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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범고래 아기님 (83)화 (83/275)

제83화

용의 축제가 물 건너갔으니, 어차피 빠른 시일 내로 발표가 있을 거야.

그게 언제가 될지 몰라도 얼른 용 공작을 보쌈해다가 저택으로 돌아가야 한다.

마침내 나름의 결심과 계획을 끝내고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피로한가?”

“어? 응…….”

아빠가 먼저 불쑥 질문을 던지는 통에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아니지, 다시 꺼내면 되지. 그렇게 생각하는데, 생각지도 못한 말이 턱 날아왔다.

“어젠 어딜 그렇게 다녀왔지?”

“으응?”

“밖은 꽤나 위험할 텐데.”

“무슨 소릴 하는…….”

“무슨 소리냐고 묻기 전에 네가 과연 내 감각을 피할 수 있는 수준인지 생각해 보는 게 먼저일 듯한데.”

“…….”

……와, 사람을 이렇게 때리네?

나는 뚱한 표정을 지었지만. 저 말은 사실이었다.

아빠가 마음만 먹는다면 현재 내 수준으로는 기척을 숨길 수 없으니까.

이놈의 방 구조가 문제였다.

‘아니, 방 구조가 왜 이따위로 생겨 먹어서는. 게다가 아빠는 밤엔 잠이나 자지 뭘 그리 기척을 살피고 있었담.’

여기에 자길 암살하러 올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설사 암살자가 떼로 달려든다고 한들 죽지도 않을 인간이면서.

“왜 수저를 놓지?”

“입맛이 사라졌어. 스승님 때문이야.”

“…….”

“농담이니까 할 말 있으면 해. 밥은 다 먹었어.”

어차피 잘됐어.

나도 할 말이 있는 마당에 이야기를 꺼내기 쉬워진 거다.

“궁금한 거 있으면 다 물어봐도 돼.”

“……어제 어딜 갔었지?”

“용 공작의 성에 갔었어. 용 공작 만나러.”

“용 공작의 성이라면 바로 옆에 있는 걸 말하는 건가?”

“아니, 거기 말고.”

이다음은 어떻게 말할지 고민했다.

“스승님, 지금 우리 대화 우리만 들을 수 있게 해 줄 수 있어?”

우리는 방에 딸린 식당에서 밥을 먹는 중이었다. 그러나 하려는 얘기가 얘기인 만큼,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를 해야 했다.

“……그러지.”

아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우리 사이로 얇고 푸른빛을 띠는 투명한 막이 나타났다.

흡사 물로 만든 비단 내지는 커튼처럼 보였다.

‘와, 이거 투명하게 만들기 어려운 건데.’

아무래도 나 또한 정점에 있어 봐서인지, 아빠의 능력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믿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모두 사실이야.”

“…….”

“요즘 계속 나랑 같이 다니던 아기 뱀 기억나지? 걔가 용 공작의 권속이고, 나는 걔를 용 공작에게 데려다주러 갔어.”

아빠는 팔짱을 끼고 얌전히 들어 주었다.

“그리고 투스의 안내를 받아서 간 곳은 벨루스가 말했던 저기 거대하고 번듯한 성이 아니었어, 허름하고 낡은 건물이었지.”

나는 어떻게 말할지 고민하다가 그냥 직설적으로 말했다.

“스승님, 걔는, 아니. 용 공작님도 나랑 같은 처지더라? 방치되어 있었어. 낡고 허름한 곳에.”

“…….”

“아니, 더 심했지. 황실이 걔를 사육한대.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로 키워서 무기로 이용할 거라더라.”

“……어제 그걸 모두 들었단 말인가?”

“응.”

나는 이내 어젯밤 있었던 일을 모조리 이야기했다.

사실 아빠한테 꺼낼 이야기를 생각하면 숨길 이유도 없었다.

“하이에나라니, 용케도 무사히 돌아왔군.”

“운 좋게 나올 땐 마주칠 일이 없어서 다행이었지.”

“네 말대로라면, 확실히 용의 축제는 열리지 않을지도 모르겠군. 그런 소문이 돌았던 것도 사실이었나.”

“그럴 거야.”

아빠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얼굴로 돌아왔다.

도리어 그 모습을 보면서 내가 긴장했다.

“그래서 단순히 이런 일을 토로하려고 소리 차단을 해 달라고 한 건 아닌 것 같고. 내게 바라는 게 뭐지?”

“……스승님은 은근히 눈치가 빠르더라.”

“은근히가 아니라 그냥 빠른 거다.”

“그건 그래.”

“네 일이라서 빠른 거겠지.”

“…….”

깨알같이 어필하시네?

여기서 정말 남은 것을 다 털어놓아도 되는 걸까?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아빠의 도움이 없이는 걜 데려올 수 없어.

하지만 나는 입을 여는 한편, 마음속에 강한 체념과 불신을 먼저 품었다.

확실하지 않은 것에 사활을 걸지 않으려는 방어기제였다.

“날 도와줘. 스승님.”

“무엇을?”

“나는 걔랑 같이 우리 가문 영지로 돌아가고 싶어.”

