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7화
여기엔 애석하게도 지문 감식 같은 첨단 과학은 없지만.
‘수인이 왜 수인이겠어.’
“할머니께서는 무력뿐만 아니라 여러 암살과 독살 관련한 정보도 잘 아시리라 생각해요.”
“그래서?”
“간단해요. 여기 이 병을 조사하면, 아마 푸른 산호의 독 향기가 남아 있을 거예요.”
나는 좌중을 돌아보며 웃었다.
“여기 후각에 예민한 수인은 가득 있잖아요?”
푸른 산호의 독은 후계 전쟁에서 암암리에 쓰이는 독이다.
먹이면 심장을 천천히 멈추게 하는 독으로, 조용히 죽이고 싶을 때 주로 사용했다.
‘사고사로 위장하기 딱 좋으니까.’
단점은 구하기 더럽게 어렵다는 점인데, 백부 로데센의 세력을 생각하면 어렵지 않을 터.
“저는 이것을 시종이 버리던 쓰레기 더미에서 발견했습니다. 물어보니 이 쓰레기는 바이얀의 방에서 나온 것으로…… 특별하게도 큰아버지가 버리라 시켰다고 하더라고요?”
“이의 있습니다.”
흘끗 백부를 바라보니 저게 무슨 소리냐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나는 놓치지 않았다.
찰나의 순간 동요한 표정을 말이다.
“칼립소 아콰시아델이 현재 제 오빠의 엄숙한 장례에 무례한 훼방을 놓는 것까진 넓은 아량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가족들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건 참을 수 없어요.”
리리벨이 손을 든 것으로 모자라 나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리리벨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은 대체 왜 리리벨이 일어난 것인지 의문 어린 표정이었다.
‘그렇지, 네가 이때쯤 일어날 줄 알았다.’
“일단 주목해야 할 점은 증거로 내세운 저것이 과연 오빠의 방에서 나왔는지인데, 어떻게 알 수 있죠? 제 눈엔…… 적당한 병을 찾아다가 허튼소리를 하는 것으로 보여요. 우기기만 하면 다 되는 줄로 아는 건가 싶은데.”
“…….”
“아닌가요?”
할머니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리리벨을 응시했다.
확실히 저 할망구는 가진 힘에 따라서 후계를 보는 눈이 확 달라졌다.
“뭐, 틀린 말은 아니로구나. 하지만 거기 쭉정아. 너도 난입한 건 마찬가지로구나.”
“죄송해요……. 죽은 오빠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저 허위 주장에 분해서 그만 앞뒤 생각하지 않고 일어나 버렸어요.”
리리벨은 할머니의 냉대에도 전혀 주눅 들지 않은 채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동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할머니. 말씀처럼…… 저것이 정말 제 오빠의 방에서 나온 명예롭지 못한 죽음의 ‘증거’라면. 칼립소 아콰시아델은 한 가지를 더 입증해야 해요. 저것이 과연 정말 오빠의 방에서 나온 것인지를 말이에요.”
“…….”
“증인을 데려오거나요.”
리리벨이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검은 눈동자는 말하는 듯했다.
데려올 수 있으면 데려와 봐.
‘여긴 지문에 대한 개념이 없는 게 정말 아쉽다니까.’
사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증거가 정말 입증되려면 나도 정보원을 데려와야 한다.
내가 침묵하자, 리리벨의 얼굴 위로 미소가 스쳤다.
리리벨은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검은 원피스를 툭툭 털더니 자세를 바로 했다.
“말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그저 바이얀 오빠의 죽음을 모욕하려는 의도였음이 확실해지네요. 칼립소 아콰시아델, 바이얀 오빠와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던 것은 알지만…… 5년 전의 일인데 그걸 잊지 않고서 죽음을 모독하는 건 치졸하지 않니?”
내게 대답을 바라지 않았다는 듯.
“어차피 이 자리에서 밝히려 했던 사실이 있습니다. 바이얀 아콰시아델, 제 오빠가 명예롭게 자결한 것은 사실이고. 오빠와의 정정당당한 결투에서 승리한 건 저예요.”
리리벨의 목소리는 크지는 않았지만 또랑또랑한 발음 덕에 귓속으로 확확 꽂혔다.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그 생선 새끼가 우둔하긴 해도 하루아침에 패배할 놈은 아닐 텐데?”
할머니의 물음에 리리벨은 처음으로 환히 미소 지었다.
“네……. 여기 계신 할머니께는 직접 보여드리는 쪽이 좋을 듯한데 혹시 허락해 주실 수 있을까요?”
할머니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리리벨의 주변에서 물줄기가 솟았다.
그저 몸에서 솟는 물줄기 정도가 아니었다.
‘오, 대단한데.’
벌써 저런 수준이었어?
얇은 굵기로 솟았던 물줄기가 합치고 합쳐져 굵은 폭포수 같은 기둥을 형성했다.
“……미친.”
아게노르가 작게 속삭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게, 얘는 잠재력만큼은 아빠 수준이었다니까?
나는 흘끗 아빠를 보았다. 반응이 궁금했다.
