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범고래 아기님 (95)화 (95/275)

제95화

‘누구도 안 줘. 못 줘.’

범고래의 욕심과 집착이 이미 발동한 뒤였다.

내 울타리 안의 존재에게 향하는 집착. 이 여정을 통해 그녀들은 선 안으로 들어온 뒤였다.

아니, 서울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애써 인정하지 않았을 뿐.

나를 편견 없이 대해 주던 그때부터 울타리의 문은 열려 있었다.

나는 하녀들이 꺄르르 꺄르르 웃는 모습을 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빠는 기사와의 이야기가 조금 길어질 것 같고.’

울적하진 않았지만 조금 조용한 곳에 있고 싶었다.

마침 거리가 약간 떨어진 곳에 바위가 있었고, 그곳에 앉았다.

아빠가 시선을 한 번 주고는 다시 돌리는 걸 봐서는 시야 안에 있으면 되는 모양이었다.

‘아, 날씨 좋다.’

이제 돌아가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세 살이 할 고민은 아니지.’

절대 아니란 건 안다.

아빠는 당분간 쉬어도 된다고 했지만, 내겐 꼭 필요한 질문이었다.

60여 년을 살았기에 스스로를 잘 안다.

나는 목표가 있어야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아직 아물지 않은 아픔을 잊기 위해서라도 필요했다.

나는 하늘을 바라본 채로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노려볼 거야?”

천천히 시선을 돌리면, 그곳엔 어느샌가 다가온 벨루스가 서 있었다.

사실 기척은 느끼고 있었는데, 굳이 돌아보지 않았을 뿐이다.

“마차에서 그만 좀 쳐다봐. 내 얼굴 뚫리겠어.”

“노려본 적 없어.”

“그래, 그렇다 치고, 그만 보라고.”

“…….”

조금 괜찮아졌을 뿐, 예민한 상태는 여전했기에 내 목소리로 짜증이 살짝 스몄다.

미안하지만 첫째 오빠를 신경 써 가며 말할 기분이 아니었다.

“아니면, 뭐. 결판이라도 내자고 시비 거는 거야?”

“지금의 넌 날 이길 수 없을 텐데.”

“알게 뭐야. 나랑 재 보기라도 했어?”

나는 삐딱하게 웃었다.

“그리고 오빠, 나 필요하면 수단과 방법도 안 가려. 이기는 데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 난 필요하면 내 편도 끌어들일 건데. 혹시 아빠 이길 수 있어?”

아빠를 고갯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으면서 어제 오후까지는 왜 그랬던 거지?”

“뭐, 내가 울적해 있던 거?”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새삼 신경 쓰기라도 했나? 걱정했어?”

“맞아.”

비아냥거릴 의도였지 정말 대답할 거라 생각하고 물어본 건 아니었다.

그런데 딱 잘라 떨어지는 대답이 튀어나와 나는 멈칫했다.

바위에 앉아 건들거리며 흔들던 다리를 멈추고 자세를 바로 했다.

“거짓말까지 해서 얻는 게 뭔데?”

“거짓말 아니야.”

벨루스가 서늘한 듯 차분한 낯으로 말했다.

“네 말대로 내가 거짓말해서 뭘 얻는데?”

“…….”

그 말은 사실이었으므로 나는 냉소와 화를 가라앉힌 채 놈을 빤히 응시했다.

생각해 보면 이 여정 내내 묘하게 굴었던 놈이었다.

“하나만 확실하게 해. 적인지, 아군인지. 아군이 될 생각은 없잖아, 너.”

“왜 없을 거라 생각해?”

“그럼, 가주 포기하게? 내가 가주되고 싶으면?”

푸른 눈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빠놈들은 똑같이 나를 응시하더라도 항상 얼굴들이 조금씩 달랐다.

분명 지금은 4회차에서 만난 첫째 오빠인데, 왜 아주 가끔씩 3회차에서 봤던 얼굴이 보이는 건지.

이제 그만 이유를 알고 싶었다.

“넌 지금 목표를 찾고 있는 거지?”

내 상태를 정확히 꿰뚫는 말이 훅 들어왔지만, 나는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여기서 놀란 반응을 보여 봐야 손해였다.

“어떻게 알았냐는 얼굴이네. 그저 나도 그런 때가 있었을 뿐이야.”

“……네가?”

“그럼 나라고 완벽하겠어?”

결핍을 인정하는 놈이 낯설었다.

“내가 한때 거울로 확인한 표정을 네게서 봤을 뿐. 이런 걸 보면 너와 내가 남매이긴 한가 보네.”

벨루스가 한 걸음 다가옴에 따라 나는 주먹을 꾹 쥐었다.

내가 조용히 경계하자, 벨루스는 더는 다가오지 않았다.

“충고하자면 집중할 게 필요하면 가주를 해.”

“뭐?”

“가주에 도전하라고.”

얘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나는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너 지금 나더러 네 라이벌이 되라는 거야? 너처럼 나이도 많고 완벽한 후계자를 옆에 두고? 아, 난 도전하다가 콱 죽으라고?”

내 입술엔 삐딱한 웃음이 걸렸고, 반면 벨루스는 평온했다.

“그 말은 이상한데. 아까부터 완벽을 논하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완벽한 범고래가 어딨지? 우리는 모두 불완전해. 이 중에서 할머니의 눈에 완벽해 보이는 한 사람이 간택 받아 다음 가주가 되는 것뿐이지.”

“…….”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제안한 건 아니야. 칼립소 아콰시아델.”

벨루스의 얼굴에 처음으로 고민 어린 기색이 스쳤다.

“나는 네가 언젠가 내 나이쯤 됐을 때, 그때의 네가 똑같은 나이의 나보다 강하다면 널 따르려고 해.”

이번에야말로 눈을 깜빡일 수밖에 없었다.

……혹시 이 새끼, 약 먹었나?

“무슨 꿍꿍이, 아니다. 이런 말 하는 것도 질린다. 하나만 말해 두는데.”

나는 짤막한 손가락으로 벨루스를 가리켰다.

“그때의 나는 지금의 너를 이길 거야. 반드시.”

“그럼 더 좋고.”

벨루스가 희미하게 웃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벨루스 저놈은 초급 기관에서, 그리고 용 공작의 성에서 그러했듯 제 말이 끝나자마자 미련 없다는 듯 뒤돌아 가 버렸다.

싸움도 필요 없다는 듯한 태도.

이번에도 황망한 표정의 나만 남았다.

‘아니, 완전히 쓸모없는 이야긴 아니야.’

어처구니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에 다른 생각이 들었다.

‘가주.’

지금의 내겐 집중할 게 필요했다.

정말 우리가 남매라서인지 모르겠지만 저놈의 말이 가슴에 불씨를 던졌다.

‘이곳에 남아서 새로운 생을 살 거라면.’

단순히 가주가 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3회차의 삶을 반복하고 싶은 게 아니야.

이곳에 남을 거라면…… 나는.

‘복수를 하고 싶어.’

나를 세 번이나 버린 할머니에게 당신이 버린 손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리고 싶었다.

당신의 판단은 이토록 깊이 빗나갔다고.

너는 틀렸고, 나는 맞았다.

내가 지난 회차에서 유일하게 후회했던 건, 그 할머니가 죽은 뒤에야 가문으로 돌아왔다는 거였다.

보여 줄 대상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그리고…….

“네가 범인이겠지.”

“죽어 마땅한 여자 아니던가?”

“아버지, 저 여자입니다! 저 여자가 괴롭힌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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