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범고래 아기님 (96)화 (96/275)

제96화

“……듣고 있다.”

“나를 버린 사람에게 복수하는 건 나쁜 게 아니야. 그 사람 때문에 나는 죽을 뻔했으니까. 그렇지?”

“그래.”

시선만 드니, 아빠가 복잡한 표정으로 천천히 끄덕였다.

“아빠, 나는 가주가 될 거야.”

아마도 아빠가 떠올리고 있는 건 하녀 뤼미겠지.

‘이곳에서 내가 죽을 뻔한 일은 그 사람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그 학대뿐 아니라, 이 말에 지난 60여 년간의 세월이 담겨 있음을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

상관없었다.

지금은 이 결심을 밖으로 꺼내는 게 중요했으니까.

“네가 바란다면 그렇게 될 거다.”

“아니.”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은 뒤 들어 올렸다.

“할머니가 살아 있을 때, 가주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소리야.”

할머니를 쫓아내겠다는 것. 즉, 가주 찬탈.

“나는 전성기가 끝나지 않은 사람을 쫓아내고 두 눈 뜨고 똑바로 보는 앞에서 가주 위에 앉을 거야.”

“……그게 네 복수인가?”

“응.”

“쉽지 않을 거다.”

무뚝뚝한 목소리지만 걱정이 어려 있었다.

비장한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포근함을 느꼈다.

나는 석양빛을 그대로 받으며 생긋 웃었다.

“아빠, 복수가 쉽다면 왜 복수겠어?”

나를 빤히 바라보던 아빠가 이내 옅게 웃었다.

“그건 그렇군. 그래서 너는 내겐 그 복수 하지 않을 건가?”

지난 3년간의 방치를 인정하는 말이었다.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빠라고 부르는 순간부터 그런 건 다 잊었어. 당연하잖아.”

나는 아빠의 목을 끌어안았다.

다시 풀어내고 얼굴을 마주했을 때, 처음으로 히죽 가장 밝게 웃었다.

“내 편한테는 관대해, 나.”

그러자 아빠는 한 번 눈가를 찡그렸다가 이내 다시 웃었다.

마치 몸에 감고 있던 사슬을 벗어던진 죄인처럼 후련한 얼굴이었다.

“그래. 할 일이 명확해서 좋군.”

“응. 앞으로 기대해.”

아빠는 머지않아 가주의 아빠로 불릴 테니까.

“돌아가면, 할 일이 아주 많을 거야. 이제 게으름뱅이 세월은 끝일걸.”

“그것참 무섭군.”

마차로 돌아가는 아빠의 발걸음이 조금 가벼워진 듯 보인 건 착각이 아닐 거다.

“그래서 돌아가면 제일 먼저 뭘 할 거지?”

아, 그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뭐긴, 강해져야지.”

아주 본격적으로 말이야.

* * *

벨루스는 눈앞에 보이는 아콰시아델 영지를 바라보았다.

창문으로 휙휙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따라, 고향이자 집이 머지않았다.

“고마워.”

벨루스는 낯선 인사에 창문에서 고개를 돌렸다.

맞은편에는 평온한 얼굴을 한 칼립소가 있었다.

오동통한 얼굴로 작은 미소가 스쳤다.

“우리가 정말 닮긴 했나? 네가 말한 것 도움이 됐거든. 고마운 건 고맙다고 해 두는 쪽이야.”

“…….”

미소가 슬쩍 사라지는 동시에 칼립소는 진지한 낯으로 벨루스를 응시했다.

“용 공작에 대해서 말하지 못하게 돼서 어떡하냐? 분명 말하기만 하면 공을 세웠을 텐데.”

“꼼수는 쓸 생각 없으니, 쓸데없는 걱정 안 해도 된다고 해 두지. 이것도 맹세를 원해?”

“뭐…….”

칼립소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기어이 맹세를 받아 냈다.

저놈이 왜 저러는지 몰라도 받을 건 받고, 확실하게 해 두자는 태도.

어쩐지 요즘 바다의 맹세를 남발하는 느낌이긴 하지만 뭐 어떠냐 싶었다.

필요한 데 썼다 이 말이야.

칼립소는 이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고맙다는 말은 진심이야.”

진솔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용 공작은 칼립소의 자그마한 다리를 베고 색색 잠든 모습이었다.

이를 의식한 건지 다소 작은 목소리이기도 했다.

“네 덕분에 가주를 노리겠다고 마음먹었으니까. 이제 와 후회해도 소용없어.”

“후회 안 해.”

벨루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칼립소는 갸웃하다가 이내 생각했다.

‘어지간히 나를 죽이고 싶거나 묵사발을 만들고 싶었나 보네.’

그게 아니라면 이 피 터지는 경쟁에 끌어들일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그것도 하기 싫으니 가주 너나 하라고 했던 사람한테.

칼립소는 저놈이 세 살밖에 안 된 자신을 진정 라이벌로 여길 리 없다고 생각했다.

본인만의 여흥이려니 생각하고 신경을 꺼 버렸다.

그렇게 마차가 다시 달려, 마침내 아콰시아델의 경계를 밟을 무렵.

벨루스가 조용하게 중얼거렸다.

“……후회 안 해.”

칼립소마저 고요히 잠들었기에 이 목소리는 피에르나 겨우 들었으나.

‘이런 말을 굳이 신경 쓸 사람은 아니지.’

벨루스는 피에르가 쳐다보거나 말거나 잠든 칼립소를 빤히 보았다.

“허튼짓하면 경계 밖에서 죽었다고 알려질 거다.”

“……딱히 죽일 생각은 없습니다.”

“…….”

“믿지 않으셔도 상관없고요. 그나저나, 피에르 님 약조해 주셨던 두 번째 질문을 여기서 물어도 되겠습니까?”

피에르가 느릿하게 끄덕였다.

벨루스는 다시 한번 질문했다.

“처음 질문을 한 이후로 여전히 이상한 꿈을 꾸신 적 없습니까?”

소년의 얼굴 위로 어울리지 않는 긴장이 찰나 스쳤다. 피에르의 말이 나오는 순간 사라진 감정이었다.

“그래, ……여전히 나는 한 번도 꿈을 꾼 적이 없다.”

“그렇군요.”

“그렇게 반복해 묻는 질문은 보통 타인도 자신과 똑같은 일을 경험한 것인지 확인하고 싶어서지. 너는 대체 무슨 꿈을 꾸는 거지?”

“……별일이군요. 하지만 제게 대답할 의무는 없겠지요? 어차피 관심도 없지 않습니까.”

“적어도 여기 잠든 딸 덕분에 아주 없지는 않다. 말하면 들을 용의는 있지.”

색색 잠든 칼립소를 의식해서인지 부자의 목소리는 작았다.

“네가 이 아일 배려해 목소리를 낮춘 만큼, 그 정도 만큼이라면 도울 용의도 있다.”

“…….”

“도움이 필요한가?”

단조로운 질문과 무감각한 대답이 끝난 후 부자는 침묵했다.

한동안 적막이 계속되었으나 벨루스는 끝내 피에르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벨루스의 생각은 끝없이 이어졌다.

“피에르 아콰시아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별생각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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