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8화
“명예로운 결투였다니, 제가 아무래도 큰 오해를 했나 봐요! 정말 결백하다면, 몸에서 독은 나오지 않을 것이고. 등에도 아무런 상처가 없겠죠?”
장례식장은 먹물을 흠뻑 머금은 듯 고요했다.
옆에서 키득 작게 웃는 아게노르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 그래서 굳이 그날 건물에 갔던 거야? 하고 다시 한번 속삭이는 작은 목소리도.
“돌멩아, 너는 항상 재미있는 주제를 가져오는구나.”
“할머니를 기쁘게 해 드렸다면 저도 기꺼운 마음이에요.”
할머니가 픽 웃으며 주머니에서 장갑을 꺼내더니 손에 끼웠다.
“시체를 뒤집어보는 건 20년 만이로구나.”
“어, 어머님!”
“너는 조용히 있거라. 네 발언을 허락하지 않았다. 로데센.”
할머니가 바이얀에게 시선을 둔 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결과는 곧바로 나왔다.
할머니가 바이얀의 등을 확인한 것이다.
“등에 상처가 있군.”
그럴 것이다.
리리벨은 도망가는 바이얀의 뒤를 쫓아가 처리했다고 했으니.
‘사실 바이얀을 확실하게 처리한 이유도 이해는 해.’
여러 번 말했지만, 그놈은 일단 죽어도 싼 놈이었고.
그 이전에 리리벨 입장에서는 살려둬 봐야 아무런 득이 없는 일이었을 거다.
바이얀은 결투 중 자신이 더 약하다는 걸 아는 순간 곧바로 항복했을 텐데.
리리벨은 그럼에도 쫓아가 죽인 거겠지.
“어, 어머니. 제가 모두 설명하겠습니다……!”
내 생각이지만 저쪽 가족은 로데센이 제일 고문관이다.
‘아무리 들켰어도 여기선 일단 입을 다물어야지.’
로데센이 말을 꺼내는 바람에 팽팽하던 긴장감 사이로 경악이 흘렀으니까.
‘사실 내가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면 할머니는 절대 바이얀의 등을 확인하지 않았을 거다.’
확인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겠지.
그리고 이 장소는 리리벨의 화려한 데뷔 무대가 되었을 테고.
리리벨은 할머니의 눈에 들었을 것이다.
‘미안하지만 리리벨. 처음부터 네 날개가 펼쳐지게 둘 생각은 없었어.’
할머니가 침묵하는 건 어처구니없어서가 아니다.
저건 분노의 표현이었다.
“와, 세상에. 거짓말이 몇 개야. 일단 자결이 아닌 것이 첫 번째 거짓말.”
“…….”
“정정당당하고 명예로운 결투였다는 것이 두 번째 거짓말이네?”
내가 다 들으라는 듯 혼잣말을 한 이유는 하나였다.
저기 폭군 같은 할망구께서는 거짓말을 매우 싫어하시거든.
“리리벨 아콰시아델.”
할머니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리리벨이 흠칫했다.
리리벨은 분명 천재적인 힘을 가진 데다 머리까지 따라 주는 인재였지만.
아직 분노한 가주의 힘을 정면으로 감당하기엔 부족했을 것이다.
“나를 감히, 광대 삼아 이런 짓을 벌여?”
쿠르릉.
나는 내 위로 아주 엷게 떠오른 물의 보호막을 보았다.
아빠의 힘이었다.
나는 진동하는 천장을 보며 입을 열었다.
“할머니가 화를 내는 척하시네. 그치?”
“그렇군.”
아빠가 어떻게 알았느냐는 표정을 하기에 나는 싱긋 웃었다.
“할머니가 진짜 분노했으면 쟤가 살아 있겠어?”
“…….”
“아무래도 리리벨의 힘만은 마음에 들었나 봐.”
하지만 역시 자길 속이면서 명예로운 장례식을 연 건 용서할 수 없는 거겠지.
“가주님……!”
누군가 리리벨의 어깨를 감싸는 동시에 짙고 푸르른 물줄기가 떠올랐다.
감히 가주의 힘을 버티려 드는 자.
다름 아닌 백모 헤일라 루즐이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녀는 평소에 감긴 듯한 실눈을 미약하게 뜬 채로 허리를 숙였다.
“모두 제 불찰입니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저희는 맹세코 감히 가주님을 속일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모두 말할 생각이었다고 하겠지.
“모든 진실은 이 자리에서 토로할 예정이었습니다!”
“토로할 예정이었다? 나를 속인 사실을 말이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가주님, 명예로운 결투에 어찌 후계의 자리를 두고 하는 전투만 있겠습니까? 감히, 말씀드리건대, 리리벨 제 딸아이가 한 전투는 범고래의 명예를 실추시킨 존재를 처단하는 일이었습니다!”
숨죽여 웃고 있다 말고 살짝 감탄했다.
“바이얀 아콰시아델. 부끄럽지만 제가 지극히 사랑했던 아들은 사실 지난 5년간 남몰래 어린 수인 아이들을 데려와 잔인하게 괴롭히고 죽이기를 반복했습니다!”
