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9화
‘어떡하니.’
아마도 5년 전의 내가 가문 회의에 나타났던 것만큼의 임팩트를 노렸을 것이다.
‘주인공이 되지 못해서.’
리리벨은 자신을 선보였지만, 반쪽짜리 승리에 불과했다.
나는 팔짱을 꼈다.
리리벨.
네 패착은, 경험이 부족했다는 거고.
이건 네 탓은 아니지만.
네 상대가 나였다는 거야.
잠시 뒤, 나는 노려보는 리리벨을 마주했다.
아빠의 거처로 돌아가는 길이었다보니, 내 곁에는 아빠와 아게노르가 함께였다.
나는 내 앞을 가로막은 여자아이를 보며 그리 놀라지 않았다.
이렇게 되겠다고 생각했으니까.
“아빠, 아게노르. 먼저 갈래?”
“괜찮겠나?”
“날 누구라 생각하는 거야. 게다가 누가 가르쳤는데.”
아빠가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너도 알겠지만, 내 인지 범위는 넓다. 네 소리는 놓치지 않을 거다.”
아빠는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섰다.
나 참. 믿어 주는 건지 아닌 건지 모를 말과 행동이네.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서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가르친 나를 믿고 있단 걸.
“……여동생님, 이 대 일 전투는 별로지?”
“오냐, 그리고 싸울 거 아니니까 얼른 가.”
“힝.”
“……루가루바 흉내 내면 죽인다고 했지?”
“넵.”
아게노르마저 돌아가고, 나는 텅 빈 정원에서 리리벨과 마주 보았다.
“그래서, 무슨 일이야?”
리리벨은 화가 날수록 표정이 사라지는 쪽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분노할수록 감정적이 되는 아틀란, 아게노르와는 정반대.
오히려 분노할수록 서늘해지는 벨루스와 비슷한 결이라 할 수 있겠다.
“칼립소 아콰시아델.”
“그래. 그게 내 이름이야. 한 번만 불러. 닳아.”
“…….”
리리벨이 주먹을 꾹 쥐더니, 곧 고요하게 후, 숨을 내쉬었다.
그래, 나는 저렇게 빠르게 분노도 흥분도 수용하고 감추는 모습을 마음에 들어 했었다.
“모두 네 계획이었던 거니?”
“좀 더 박력 있게 따질 줄 알았는데, 의외네.”
“…….”
“내가 아는 너라면 일단 주먹부터 날리고 삐딱하게 말할 줄 알았거든.”
“……네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많이 알걸? 오늘 내 모습 봤잖아. 네가 바이얀의 등을 찌른 건 또 어떻게 알았겠어?”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네게는 고마워. 그놈 낯짝은 나도 보기 싫었거든.”
웃고 있는 내 눈이 리리벨의 창백한 얼굴로 향했다.
“비록 5년 전에 바이얀과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5년 전의 복수는커녕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혀 줬으니. 바이얀이 치졸한 나를 두고 지옥에서 고마워하고 있으려나?”
리리벨이 사색이 되었다.
그럴 수밖에.
자신이 장례식에서 했던 말을 고스란히 되받은 것이었으니.
그렇지 않아도 창백한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린 채였다.
“너, 대체 어떻게 알아차린 거지? 어디까지 생각한 거야?”
“리리벨, 그렇게 말하는 건 네 밑천을 드러내는 일이나 마찬가지야.”
“……,”
나는 싱긋 웃었다.
“이럴 땐 뻔뻔하게 나와야지. 설사 아무것도 없더라도, 네 패엔 조커가 남은 것처럼.”
이건 어디 가서 돈 주고도 못 들을 조언이란다.
아니, 리리벨에겐 백모가 있어서 상관없으려나?
‘역시 경험 부족.’
경험이란, 보통 시간이 해결해 주는 요소지만 리리벨에겐 그 시간이 절대적으로 모자라다.
자꾸 이러쿵저러쿵하게 되는 건…….
‘역시 아깝단 말이지.’
그냥 죽게 두기에 너무 아깝다.
