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화
물의 힘에 로브가 살짝 젖는 것이 느껴졌다.
“네가 다치지 않고 승리하는 게 어렵다면, 내가 아비로서 지키면 그만이겠지.”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약해 보이잖아.”
“다녀오도록.”
와, 아니라는 말은 안 하네.
뚱한 표정으로 아빠를 노려보다가 이내 창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내 몸은 여느 때와 다르게 포탄처럼 슝 쏘아졌다.
순식간에 2층 창문이 가까워졌다.
창문을 넘어가는 동안 심장이 쿵쿵 뛰었다.
나는 안전하게 창문을 넘어 성 안쪽에 몸을 들이밀었다.
깨진 유리가 생각보다 날카로워서 만약 맨몸으로 날아왔다면 약간이지만 생채기가 났을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완벽하게 균형을 잡아 내려왔다.
나는 폴짝 내려오기 무섭게 몸에 둘둘 말린 로브를 들고 꾸욱 쥐었다.
이제는 인정해야겠다.
이 로브에 묻어난 것은 내가 다치지 않길 바라는 염려. 게다가 아빠는 용 공작을 빼돌리는 위험한 일에 스스럼없이 동의했다.
이것을 애정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만약 집으로 돌아가려는 목표가 없었다면.
나는 이대로 스승님을 아빠로 인정하고, 행복하게 살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지금 생각해야 하는 건 이게 아니야.’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타이밍이 맞지 않았던 건 내 탓이 아니야.
나는 세 번의 회귀 동안 열심히 살았단 말이야.
잡생각을 버리고 정신을 집중했다.
-투스!
용 공작의 방에 있을 투스에게도 들리도록 아주 우렁차게 소리쳤다.
어차피 투스에게만 들릴 소리일 테니까.
-지금 내가 그쪽으로 갈게, 준비해!
이 정도로 외쳤으면 들렸겠지?
설사 들리지 않았더라도 괜찮다. 방으로 들어가서 말하면 되니까.
‘이제 내가 할 일은 혹시나 있을 하녀나 시종에게 들키지 않고 용 공작의 방에 가는 거지.’
다행스럽게도 나는 용 공작의 방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게다가 바로 어제 일이니 기억도 선명했던지라 찾아가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가는 중에 투스의 목소리까지 들려 와서 아주 식은 죽 먹기였다.
‘그나저나, 이렇게 넓은데 정말 시종도 하녀도 하나도 보이질 않잖아?’
어제 봤던 하녀의 존재가 거짓말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용 공작의 방에 들어서고, 문을 닫았다.
-칼립소!
돌아서자마자 반가운 목소리가 나를 맞이했다.
투스가 열심히 샥샥 기어서 내게로 왔다.
딴에는 달린 건가 싶어 귀엽단 표정으로 얼른 들어 올렸다.
“조금 일찍 왔지? 생각보다 자가용이 빨라서 말이야.”
-자가용? 투스 칼립소 반가워!
“응, 나도 반가워.”
그리고 우리 용 공작님도 반갑지.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눈을 깜빡였다.
용 공작은 스푼을 쥐고 있었다.
아, 이게 투스가 말한 ‘투스가 있어야 식사가 가능’한 광경인가.
음식이 테이블에 차려져 있었고, 용 공작은 누가 봐도 이상하고 서툴게 스푼을 쥐고 있었다.
용 공작은 먹는 것에 집중하느라 투스의 외침도 나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저 모습을 보며 조금 심각해졌다.
‘으음, 아무래도 뱀이 스푼을 쥐는 방법을 알려 주진 못해서 저 모양으로 잡은 걸까.’
이거야 원. 정말 손으로 쥐고 먹는 것보다 아주 약간 나은 수준이었다.
한참 열심히 먹던 용 공작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용 공작이 입을 벌리더니…….
툭.
스푼을 떨어트렸다.
‘음? 잘 먹다가 숟가락은 왜 떨어트리는 거야?’
음식이 마음에 안 들었나. 아니면 내가 나타나서 놀란 건가?
어제 보았을 땐, 그리 감정의 폭이 큰 아이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말이지.
용 공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오도도도 무슨 정말 이런 소리가 날 것 같은 걸음으로 내게 다가오는 게 아닌가.
데려가려고 왔으니까 마침 잘된 상황이긴 한데…….
‘대체 왜?’ 하는 물음이 끊이지를 않았다.
내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손이 덥석 잡혔다.
‘이 모양새는…… 어제 내가 용 공작을 잡은 자세인데?’
용 공작이 양손으로 내 손을 잡고 있다 보니 내 몸은 일시 정지를 누른 듯한 모습이 되어 버렸다. 얼떨떨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였다.
“칼립소야!”
용 공작이 열심히 외쳤다.
나는 눈을 깜빡이다가 끄덕였다.
“칼립소야가 아니라, 칼립소.”
“아니라?”
“응. 칼립소.”
“칼립소.”
“맞아.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네? 기억력은 좋나 보다 너.”
나는 까치발을 들고, 자유로운 한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하긴 용 공작님인데 머리가 아주 좋겠지? 이런 널 가르치지 않은 사람들이 문제인 거야.”
“…….”
“넌 잘못 없어.”
갸우뚱. 용 공작이 내 손을 잡은 채로 고개를 기울였다.
