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범고래 아기님 (76)화 (76/275)

제76화

“이제야 기억나는군, 들어 본 적 있다. 피에르 아콰시아델! 오큘라 아콰시아델만큼이나 강하다지?”

“…….”

“하지만 판테리온 공작가에서 흑표범들이 오면 꼼짝없이 쓰러지는 건 너일 거다!”

“아빠.”

“왜?”

“뭘 또 들어 주고 있어.”

나는 내가 가주일 때 삼류 육지 동물 악당 수인들의 대사는 3음절 이상 들어 주지 않았다.

그뿐인가. 나보다 약한 주제에 조롱을 입에 담은 대가는 반드시 치르게 해 줬다.

“그런 놈들은 입이 방정이라고 진 놈이 말이 많으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 줘야지.”

아빠가 나를 보더니 끄덕였다.

“그것도 그렇군.”

곧 아빠의 손에서 물로 만들어진 구가 생기더니, 아빠는 그걸 그대로 흑곰 수인의 얼굴에 씌워 버렸다.

마치 어항을 뒤집어쓴 듯한 몰골이었다.

물로 된 감옥에 머리만 갇힌 흑곰 수인은 얼마 가지 않아 그대로 기절했다.

나는 싱긋 웃었다.

“물에서 숨 쉬지도 못하는 것들이 입만 살아가지곤.”

“…….”

조금, 아주 조금이지만 자신이 없어졌다.

……용의 신부로 오게 되면 매일 겪어야 할 일이 이렇단 말이지.

‘지금으로선 차라리 용 공작을 보쌈해다가 범고래 가문으로 데려가고 싶어지는 심정이네.’

하지만 걘 나보다 강하겠지?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칼립소…….

투스에게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도와줘, 칼립소.

혹시 나오지 않을까 기다렸던 이야기였다.

-공작님께 데려다줘……!

* * *

용 공작의 거처.

거대한 방에는 방의 주인이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었다.

색색 쉬는 숨이 꽤 거칠었다.

숨소리의 주인은 가까스로 눈을 떠 천장을 보았다.

거대한 천장, 익숙하기만 한 천장이었다.

그러나 용 공작이 바라보는 것은 단순한 천장이 아니었다.

지금 이 성안에 있는 누군가의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돌아왔다.’

자신의 권속이 성안으로 돌아왔다.

왜 돌아왔을까?

영원히 떠나 버린 줄 알았는데.

그러나 용 공작의 숨이 쌕쌕 더욱 거칠어졌다.

용 공작은 눈을 감았다.

소파 뒤로는 인간의 것이라기엔 너무나 거대한, 높은 천장에 닿을 듯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용 공작은 자신의 손으로 가만히 눈을 눌러 참았다.

“투스…….”

* * *

나는 심각한 얼굴로 눈앞의 조그마한 아기 뱀을 응시했다.

-투스랑 밤에 같이 가 줄 수 있어?

나는 가까스로 입술을 씰룩이지 않으려 애썼다.

현재 나는 식당에서 다시 방으로 돌아와, 내게 배정된 침대 방에 혼자 있는 상황이었다.

‘아빠도 자기 방에 들어가 버렸고, 벨루스도 자기 방에서 나온 흔적이 없었지?’

그러니 마음 놓고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신중을 기하기 위해 먼저 이렇게 물었다.

“응, 같이 가 줄 수 있어. 그런데 한 가지만 물어봐도 돼?”

-응!

“혹시 너랑은 이렇게 말로만 대화할 수 있어? 나도 너같이 머릿속에 울리는 것처럼 대화하기는 어렵나?”

-칼립소도 할 수 있어. 내 목소리 들으니까.

나는 끄덕이고는 시도해 보았다.

-혹시 이렇게 하는 거야? 들려?

투스에게 전한다는 기분으로다가 속으로 외쳐 보았더니, 투스가 반색하며 머리를 살랑 흔들었다.

-맞아, 칼립소 똑똑해!

-맞아, 나 똑똑해.

앞선 회차에서 바닷속에 무언가를 가지러 갔다 반(半)수인을 만난 적 있다.

물속에서 대화는 어렵다 보니, 이런 식으로 대화를 시도한 적 있었는데.

일종의 물의 힘을 응용한 방법으로 투스랑도 가능한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나는 결국 물을 내뿜는 거 말고는 거의 다 할 줄 아는 것 같은데…….’

물의 힘 중 가장 기본인 물을 여전히 생성하지 못한다니.

어째 미적분은 가능하면서 아직도 더하기 빼기 하나 못하는 기분이었다.

-그래, 아까 이야기로 돌아가서 도와 달라는 건 뭐고 공작님한테 데려가 달란 건 뭐야?

식당에서 투스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어찌나 기쁘고 행복하던지.

역시 이 조그만 투스는 내게 행운 덩어리가 틀림없었다!

……드디어 용 공작을 볼 수 있다!

그전에 상황이 궁금하긴 했다.

나는 얼른 물었다.

-용 공작님에게 무슨 일 있는 거야?

대체 무엇 때문에 이 아기 뱀이 홀로 숲을 헤매고 있었으며.

용의 성에 오고도 주인에게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건지.

