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범고래 아기님 (77)화 (77/275)

제77화

문 안쪽에는 가운을 걸친 채 편안하게 앉아 있는 아빠 모습이 보였다.

“스승님, 옷 갈아입었네?”

“아무래도 예복은 불편하니까.”

“그건 그래.”

식당에 가기 전, 우린 다 같이 옷을 갈아입었다.

하지만 내 경우 식당에서 움직인 탓에 엉망이 되었고, 아직 갈아입진 않은 상태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갈아입고 올걸.”

새삼스럽긴 하지만 조금 신경 쓰여서 옷을 탁탁 터는데, 몸이 두둥실 떠올랐다.

나는 걸어갈 필요 없이 그대로 물줄기에 몸을 맡기고 스승님 바로 옆자리로 날아올 수 있었다.

“나쁘지 않으니 그대로 있어도 상관없다.”

“그래? 고마워, 스승님. 내가 좀 귀엽고 예쁘긴 하지.”

“…….”

아빠의 침묵이야 이젠 익숙하다 못해 그러려니 했다.

어차피 이런 이야기를 하러 온 게 아니니까 어서 본론을…….

“그건 그렇지.”

“으응?”

“오랜만에 가문 회의를 나가 보니 알겠더군. 네가 제일 예쁘다.”

어째, 세상이 두 쪽 나도 이런 말을 절대 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에게서 들으니 기분이 묘한걸.

“……나도 내가 예쁘고 귀여운 거 알긴 아는데.”

“아는데 표정이 왜 그렇지?”

“스승님한테는 평생 들을 수 있을 거라 생각 못 해서?”

그러자 아빠가 보일 듯 말 듯 옅게 웃었다.

“아비는 딸을 귀여워하는 거라더군. 그럼 이상한 게 아니겠지.”

“…….”

“내 방을 찾아온 용건이 있나?”

“그렇게 말하니까 꼭 내가 용건이 있어야만 찾아오는 사람 같잖아?”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

“…….”

장난스럽게 넘기긴 했지만 계속해서 기분이 묘했다.

지금 내가 가져온 용건을 생각하면 더더욱.

“……스승님, 성실하네. 사실 이렇게까지 성실하게 아빠 노릇을 하려 할 줄은 몰라서 놀랐어. 약속은 약속이니까 그런 거야?”

“그런 것도 있겠지만. 글쎄, 잘 모르겠군.”

“잘 모르겠단 게 무슨 말인데?”

“하고 싶어서 했단 소리다.”

아빠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짧게 보긴 했지만, 너는 네가 싫어하는 일은 설사 누군가 네게 강요하더라도 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나?”

“……맞아.”

“나 또한 마찬가지다. 평생, 하고 싶지 않은 걸 억지로 해 본 적이 없다.”

가주만큼이나 강한 이에게 누가 강제할 수 있었을까.

심지어 할머니조차도 죽이기엔 아까워 건방짐과 무례함을 눈감아 주는 상대인데.

“그래, 굳이 표현하자면 조금 즐거워.”

“…….”

“나는 즐겁다. 칼립소.”

머리 위로 커다란 손이 툭 내려앉았다.

느릿하게 쓰다듬는 손을 느끼며 내가 삼켜 내는 묘한 감정은 더욱 커졌다.

나는 당신이 내게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하지도, 정을 붙이지도 않으면 좋겠어.

내가 지금 말하러 온 이야기는 그런 거니까.

“……그 즐거움 아게노르랑도 느낄 수 있지 않겠어?”

“셋째가 너만큼 강하고 너와 같은 성격에 너와 똑같은 영혼이라면 가능하겠지.”

“……뭐야, 나 아니면 안 된다는 말을 뭐 그리 길게 해? 그리고 강함을 따지면 벨루스가 나보다 강할걸.”

“그놈은 안 돼.”

아빠는 다리를 꼰 채 느긋하게 관자놀이를 손에 기대며 말했다.

“나랑 너무 똑같아.”

“그래?”

나는 아빠의 눈치를 슬쩍 살펴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비슷한 사람끼리 잘 맞는 경우도 있잖아?”

“분명 그런 경우가 있겠지만, 그놈과 나는 동족혐오로 갈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데.”

꽤 예리한 지적이었다.

실제로 벨루스는 아빠를 쓰러뜨려야 할 대상 정도로 여기는 것 같았으니까.

옆에서 볼수록 느끼는 거지만 안 보는 척하면서 사실 아빠는 많은 것들을 눈치채고 있거나 아는 듯해 보였다.

“음, 있잖아. 스승님은 지금보다 더 나이가 어릴 때 여기저기 가 봤겠지?”

“가 본 적이 없진 않지만 대체로 수중 동물의 영역 내였고, 거기를 벗어난 적은 거의 없다.”

용의 축제에 참석하는 것도 처음이라고.

어쩐지 그래서 식당에 있던 육지 동물 놈들 중에서 아빠를 알아보는 놈이 없었구나 싶었다.

만약 단 한 번이라도 마주친 적 있었다면, 절대 피에르 아콰시아델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테니까.

“나는 여기 도시에 막 들어서면서 범고래 영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라 깜짝 놀랐어. 이렇게 높은 건물은 우리 저택 말고는 없잖아. 게다가 저택도 이만큼 높지는 않고.”