이 말은 제아무리 아빠라도 놀라리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크게 놀란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를 빤히 보더니 고개를 느릿하게 기울였다.

“확인차 묻는다만, 용 공작을 아콰시아델로 데려가겠다는 건가?”

“맞아.”

“확실히 이 자리에 있는 게 내가 아니라면 그야말로 미쳤다고 할 소리군.”

“…….”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침묵했다.

“용 공작이 용의 도시 에키나에 머무르는 것은 초대 황제로부터 내려온 지엄한 맹세 때문이다. 이곳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되, 황실의 허락 없이는 나갈 수 없다. 알고 있나?”

“도시를 나가지 못한단 건 알고 있었어.”

그래서 앞선 회차에서 용 공작의 폭주가 용의 도시뿐 아니라 제국 구석구석, 아콰시아델 영지까지 영향을 미치고, 모두 파괴해 버린 것이 충격적이었다.

“…….”

아빠는 더는 말하지 않는 대신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제 무슨 말을 할까. 안 된다고? 아니면 아빠도 범고래니까, 이런 일에 미친 사람처럼 흥미를 가질까?

아빠의 반응이 예상되지 않아서 초조해졌다.

‘정 안 되면 나 혼자서라도 갈 거야.’

어차피 혼자 뛰쳐나가 생존해 본 경험이야 남아 있다.

그때보다도 현저히 어린 나이가 마음에 걸리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그러다 최악의 경우엔 정말 싫지만……. 한 번 더 회귀하는 거고.

“넌 여기 남으려 했지. 아니, 여기서 살고 싶다고 했던가?”

아빠의 입에서 나온 건 긍정도 부정도 아닌 엉뚱한 대답이었다.

나는 조금 얼떨떨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건 이것 때문이었나? 용 공작의 납치?”

납치라니. 용 공작과 정말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그제까지의 나였다면 무슨 개소리냐고 했을 것이다.

내 안에서 용 공작의 이미지는 폭주한 모습이었으니까.

하지만 어제부로 달라졌기에…… 납치라는 말에 반박할 수가 없다.

‘순진한 얘 꼬여서 데려가는 게 납치랑 뭐가 다르냐 하면은……. 끄응.’

“그게, 처음부터 용 공작을 데려오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 대체 누가 그분을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겠어? 그렇게 강하고, 수인들이 모두 우러러보는 사람인데…….”

“…….”

나는 망설이다가 작게 대답했다.

“근데 방치에 학대당하고 죽을 뻔했던 나보다 더 불쌍해 보였단 말이야.”

아니, 거짓말이다. 나는 용 공작을 본 순간에 1, 2회차의 나를 떠올렸고 연민했다.

그러니까 연민의 대상은 용 공작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아빠가 그게 뭐 어쨌냐는 태도를 보인다면 난 분명 실망하겠지만 상관없다.

그래도 아빠를 설득해 볼 거니까.

하지만 조금 밉긴 하려나?

“그렇군. 처음에 여기 남으려 했다는 건 사실이란 소리군.”

“그건 그런데…….”

“날 두고?”

“……맞아. 스승님을 두고.”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라, 아직도 부족한가 보군.”

“뭐가 부족하다는 거야?”

“네게서 호칭이 바뀔 만한 정성?”

“…….”

“움츠러들지 마라. 네가 잘못한 게 있나?”

“없지.”

나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움츠러들고 싶지 않았다.

“다음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다면, 뭐가 하고 싶은지를 먼저 말해라. 나 또한 지금부터 뭐가 됐든 재확인은 하지 않도록 할 테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원한다면 성이라도 부숴 줄 테니 다음엔 처음부터 같이 가자는 얘기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럼 용 공작을 데려오는 걸 도와주겠다는 말이야?”

“그래.”

됐다.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쉽고, 어이없을 정도로 산뜻한 대답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치열한 논쟁이라거나, 통할까 싶었지만 준비했던 협박도, 계략도, 계획도 모두 사용하지 않은 채.

물 흐르듯이 나온 긍정이었다.

“왜?”

승낙한 이상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왜? 잘됐잖아.

그럼에도 나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마치 이 물음이 나에게 있어 중요하기라도 하듯이.

“왜 도와주는 건데? 걔가 불쌍해서?”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는다만. 자꾸 잊는 것 같은데, 난 여기 네 아비로서 온 거다.”

“…….”

“그러니 네 뜻을 존중하는 거지. 네가 하고 싶다면 그냥 하는 거야.”

왜일까, 이 말이 용 공작을 안쓰럽고 불쌍하게 여긴다는 대답보다 더 나를 기쁘게 만들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이럴 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고장 난 로봇처럼 구는 내가 머저리 같았다.

겨우 만들어 낸 얼굴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이럴 땐 고맙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언제 움직일 거지?”

“어? 어어. 그 오늘 밤!”

“그렇군. 준비해 두겠다. 자세한 이야기를 나눠야겠군.”

“……계, 계획을 말하는 거라면 내가 생각해 둔 게 있어!”

아빠는 나를 보며 작게 웃었다.

“그래? 기대되는데.”

“…….”

“넌 항상 엉뚱한 것을 들고 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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