그러나 투스는 무언가 대답하려다 말고 머리를 홱 치켜들었다.

시선은 커다란 창문을 향한 채였다.

-공작님이 투스를 불렀어!

쉭쉭! 본인은 뱀이 아니라고 주장하더니, 내뱉는 울음소리가 뱀이랑 똑같았다.

곧 순진한 눈망울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공작님, 보고 싶어, 보고 싶어.

-그래그래. 울지 말고. 말해 봐, 응? 도와줄 테니까.

투스가 내게로 다가오더니 내 손에 똬리를 틀고 앉았다.

-투스는 강한 수인이 필요해. 공작님께 가려면 강한 힘 필요해.

-어째서?

-공작님 감시하는 수인, 너무 강해. 치밀해.

나는 눈을 깜빡였다.

용 공작이 감시를 당해? 대체 왜?

‘그럴 이유가 있나?’

-칼립소 약한 줄 알았어. 하지만 아니야. 강해.

-……너 우리 첫 만남에서 보고 나 약하다고 생각한 거야?

-응!

-이거 괘씸한 친구네. 살려 줬더니!

투스의 목을 살짝 잡고 흔들었다.

너 인마, 내가 미사까지 동원해서 호수를 찾아다가 데려다줬더니 날 그렇게 생각해?

‘내가 약해 보여서 말을 못 한 거였다니! 억울해!’

내가 이래 봬도 세 살에 한 반을 평정한 몸인데. 어?

게다가 너랑 처음 만났을 때, 나는 다리를 조금 다쳤다고.

‘그러고 보니 다리는 하루 만이었나, 이틀 만에 나았지? 물의 힘이 강해져서 회복력도 올라간 건가.’

일단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었으므로 나는 투스의 목을 놓아주었다.

-하지만 투스 잘못 생각했어. 칼립소 강해. 몰래 들어갈 수 있어!

-…….

-밤에 함께 가 줄 수 있어? 투스를 데려다줘.

-용 공작님은 왜 감시당하는 거야? 그리고 넌 공작님을 그렇게 좋아하면서 숲에 있었던 거고? 왜 용 공작님은 네가 돌아왔는데도 찾지 않아? 아니, 넌 왜 이 성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데?

-용 공작님은 외로워. 그런데 외로운지 몰라.

질문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답이었다.

-투스는 여기서 더 말할 수 없어.

품 안으로 들어온 투스에게서 단호함이 느껴졌다.

-그래, 알겠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물어봐야 대답해 주지 않을 것 같으니, 직접 확인해 봐야 할 성싶었다.

-출발하는 건 오늘 밤이면 돼?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나는 모든 일을 빠르게 처리하고 싶었다.

식당에서 새빨간 여우 수인이 했던 말을 떠올려 봤을 때.

‘역시, 투스가 말하는 이곳의 상황과 그놈들이 알고 있는 상황이 달라도 너무나 달라.’

게다가 아빠가 첫날 바로 기강을 잡았다고는 하나, 수중 동물 수인에게 배타적인 이곳에서 시종들에게 물어본다고 한들 제대로 알려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역시 직접 가는 수밖에 없지.

나는 투스에게 돌아올 답을 듣지 않고 아예 결정을 내려 버렸다.

-오늘 밤에 가자.

-칼립소!

투스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무룩해하던 표정이었는데, 어느새 얼굴에 빛이 돌았다.

눈빛이 초롱초롱했다.

-빨리 도와주는 거야? 투스 좋아.

그러고 보니 얘는 비늘은 푸른빛인데 눈은 황금 덩어리를 콕 박아 둔 것처럼 예쁜 금색이었다.

‘용 공작도 금안이었지?’

미쳐서 날뛰는 모습을 본 것뿐이지만 똑똑히 기억했다.

자신의 권속처럼 푸른 머리카락과 금안을 가진 남자였더랬지.

-칼립소 좋아해. 고마워.

나는 그저 웃었다.

내게 꿍꿍이가 있는 걸 안다면 순수하게 고마워하진 못할 텐데.

하지만 용 공작에게 해를 끼치려는 건 아니니까.

-그래, 그럼 밤에 출발하자. 길은 네가 잘 아는 거지?

-응! 알아!

좋아, 그럼 오늘 바로 출발하는 걸로.

일이 결정되기 무섭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투스를 방에 내려놓았다.

-칼립소 어디 가?

“아빠한테 갈 거야. 여기 잠시 있을래?”

중요한 이야기를 할 거거든.

내가 이렇게 말하자 투스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내가 앉아 있던 곳에 꽈리를 틀었다.

-다녀와.

애완동물을 키우는 기분이 이런 기분일까.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투스를 보며 기분이 묘해졌다.

……나 뱀을 좋아했구나.

투스는 뱀이라고 할 때마다 자긴 뱀이 아니라 수룡의 권속이니 자기도 수룡이라고 우겼지만.

어딜 봐도 그저 뿔 달린 작은 뱀이었다.

어쩌면…… 투스를 좀 더 오래 알았다면 보내기 싫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는걸.

나는 방을 나서서 커다란 응접실을 지나,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문 앞에 다다랐다.

그러나 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잠그지 않았다.”

어라, 기척을 느낀 거구나.

나는 문을 당기고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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