‘음, 이번에도 동요가 없네.’
이렇게 되면 정말 궁금하긴 하다.
이 아빠는 나와 관련된 것 말고 뭐에 경악하는 걸까?
“아빠, 저거 완전 대단하지 않아? 경악스럽지?”
“별로.”
“왜?”
아빠는 물줄기에서 시선을 떼어내더니 나를 향했다.
“내 인생 최고의 천재는 내 앞에 있는데. 놀랄 이유가 있나?”
“……그거 콩깍지야.”
“그렇다면 평생 간직할 콩깍지겠군.”
“…….”
나는 머쓱한 마음으로 고개를 돌렸다. 할머니의 눈이 한순간 빛난 것 같았다.
착각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뿐만이 아니었다. 푸르딩딩하니 다 죽어 가던 백부 로데센의 세력들.
특히나 방계들이 술렁거리더니, 이제는 죽었다가 부활한 사람처럼 눈을 빛냈다.
경외심이 가득했다.
‘하기야 끈 떨어진 처지인 줄 알았더니. 새로운 천재가 나타났다?’
게다가 로데센의 ‘딸’이라니. 즐겁기도 하겠지.
이들은 아들보다 딸이 두각을 드러냈다는 사실에 더욱 환호했을 것이다.
“할머니, 이 정도면 저는 당당하게 할머니의 ‘손녀’라고…… 말할 수 있겠죠?”
“재밌구나. 지금까지 쭉정이로 살던 이유는 궁금하지 않다만.”
할머니가 폭포수처럼 치솟은 물줄기를 보며 말했다.
“진짜로군.”
검푸른 눈이 번뜩였다.
“네. 이런 힘을 가진 제가 푸른 산호의 독을 쓸 이유는 없습니다. 저는 정정당당한 대결에서 승리했습니다.”
“과연…….”
“이런 힘이 있는데, 굳이 쓰실 필요가…….”
동조하는 사람들이 나왔다.
저 힘은 로데센의 세력뿐만 아니라 중립을 유지하던 이들 사이에서도 설득력 있게 여겨진 것 같았다.
나는 씩 웃었다.
증인? 처음부터 여기에 증인을 데려올 생각 따윈 없었다.
데려오려면 청어 하녀를 내세워야 하는데. 내가 왜?
‘청어 애들은 이제 내 사람이야. 내 거. 절대 안 내줘.’
나는 집착을 고요하게 숨기며, 박수를 짝 쳤다.
“아하, 언니는 그럼 산호의 푸른 독을 쓰지 않고 정당한 대결에서 당당히 승리한 거구나!”
진짜 여덟 살처럼 맑고 낭랑하게 말했다.
“대단하다, 그럼 바이얀의 몸을 조사해 보면 되겠네?”
“…….”
“내 말이 거짓이라면 푸른 산호의 독 따위 검출되지 않을 테니까.”
나는 알고 있다.
‘바이얀의 몸에서 독이 검출될 리가.’
리리벨이 어떤 두뇌를 가진 앤데, 독의 흔적 따윌 남겼을까.
게다가 옆에는 백모인 헤일라도 있다.
처음부터 푸른 산호의 독을 언급한 건 미끼였다.
“바이얀의 몸에는 모든 흔적이 남아 있을 거잖아?”
나는 헤실, 화사하게 웃었다.
웃은 건 별 의미 없다.
이럴 땐 웃는 게 상대를 더 분노하게 만들더라고.
“존경하고 애정하는 할머니.”
듣고 있냐, 할망구야.
내가 팩트 요약해서 짚어드린다.
떠먹여 주는 걸 잘 먹어 주길 바란다. 오케이?
“할머니께서는 무수한 전투를 거쳐 가주 자리에 앉으셨으니, 너무 잘 아실 거예요. 아니, 쓰러진 사람 혹은 환경을 보기만 해도 아시겠죠. 이 싸움이 정당한 결투로 끝났는지.”
“…….”
“항복한 상대를 쫓아가서 죽이는, 그저 의미 없는 싸움이었는지.”
사실 후계 싸움에 있어 의미 없는 싸움은 비일비재했고, 그 싸움은 결과야 어떻든 이 사회에서 모두 용납된다.
이런 싸움을 해도 괜찮단 소리다.
솔직히 후계 위를 다투는 동안에 얼마나 많은 전투와 싸움, 암투가 있겠나?
다만, 이런 싸움은 명예로운 장례를 치르기엔 모자라다.
리리벨의 화려한 데뷔를 꾸미고자 했던 거겠지만.
독은 분명 발견되지 않겠지.
그러나 싸움의 흔적은 지금 포장한 것처럼 ‘명예로운’ 결투로써 남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청어 하녀를 통해 듣고 결정적으로 이용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독이 아니라.
“죽이는 걸 보았다고?”
“네, 네……! 자정쯤 복도에 괴성이 울려 퍼지고 절뚝이면서 도망가는 바이얀 님을 보았다고 해요. 그리고…… 바이얀 님의 등을 찌르는 리리벨 님의 모습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