“그건 그렇지. 그나저나 높은 곳을 좋아했었나?”

나는 끄덕이면서 슬쩍 곁눈질했다.

“응. 육지놈들은 하나같이 별로였지만.”

“그러고 보니 넌 놈들의 혐오와 차별을 처음 겪어 봤겠군.”

아니 뭐, 그런 건 아니고. 그런 말이야 지긋지긋하게 들어 봤지.

그래도 대놓고 밝힐 수 없으니 공식적으로 이번 생에서는 처음인 걸로.

“어느 놈의 말이 제일 거슬렸지?”

“으응?”

“본래 본보기는 확실할수록 더는 말이 나오지 않는 법이지.”

“아니야, 아까 흑곰 정도면 충분해. 내가 직접 나서기도 했고.”

나는 아빠의 옷자락을 쭉 잡아당겼다.

이상하지. 슬슬 본론을 들어가야 하는데, 말을 빙빙 돌리기 바쁜 내 모습이 조금 낯설었다.

하지만 낯선 정도에서 끝내야 한다.

‘돌아갈 거잖아.’

나는 결정을 끝내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스승님, 나는 이 도시가 너무 멋지다고 생각해. 그래서 말인데…… 돌아갈 때는 혼자 돌아가는 건 어때?”

“뭐?”

분명 무슨 어처구니없는 소리냐는 듯 쳐다보며 침묵하거나, 태연하게 ‘그게 네가 원하는 거라면 그럴래?’ 하고 대꾸하리라 생각했다.

평소처럼.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말이다.

“……그건 나와 같이 이곳에서 살아보자는 거냐?”

“어, 어엉?”

바로 대답이 나오는 데다, 이런 대답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높은 곳을 좋아한다는 건 오늘 막 알았지만 그 정도로 좋아할 줄은 몰랐군. 이곳에서 산다면 하고 싶은 건 또 있고?”

“아니, 그게…….”

“보통 이런 도시에는 힘을 쓰는 수인이 많이 필요한 법이지. 도시가 크니 마을과 마을 간에 호위도 필요할 테고, 개인 호위나 용병도 나쁘지 않겠군.”

잠깐만 어디까지 가는 거야?

그보다 범고래 가주에 가까운 힘을 가진 당신이, 고작해야 이곳에서 겨우 호위가 되거나 용병 일을 하겠다고?

나는 하려던 말을 잊고 눈을 깜빡였다.

“저기, 스승님. 그거 나보고 일하란 소리가 아니라 스승님이 하겠다는 거지?”

“네 실력을 무시할 생각은 없지만, 이 도시에 세 살배기에게 호위나 용병을 맡길 가문과 상단은 없을 듯한데.”

“……갑자기 그것도 새삼스럽게 내 나이를 신경 써 줘서 고맙긴 한데, 요지는 그게 아니거든?”

나는 아빠의 옷이 구겨지도록 꾸욱 잡았다.

“나랑 여기서 같이 살겠다는 거야?”

“네가 살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아니, 난 그게 아니라…….”

“아니라면, 설마하니 널 여기 두고 나 홀로 돌아가라는 소린 아니겠고.”

“…….”

나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순간 폭발적으로 흘러나오는 투기와 살기에 깜짝 놀라 벙어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조금 전만 해도 너와 날 무시하는 것들이 식당에 드글드글했건만, 이 사이에 널 두고 가라고? 저놈들이 뭘 할 줄 알고?”

“스승님.”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게 할머니에 범접하는 아빠의 진짜 힘.’

내가 파르를 떨고 만 건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할머니에게서 느꼈던 호승심을 아빠에게서는 느끼지 않는다는 당혹감.

아빠가 나를 쉽사리 포기하지 않는 것에 대한 안도감, ……안도감?

혼란이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너는 내가 네게 했던 말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 듯하다.”

“…….”

“너는 내게 아비 노릇을 하라고 했어.”

“스승님, 난.”

“그런데 널 두고 어딜 가라는 거지? 넌 쉽게 찾아오고 가볍게 말했을지 모르나.”

“…….”

“반복해서 말하지만, 나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억지로 하지 않는다. 그러니 홀로 돌아갈 생각도 없다.”

새파랗게 빛나는 두 눈을 보고 있으면 혼란이 커지기만 했다.

숨을 살짝 참았다.

“이제부터 네가 할 일은, 내 보호를 받고 내게 훈련을 받고, 네가 바라는 성인이 되는 것뿐이다. 그 외의 것을 강요할 생각은 없지만, 이 모든 것이 행해지기 위해선 반드시 함께 있어야겠지.”

“…….”

난감함이 먼저 들었다.

그 난감함이 싫지 않다는 게 문제였지만.

결국 아빠가 말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을 것이다.

난 이곳에서 성인이 될 생각이 없었다.

‘어떻게든 용 공작과 대화를 나누고 방법을 찾아서, 돌아갈 거야.’

이제 와 내게 잘해 주는 당신이 밉지도 싫지도 않고 오히려 고맙지만.

그렇지만.

나는 내 세계가 너무 그리워.

이제 와 기대하고 기대기엔 너무 늦은 것 같아.

‘내겐 60년이란 시간이 너무 고통스러웠단 말이야.’

뻐끔뻐끔, 하고 싶은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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