앞선 회차에서 느꼈다.
‘나에게 조금만 더 인재가 많았더라면.’
우리는 전쟁에서 육지 동물 수인을 더 수월하게 이겼을 것이다.
그 미친 남주 새끼가 에키온을 폭주시키기 전에 막을 길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가주 경쟁을 하면서 너무 많은 인재를 잃었어.’
이건 저기 있는 리리벨을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넌 솔직한 아이야.”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궁금해서 온 거잖아?”
“뭐?”
“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또 어떻게 적절하게 이용한 건지. 언제부터 이런 계획을 세웠던 건지.”
“…….”
“네 병은 대체 어떻게 알아낸 건지.”
리리벨이 정곡을 찔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찰나였고, 금방 사라졌다.
‘나이를 생각했을 때 훌륭한 포커페이스지. 게다가 제 오빠의 무덤을 반석 삼는 대담함도 대단했고.’
만약 바이얀의 상태를 들켰다면 대단한 리스크를 안을 것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에 도박을 걸다니. 야망 한번 대단하다니까.’
내가 그 자리에서 밝히지만 않았다면 리리벨의 독무대가 되었을 건 명백한 사실이지.
다만 앞서 말했듯 상대가 나였을 뿐이다.
“미리 말해 두지만 너, 지금 그 정도의 능력으로는 안 돼.”
오늘 리리벨의 능력을 보며 감탄했다. 네가 이 나이에는 이 정도였구나.
그럼에도 넌 나를 이길 수 없다.
‘나도 5년간 이렇게까지 힘이 늘어날 줄은 몰랐지.’
영문을 모르겠지만 여전히 물을 생성할 순 없다.
그러나 아게노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굳이 물을 만들지 않아도 다 때려 부술 수 있는 주먹’이 내 손에 들어왔을 뿐이다.
“네게는 그리 긴 시간이 남아 있지 않아. 그리고 너는 제한 시간 내에 반드시 가주가 되어야 해. 그렇지? 그런데, 너, 나 못 이겨.”
시한부 이야기가 나오자, 이것이 역린이었던 듯 리리벨은 이제 평정을 유지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어떻게 반응하면 가장 좋을지 고민하는 모습.
나는 저 애의 저런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이전에도, 지금도.
“내가 상대인 이상, 너 죽을 때까지 그거 안 돼.”
“…….”
나는 생긋 웃었다.
“나는 이 순간에도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알지 않냐고 소리 지르지 않는 네가 마음에 들어.”
여기서는 조금 강하게 나갈 필요성을 느꼈다.
내 눈이 찰나간 가라앉았다.
“그러니까, 이런 거지.”
리리벨이 순식간에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부우웅.
리리벨의 주변으로 물줄기가 떠올랐다. 어쩐지 다급해 보이는 듯한 모양새.
“네 몸은 너보다 먼저 주제 파악이 됐네?”
“누가, 주제 파악을…….”
“못 이기는 거. 눈치챘잖아.”
나는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팔짱을 풀어 이번엔 뒷짐을 졌다.
“본능이 내린 결론을 믿지 못하겠다면 덤벼도 좋아. 나는 몸소 가르쳐 주는 것도 싫어하지 않거든.”
리리벨은 식은땀을 흘릴 뿐 움직이지 못했다.
내가 쓰는 건 피어의 힘.
나보다 약한 자라면 꼼짝할 수 없을 터였다.
“…….”
“움직이지 못한 걸 부끄러워하지 마. 그래도 넌 지금 아게노르보다 나은 거니까.”
리리벨은 알아본 것이다.
여차하면 바닥에 누울 건 자신이란 사실을.
“리리벨, 강한 범고래일수록 여기 본능이 발달해. 강자를 알아보기 위함이지. 지금 너처럼.”
내 손가락이 씨근덕거리는 소녀에게 향했다.
“나는 오늘 너를 끝장내 버릴 수도 있었어.”
“허세 부리지 마.”
리리벨이 나를 노려보며 우아하게 말했다.
“네가 나보다 강한 건 인정해. 그래,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네.”
