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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범고래 아기님 (84)화 (84/275)

제84화

항상 묘하다고 표현해 왔지만 사실은 아빠가 이럴 때마다 기뻤던 거였다.

나는 오랜 세월 동안 당하거나 약자거나, 울거나 억울할 수밖에 없는 굴레에 빠졌다.

내가 마침내 무언가를 얻고자 했을 땐, 홀로 싸우고 분투하고 마침내 쟁취하는 방법뿐이었다.

가주가 되기 위해, 가주가 되려고, 분투해서 끝내 얻었을 땐 정말 기뻤지만.

내 손으로 노력하지 않고 얻은 것은 없었다.

지금처럼 내가 괜찮다고 거부해도 떨어지는 애정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잠시 뒤에 들어야겠군.”

아빠가 어느새 고개를 돌려 식당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 또한 한발 늦게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누군가 오고 있다.”

곧이어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고, 식당으로 낯선 이가 나타났다.

“안녕하십니까, 피에르 아콰시아델 님. 저는 이 성의 부집사입니다.”

“…….”

“모든 손님을 본성 ‘용의 이빨 홀’로 모시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아빠가 나를 대신해 물었다.

“누구의 명이지?”

“판테리온 공작님의 명이십니다.”

* * *

잠시 뒤, 나는 아빠와 함께 거대한 홀에 들어왔다.

성당처럼 생긴 커다란 공간이었다.

사람들이 앉을 수 있게 푹신한 의자들이 준비되어 있었고, 먼저 도착한 수인들이 빽빽이 앉아 있었다.

가끔 자리가 듬성듬성 빈 곳이 있었는데, 그곳엔 반드시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가진 수인이 차지하고 있었다.

‘벨루스 저놈도 같이 올 줄이야.’

나는 아빠의 품에 안겨서 함께 나온 벨루스를 보다가 다시 홀을 구경했다.

저기 사람들이 알아서 옆자리를 비워 준 놈들은 대부분 육지 동물 수인 중에서도 맹수과들이었다.

‘저 사람은…….’

쭉 사람을 돌아보던 나는 익숙한 인영을 발견했다.

‘하이에나 수인이잖아?’

분명 어젯밤에 보았던 여자였다.

그녀는 거만한 자세로 의자를 두 개나 차지했고, 느긋하게 하품이나 하고 있었다.

덩치가 큰 탓에 의자 두 개도 거뜬했다.

‘낮에 보니까 확실히 위압감 넘치네.’

어제 마주치지 않길 잘했다.

아직 저건 못 이겨.

“스승님, 보여? 저기 하이에나. 내가 본 게 저 사람이야.”

“언제 봤는데?”

아빠한테 속삭이는데, 대답은 벨루스가 했다.

나는 당황하는 대신 태연하게 말했다.

“넌 몰라도 돼.”

“…….”

나한테 관심 갖지 말거라.

‘그나저나 돌아가지 않는다고 약속했는데, 번복하게 됐네. 이따 가주는 안 하겠다고 확실히 말해 주지 뭐.’

저놈은 라이벌이 하나 주는 걸 좋아할 테니까.

날 죽이려 들면, 음 죽어 줄 순 없으니 급한 대로 애비를 이용해야겠다.

아빠는 나를 데리고 적당한 곳에 앉았다.

우리를 고깝게 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식당에서의 일이 퍼지기라도 한 듯 가까이 오는 사람은 없었다.

“저게, 범고래 가문의 피에르 아콰시아델…….”

“가주만큼이나 고약하다고 하니 건들지 말도록 해요…….”

“쯧, 물에 사는 짐승이 육지에서 강하면 얼마나 강하다고, 크흠.”

물론 덤비지만 않았을 뿐 속닥속닥 말은 많았다. 자기들끼리 속삭이며 난리도 아니었다.

이게 과연 속삭이는 게 맞기는 한 건지 싶을 정도로 아주 선명하게 들려 왔지만.

‘아주 들으라고 떠드네.’

차라리 대놓고 욕을 하지. 아직 정신을 못 차렸네. 못 차렸어. 쯧쯧.

혀를 차고 있자, 위에서 아빠의 목소리가 떨어져 내렸다.

“거슬리나?”

“아니, 아니. 괜찮아. 일단 뭐 때문에 불렀는지 듣고 나서 쓸어버려도 상관없잖아.”

“네가 바란다면야. 지붕은 어느 정도로 부숴 줄까.”

“와, 스승님이 농담도 할 줄 알아?”

“농담 아닌데.”

“…….”

우리 옆에 의자 하나 정도 떨어져서 앉은 벨루스가 듣고 있다 말고 툭 뱉었다.

“용건이 끝나고 쓸어버리면 할머니랑 똑같겠군요. 가주님도 회담이 끝나고 쓸어버리는 게 취미라고 하셨고 실제로도 그러시니까요.”

오, 이건 그대로 행동하면 넌 할머니랑 다를 바 없는 인간이다, 라고 고도로 돌려 까는 말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아빠는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정면을 바라보았다.

“아주 불쾌한 욕이군.”

……하긴.

할머니랑 닮았다는 말은 나도 좀 그래.

나는 아빠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잠시 뒤, 제일 앞에 놓인 거대한 단상 옆 계단으로 누군가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여기서 보아도 거대한 뒷모습이었다.

“네가 내 아들과 약혼할 오큘라 아콰시아델의 손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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