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9화
리리벨은 이렇게 생각했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왜냐, 쓸모 있는 말은 들어 줄 상대에게나 하는 것이다.
아들이 미쳤다고 하여, 부질없는 희망을 보물인 양 끌어안고 듣지도 않는 제 아빠를 향해서 이리 말한다?
효율 좋은 일이 아니었다.
리리벨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엄마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
지금까지 침묵하며 고요하게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헤일라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실눈에, 웃는 상인 얼굴로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저런, 리리벨. 네 아빠 말대로 오빠는 잠시 아픈 것뿐이란다. 곧 정신을 차릴 거야.”
“역시 부인도 나와 생각이 같구려. 부인만은 나를 믿어 줄 줄 알았어……!”
헤일라가 순종적으로 미소했다.
그녀는 앉아 있는 로데센에게로 나긋하게 다가갔다.
“그럼요, 여보. 내가 당신을 믿지 않으면 누가 믿겠어요?”
로데센이 기다렸다는 듯 헤일라의 배에 머리를 기댄 채 작게 한숨을 쉬었다.
“헤일라…….”
“네, 로데센. 당신에겐 나뿐이잖아요.”
부드럽고 고운 목소리가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목소리와 다르게 정작 헤일라는 한 손으로 로데센을 성의 없이 토닥이며, 미친 듯이 누군가를 두들겨 패기 바쁜 바이얀을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동시에 다른 한 손에 든 부채를 꽈악 쥐었다.
“바이얀은…….”
아끼는 자식을 본다기엔 지독히도 차갑고 서늘한 눈이었다.
“나아질 거예요.”
* * *
잠시 뒤, 헤일라와 리리벨은 로데센이 있던 방을 나섰다.
문이 고요하게 닫히는 순간.
아무도 없는 복도에는 두 사람만이 남았다. 조금 걸었을까.
“어머니.”
헤일라가 뒤를 돌아보았다.
이곳은 바이얀이 무서워 하인들이 얼씬도 하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그렇기에 리리벨의 가냘픈 목소리가 고요한 복도에 선명히 울려 퍼졌다.
얼음 인형 같은 아이의 입에서 청아하면서도 건조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바이얀, 저건 더는 못 쓴다는 걸…… 이미 알고 계시죠?”
리리벨의 모습엔 어디에도 제 오빠를 향한 동정은 없었다.
비웃음 가득한 얼굴을 보면서도 헤일라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너무 쓸모없어졌어요. 그렇죠?”
헤일라의 실눈에 가까운 눈매 아래 검은 눈동자가 리리벨을 훑었다.
평소에는 그저 존재감 없던 아이였다. 말이 없는 아이의 달라진 모습이 이상하다는 듯, 헤일라는 한참을 응시했다.
“어찌 오빠에게 그런 말을 하니.”
말투는 걱정스러웠지만 얼굴 어디에도 ‘걱정’이란 흔적은 존재하지 않았다.
“저대로 두면 머지않아 아빠도 날뛰기 시작할 거예요. 아빠는 평생 피에르 숙부를 이기기 위해서 살아온 사람이니까. 칼립소 그 애가 살아 있는 한 미치기 딱 좋아요.”
“……칼립소는 이제 재능이 없다고 소문난 지 오래란다.”
“그 말을 정말 믿으세요?”
리리벨이 우아하게 웃었다.
적어도 물의 힘을 각성하긴 했지만 거기서 끝인 딸이었다. 이후 리리벨은 무투보다는 다른 것들을 익혔다.
로데센과 헤일라는 리리벨이 그저 예쁜 인형으로 있어도 좋다는 듯 방관했다.
그런 딸이 마치 ‘엄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잖아요?’ 하고 묻듯이 헤일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는 눈만은 정확하시잖아요. 엄마.”
리리벨은 처음부터 모친이 평범한 사람은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쓰레기가 된 오빠에게 무슨 가치가 있어 더 투자하려 하세요?”
그렇지 않아도 5년간 바이얀이 회복하지 못한 탓에, 방계들의 신뢰에 조금씩 금이 가고 있었다.
미세한 실금이라지만, 언제나 큰 물살은 이 실금을 두드려 어느 순간 터져 나가기 마련이었다.
“바이얀도 저렇게 된 마당에 아빠까지 날뛰기라도 하면 입지가 좁아지고. 어머니가 원하는 권력은 멀어지고 말아요.”
차분하게 말하던 리리벨이 눈을 돌려 함께 나선 문을 바라보았다.
“저는 말이에요, 엄마가 똑똑한 결정을 내리시란 걸 알아요.”
“…….”
리리벨은 표정 없이 이렇게 속삭이고는 자신의 모친을 보았다.
“그러니까 이제…… 저걸 버리고 결단을 내릴 때라 생각하신다는 것도.”
헤일라는 자신이 낳은 딸을 보았다.
“딸을 낳았는데…… 하자가 있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