리리벨이 이를 아득 갈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아?”
이 와중에도 기개를 잃지 않는 모습이 마음에 쏙 들었다면, 너무 강자의 시점일까?
과거에도 느꼈지만 이 애는 나와 사고관이 비슷하다.
여기서 패배를 인정하고 독기를 드러내는 모습조차 흡족했다.
“칼립소 아콰시아델, 네가 무엇을 했든 나는 오늘 반쪽이나마 승리를 거뒀어. 너라는 사람의 수준을 알게 된 것만으로 내겐 충분해.”
“거짓말.”
나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그도 그럴 게…….
“리리벨, 내게 푸른 산호의 독을 추출할 수 있는 방법이 정말로 없었을 것 같아?”
푸른 산호의 독, 그게 작은 신호가 된 것인지 리리벨의 표정이 그대로 가라앉았다.
“사용 여부가 밝혀지지도 않은 일이야. 억지 주장하지 마.”
“아주 훌륭한 답이야. 자칫 유도 심문이 될 수 있는 질문도 잘 피해 갔네?”
나는 피식 웃음 지었다.
“그런데 똑똑한 리리벨. 아무도 모르는 네 병을 알아낸 나인데. 왜 이건 모를 거라 생각해?”
“…….”
“뒷처리가 허술했어. 독까지 들켰다면, 네가 더 불리해졌겠지. 이뿐일까?”
나는 누구도 모르는 큰아버지와 바이얀의 잔악한 짓거리를 열 가지쯤은 더 댈 수 있었고.
네 첫 무대를 시도조차 하지 못하게 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거야.
리리벨의 표정은 내가 말하지 않았어도, 그 이상을 느낀 것처럼 보였다.
“아직도 허세처럼 보여?”
내가 이처럼 리리벨을 압박하는 건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지난 회차에서 결국엔 패배해 굴복하여 충성을 맹세한 세 오빠와 다르게.
“죽여.”
리리벨은 마지막까지 처절하게 반항한 뒤, 끝내 굽히는 대신 죽음을 택했다.
‘이 애는 넘어설 수 없는 벽을 보여 주지 않으면 무너지지 않는다.’
그때와 다르게 지금 눈앞에는 덜 여문, 도화지 같은 리리벨이 서 있었다.
“리리벨, 우리는 경쟁할 필요가 없어.”
“…….”
“너, 내 밑으로 들어와.”
리리벨은 흠칫 놀라더니, 이내 입술을 열었다.
“하, 정말 대단하네.”
리리벨이 어이없다는 듯 웃다가 확 찡그렸다.
“맞아, 나는 궁금해서 널 찾아왔어. 하지만, 네가 나보다 강하다는 사실은 네 밑으로 들어갈 이유가 되지 못해. 헛소리하지 마.”
나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래, 그렇지. 네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머리로, 본능으로 아무리 느끼더라도 말이야. 범고래란 놈들은 하나같이 행동파란 말이지?”
나는 팔을 스트레칭하듯 가볍게 흔들고는 툭, 발을 디뎠다.
“……!!!”
리리벨이 깜짝 놀라 주먹을 피했다.
상관없었다.
‘피하라고 틈을 준 거니까.’
내 주먹은 곧 리리벨이 있던 자리를 찍었다.
콰아아앙!
주먹이 두드린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마치 거대한 크레인이 돌을 떨어트린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 힘 조절 못 했다.’
자욱한 먼지 바람이 흩날렸다. 갈색으로 피어난 바람이 가라앉았을 때.
나는 쯧 혀를 찼다.
발밑에는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겨 있었다.
이래서야, 아게노르가 노래를 부르던 그놈의 힘숨찐을 그만두게 생겼다.
소문이 자자하게 퍼지지 않으면 이상한 결과를 만들어 버렸으니까.
“…….”
모든 먼지가 내려앉은 뒤, 나는 털썩 엉덩방아를 찧은 리리벨을 보며 말했다.
“리리벨. 내가 너무 돌려 말했다, 그치?”
나는 화사하게 웃었다.
“죽을래, 내 편 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