는 무슨 영문인지 생각에 골몰히 잠겨 있었고, 보지 못한 듯했다.
“어떻게 한 거야?”
“……시간?”
“시간?”
에키온은 어떻게든 설명하려 했지만, 아직까진 고차원의 설명은 어려운 건지.
아니면 설명 자체가 어려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만 해도 누군가에게 물의 힘을 가르치려면 자신 없지.’
본능에 가까운 물의 힘을 다룰 수 있게 가르친 아빠가 대단한 거였다.
“칼립소, 나 필요해?”
아는 것과 남을 가르치는 건 또 다른 일이니까.
“응 필요해.”
나는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면서 에키온의 손을 다시 잡았다.
“하지만 네가 필요하지 않았더라도 난 네 상황을 마주했다면 분명 널 도왔을 거야.”
“…….”
에키온의 손을 잡고 다시 시도해 봤지만, 더는 물이 나오지 않았다.
‘무슨 원리일까.’
내가 곰곰이 고민하는 사이 아게노르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왜 그래? 여동생님. 심각한 표정이네. 무슨 일 있어?”
“아니, 아니야…….”
나는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그러는 너야말로 갑자기 웬 생각에 그리 잠겼어?”
내 질문에 아게노르가 머뭇거렸다. 평소 초롱초롱하다 못해 늘 집착 가득한 얼굴을 하던 놈답지 않은 표정으로.
“아틀란 생각을 했지.”
“……언제부터 그렇게 애틋했어? 이참에 보내 줄까?”
“무슨 소리야! 날 때릴 수 있는 건 여동생님뿐이야!”
“……전혀 고맙진 않으니까 계속 말해 봐.”
펄쩍 뛰던 아게노르가 으음, 하더니 천천히 말했다.
“네가 많은 인재가 필요하다길래 고민했어. ……그래도 아틀란 그놈은 강하잖아? 필요하지 않아?”
조금 놀랐다.
“웬일이야? 네가 그놈을 인정하는 말을 다 하고?”
“…….”
“언제는 묵사발을 내 달라며.”
그러자 아게노르가 망설였다.
어째 하고 싶지 않은 말을 억지로 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스승님처럼 물의 힘을 응용하는 데 능하다고 생각해.”
“그래서?”
“……내가 걔처럼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말한 거니까, 뭐. 게다가 여동생님, 너도 말했지만 네가 하려는 일은 꽤 어려우니까…… 있으면 좋은 거 아니야?”
“그놈 싫다며?”
“여동생님이랑 함께하는 거면, 참을 수 있어.”
싫어하는 일을 참아 보겠다니, 이놈도 성장하긴 했구나 싶었다.
나는 아게노르를 빤히 보다가 툭 내뱉었다.
“네가 더 강해지면 되지.”
“뭐?”
“난 널 믿고 있어, 아게노르.”
“…….”
나는 피식 웃었다.
“부끄러워하기는.”
“알면 좀 때려 줄래?”
“……그냥 가서 정권 찌르기나 백 번 해.”
품 안에서 무언가 사부작거리는 움직임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면, 어느새 에키온이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어느 틈에 잠이 든 걸까.
천사처럼, 아니, 어디 동화 속 물의 요정처럼 잠든 예쁜 소년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예쁘긴 했지만 갑자기 기절하듯 잠든 게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설마 아까 내게 힘을 사용해서일까?’
이렇게 고민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가만, 최근 들어 잠이 많아졌네……. 원래 이런 건가?’
굳이 지금이 아니더라도 에키온이 유독 요즘 잠을 많이 잔다는 사실이 떠올랐으니까.
좀 의아할 정도였다.
‘투스의 수첩을 한 번 더 들여다봐야 할지도.’
용 공작을 공부할 시간이 다시 돌아온 모양이다.
어쨌거나 평화로운 얼굴이다.
나는 에키온의 머리카락을 살살 만져 주면서 살짝 웃었다.
“괜찮아, 네가 걱정할 거 없어. 아틀란 그놈은 굳이 내 아래로 오지 않더라도 잘살 거야.”
“뭐, 잘 해결된다면 다행이지만.”
“그리고 에키온 자니까 조용히 말해.”
아게노르가 멈칫했다.
“……갈수록 편애가 심해지는데. 여동생님 그러다가 감당 못 할 수준이 되면 어떡하려고?”
“무슨 말이야?”
아게노르는 어느새 감동한 표정을 지운 채로 고개를 갸웃했다.
“……잘은 모르겠는데, 요즘 스승님이 뭘 걱정하는지 조금 이해할 것도 같달까.”
“무슨 말이냐니까? 말을 말처럼 해야 내가 알아듣지, 아게노르.”
아게노르는 더 말하는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어쨌거나 아틀란 일은 여동생님이 결정한 대로 잘되길 바랄게.”
과연 그렇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엔 아틀란 그놈은 이미 눈깔이 돌아 있어.”
어쩐지 요상한 표정으로 말을 맺는 아게노르였다.
아주 저주를 해라 해.
나는 찡그리면서도 에키온 때문에 일어나지 못했다.
* * *
……그리고 아게노르의 말이 옳다고 느낀 건 딱 삼 일이 더 흘렀을 때였다.
나는 깨달았다.
‘내가 간과했지. 저놈이 무시한다고 쉽게 포기할 사람이 아니란 걸.’
아무래도 평화로운 시간이 조금 이어졌다고 내가 잠시 잊었던 모양이다.
범고래들의, 특히나 내 세 오빠의 독기와 한 번 물면 놓치지 않는 집착을 말이다.
그러나 이쯤 되니 나도 오기가 생겼다.
‘어디서 기싸움이야.’
싸울 때 싸우더라도 내가 먼저 다가가 저놈과 싸워 줄 생각은 없었다.
나, 칼립소. 집념과 독기에서 단 한 번도 져 본 적 없단 말이지.
그렇게 며칠이 더 흘렀을까.
나와 저놈의 기싸움에 당사자들보다는 주변 이들이 핼쑥해지는 시점이 오자 나는 결단을 내렸다.
‘……죽일까.’
아니, 진정하자. 진정.
나는 진심으로 분노를 느끼기 시작했다.
‘내가 먼저 나서게 한 대가는 혹독하게 치르게 될 줄 알아라.’
졌을 때 놈이 보일 반응이 뻔한데, 그 뻔하디뻔한 예상 시나리오대로 맞춰 줄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부하? 수하? 누가 받아 줄 줄 알고.
오죽하면 어제 아게노르는 음산해진 내 얼굴을 보고 알아서 넙죽 기었다.
“미안해!”
“뭐가.”
“……내가 사실 아직 여동생님이 진짜 화난 모습을 못 본 거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