입가에 잔뜩 묻어 있는 부스러기를 보다, 내 소매로 닦아 주었다.
그러고는 용 공작에게 잡힌 탓에 떨어진 아빠의 로브를 주우려고 했는데.
“저기 좀 놓아줄래?”
“……놓아줄래?”
“……그래. 내가 놓을게.”
나는 용 공작의 손을 떼어내고 아빠의 로브를 주웠다.
그대로 용 공작에게 뒤집어씌워 보았다.
“음, 나보단 너한테 크기가 맞겠다. 아니다, 용 공작님. 네가 좀 들어 줄래? 나는 경계를 봐야 해서 거추장스럽거든.”
그렇다고 이걸 여기 두고 가기라도 하면 우리가 범인이에요 하는 꼴이니까.
“투스! 준비는 모두 됐어?”
-응! 투스 준비했어. 공작님 준비 다 됐어!
투스가 내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나를 안내했다.
투스가 말한 곳으로 가니, 웬 가방이 놓여 있었다.
-칼립소 챙겨 줘! 공작님 거!
“어? 어어.”
너 가방도 챙길 수 있는 뱀이었구나…….
나는 멈칫하다가 말고 얼른 가방을 챙겼다. 생각보다 가벼운 무게였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가방을 열어 보니 자리가 남길래 아빠의 로브를 여기 넣었고, 다음으로는 용 공작에게 메 주었다.
“용 공작님, 불편해도 조금만 참아. 혹시나 전투가 있으면 내가 널 지켜 줘야 하는데, 내 키가 좀 작아서 방해되거든. 아, 이건 가방이야, 가방.”
“……가방.”
“그렇지.”
내가 용 공작에게 가방을 메 주는 사이에, 투스가 나를 불렀다.
투스는 이번엔 침대 밑으로 꼬물꼬물 들어가더니, 다시 나왔을 때는 입에 무언가를 물고 있었다.
-칼립소! 이거!
나는 투스가 내미는 것을 받았다. 받고 보니 조그만 수첩이었다.
-투스 공작님에 대한 거 적었어!
“어…….”
……너 글씨도 쓸 줄 아는 뱀이었니?!
수첩을 넘겨 보았다가, 깜짝 놀랐다.
「용 공작님 보고서
~투스가 지었음~」
‘심지어 글씨도 잘 써?!’
나는 급한 상황이라는 것도 잠시 잊고 깜짝 놀랐다.
아니, 대체 팬은 뭘로 잡는 건데? 손이 없잖아? 설마 꼬리로? 아니면 입……?!
‘정신 차리자.’
나는 일단 수첩을 얼른 용 공작님이 들고 있던 가방에 넣었다.
가방을 몇 번 열었다 닫을 때마다 내 키에 맞춰서 잡아당긴 탓일까.
용 공작은 내가 가방에 손을 뻗자 얼른 휙 앉아 주었다.
학습 능력이 빠르시네.
“그나저나 투스, 이런 걸 줘서 고맙긴 한데 왜 주는 거야? 어차피 너도 함께 갈 거잖아.”
용 공작의 권속은 용 공작과 함께하고 싶어 한다.
이건 마차 내내 용 공작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뚝뚝 흘리던 투스의 모습으로 익히 알게 된 사실이었다.
‘만약을 대비해 준 거라면 이해할 수 있긴 한데.’
그나저나 항상 용 공작 옆에 붙어 있을 권속이 떨어질 만한 일이 뭐가 있지?
고민하는 사이 어느새 침대 밑으로 쏙 들어간 투스가 맑게 말했다.
-공작님은 배우지 못했어. 사자들이 배움을 주지 않았어!
“응. 맞아. 못된 놈들이지.”
-못된 놈! 공작님이 배우지 못해서 공작님도 자신을 몰라.
“음…… 용 공작님 스스로도 자기 힘이나, 스스로에 대한 걸 전혀 모른다는 소리지?”
-응!
투스가 이어 말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공작님을 아는 건 투스뿐이야.
그 울림이 왜 이렇게 맑고 동시에 씁쓸하게 들렸던 걸까.
그 이유를 다음 순간 알 수 있었다.
-가, 칼립소!
“어, 어?”
-어서 가!
나는 물러나려다 말고 멈칫했다.
“잠깐만, 그게 무슨 말이야? 가라니? 너는 안 가? 왜 안 가는 것처럼 말해?”
-투스는 안 가!
“무슨 소리야, 너 용 공작 없으면 찔찔 울면서!”
-투스 찔찔 울지 않았어!
“그래, 찔찔 울지 말고 딴소리 말고 어서 가자. 시간 없어.”
그러나 투스는 침대 밑에 자리한 그대로 나오지 않았다.
지체할 시간이 없어서 좀 더 독촉해 보았다.
그러자 투스가 빠르게 나오더니 나를 빤히 보았다.
-용 공작님 배워야 해. 그러려면 여기 나가야 해.
“그래, 알겠으니까 우리 빨리 나가야…….”
-투스 여기서만 쓸 수 있는 능력 있어.
눈앞에서 새파란 빛이 살금살금 흘러나왔다.
빛은 투스와 용 공작을 연결해 주었고, 이윽고 투스의 온몸에서 폭발하듯 빛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