와 이걸 이렇게 트네?
나머지가 살기 위해 바이얀 아콰시아델은 철저하게 버려졌다.
하지만 백모 헤일라의 임기응변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퀸 네베라!”
백부의 세력 사이에서 누군가 억지로 불려 나왔다.
범고래 방계 가문 네베라의 수장이었다.
“제 아들에게 남몰래 약한 수인 아이들을 납치해 바치던 자입니다. 네베라! 네 아이들을 위해 진실을 고하기로 한 것을 잊지 않았겠지? 약조대로 가주님 앞에서 모든 사실을 고해라!”
“저, 저, 저는……! 헤일라 님, 저는!”
“닥치고 진실을 고하지 못해!”
백모의 시퍼런 기세와 더불어 쏟아지는 물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네베라 가문의 수장이 더듬더듬 말을 시작했다.
하얗게 질리다 못해 땀을 뻘뻘 흘리는 얼굴. 죽음을 짐작한 자의 얼굴이다.
“마, 맞습니다……. 제가 바이얀 님께 수인 아이를, 세, 세 살 정도 되는 아이들로 바쳤습니다. 어떻게 될 줄 알면서도……!”
전형적인 꼬리 자르기였다. 나는 쯧 혀를 찼다.
“바이얀을 죽인 것도 네가 한 짓임을 이미 내게 밝혔지 않느냐.”
“그, 그렇습니다.”
“리리벨이 승리한 뒤에 네가 바이얀에게 협조한 일이 큰 문제가 될까 두려워 바이얀의 등을 찌르는 등, 여러 차례 공격을 가해 죽였고, 피습한 뒤에 내게 모든 것을 고했다. 이것도 맞느냐.”
“네, 네……! 리리벨, 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고, 정, 정의로운 결투를 신청하셨지만…… 바이얀 님은 패배하시고, 저는 큰 상처를 입고 도, 도망간 그분을…….”
네베라 가문의 수장이 눈을 질끈 감았다.
“찔렀습니다.”
절대 미리 약조된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저리 뱉는 걸 보아.
‘미리 약점을 잡아 뒀던 자겠지.’
네베라 가문의 수장이 더듬더듬 말을 맺기 무섭게 백모가 다시 나섰다.
“이 슬픈 비극을…… 딸아이가 모두 고하려 했지만, 아직 미숙하여 말솜씨가 고르지 못했습니다.”
헤일라가 숨을 골랐다. 명징한 표정이었다.
“저희가 처음부터 밝히지 못한 것과 바이얀의 장례를 이런 식으로 치른 것은 백 번 천 번 잘못하였으나, 감히 이 가문의 원동력이 될 수인 아이들을 해한 것을 처리한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마치 자신의 변호도 이렇게는 하지 않을 듯한 호소력 짙은 모습.
“그리하여 이 장례는 명예로운 일을 널리 알리는 의도일 뿐 죽은 자의 명예를 드높이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설득력 있는 목소리, 울음이 섞였지만 힘 있는 어조.
‘아아. 백모도 정말 인재라니까. 나한테 저런 인재 하나만 더 있었으면…….’
3회차에 더 쉽게 가주의 자리에 올랐을 텐데. 지금도 말이다.
“……만약 엄마가 있었다면 저런 느낌이었을까?”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건 별 의미 없는 말이었다.
헤일라는 내 모친과 비슷한 나이 대였으니. 모친이 있었다면, 이런 느낌이면 좋았겠다 싶은?
“…….”
찌르는 듯한 시선에 고개를 돌리니, 아빠가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괜히 찔리는 마음에 눈을 깜빡였다.
“왜, 왜…… 그렇게 쳐다봐?”
“……엄마 같은 아빠가 되도록 노력하지.”
“아니, 아니. 그런 노력은 안 해도 돼!”
그보다 엄마 같은 아빠는 대체 어떤 아빤데?!
‘상상도 안 가네.’
그사이 헤일라의 주장이 끝났다.
이제는 선고만이 남은 상황이었다.
“넌 어떻게 예상하지?”
“뭘? 아, 저거? 어떻게 예상하긴.”
나는 심드렁하게 고개를 돌려 헤일라와 할머니를 쳐다봤다.
“여기선 가볍게 처벌하고 넘어가겠지. 할머니 입장에선 천재가 하나 더 나타난 거잖아.”
“…….”
나는 턱을 문지르며 대답했다.
“싸움 붙일 생각에 얼마나 신났겠어?”
강한 자만이 살아남아 가주가 된다. 후계는 강한 자가 나올수록 더 좋다.
게다가 현시점에서 나온 천재는 할머니가 그토록 원했던 손녀들이다.
“어머닌 너를 둘러싼 소문에 신경을 쓰지 않는 듯하더군.”
“응, 그래 보였지? 하긴, 그런 헛소문 하나 파악하지 못하면 어디 가주님이시겠어.”
그럼 이길 맛이 나지 않지.
“칼립소 님, 가주님은 생각보다 여덟 가문에 대해서 더 신중하게 선정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