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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범고래 아기님 (59)화 (59/275)

제59화

할머니가 찡그리며 쯧 혀를 찼다.

차가운 할머니의 일갈에도 아빠는 손등으로 턱을 문지르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어머니께 배웠습니다.”

“뭐야?”

“어머니도 할머니께 이리 행동하지 않으셨습니까?”

“이 새끼가?”

“어머니가 늘 말씀하시듯 물고기 새끼들이 뭘 보고 배우겠습니까. 부모 보고 자랐겠지요.”

와, 대박. 아빠랑 할머니는 이렇게 싸웠구나.

나는 잠시 아빠의 등장 이유에 대한 호기심도 잊고 흥미진진하게 관람했다.

‘팝콘, 팝콘이 필요하다……!’

수하들에게서 할머니 살아생전 유일하게 동등하게 맞먹을 수 있던 존재는 아빠뿐이라는 얘기는 들었는데.

‘원래 싸움은 듣는 거랑 직접 보는 거랑 다르잖아.’

당연히 눈으로 보는 게 훨씬 생생하고 좋다.

그래서 둘이 여기서 싸우는 건가?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소파와 하나 되어 싸움을 기다렸다.

그리고 이렇게 안이하게 생각했다가 금방 후회했다.

‘윽, 잠깐, 잠깐 여기서 물을 꺼내면 어떡해……!’

이 막돼먹은 어른들아!

읍, 숨 막혀.

곧이어 흘러나온 할머니의 거대한 물의 힘에 절로 숨이 막혔던 것이다.

나를 향한 것도 아니었건만 엄청난 압박으로 다가왔다.

‘가문 회의에서 날 압박한 건 압박도 아니었구만.’

물론 알고는 있었지만 상상 이상이었다.

‘나도 이렇게 강할 때가 있었는데…….’

압박을 견디는 한편 가문 회의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시 한번 호승심이 올라왔다.

3회차의 전성기 내 모습으로 마주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할머니뿐만 아니라 이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치는 아빠에게도 투기가 삐죽 샘솟았다.

‘정말 작은 몸이 원망스럽다니까.’

숫제 숨이 막히다 못해 기침이 튀어나올 무렵, 내 목에 서늘한 손이 닿았다.

“그만하시지요. 제 딸을 숨 막히게 해서 죽일 셈이십니까?”

“죽던가 말던가. 네가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썼느냐?”

저 할망구 참. 말을 곱게 하는 법이 없어.

다행스럽게도 아빠의 손이 닿는 순간부터 숨쉬기는 편해졌지만 알 수 있었다.

내 앞에서 물의 힘끼리 치열한 충돌을 하고 있다는 걸.

‘와, 치열하네. 치열해.’

물의 힘은 판타지로 치면 검기처럼 눈에 보이게 드러낼 수도 있었다.

이때 물줄기는 새파란 빛을 띤다.

지금처럼.

다만 푸른색도 푸른색 나름인데, 개인별로 살짝씩 색이 달랐다.

“진심에도 없는 말씀은 그만두시지요. 막 관심을 가진 손자가 사라지는 건 아쉽다고 생각하시잖습니까.”

조용하고 차분한 아빠의 말이 끝나자마자 순간 물의 힘이 더욱 사납게 날뛰었다.

‘으으, 건물 무너지겠다!’

콰르르르!

아니나 다를까 이 생각만으로 끝나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듯이 바닥이 흔들렸다.

여기서 건물이 무너지면 어떡한다, 뛰어 봤자 못 빠져나갈 텐데. 일단 애비가 막아 주겠지?

막다가 쓰러지면 애비를 둘러업고…… 뛰자!

아빠 꼴이 우스워지겠지만 왠지 가능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여기까지 생각한 순간, 일시에 모든 기운이 사라졌다.

나는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할머니의 힘과 아빠의 힘이 서로 부딪치며 쇄도한 탓에 내 쪽으로도 큰 힘이 튀었다.

그런데 내 앞을 가로막은 아빠의 모습이 그걸 모두 막아 준 것이다.

아빠는 내 옆을 짚은 채로 찡그리고 있었는데, 그런 얼굴을 빤히 보다가. 숨을 꿀꺽 삼켰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아빠가 커다란 몸을 천천히 옆으로 치워내자, 할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주변에 서류고 꽃병이고 물건이고 남아난 게 없이 엉망이었건만.

할머니는 그 사이에서 씩 웃고 있었다.

“그건 맞는 말이지.”

“…….”

“오랜만에 제법 마음에 드는 새끼 고래가 나왔는데 내 손으로 그 즐거움을 망칠 수야 있나.”

검푸른 눈동자를 번들거리며 웃고 있었다.

우와, 저때 잘못 건드리면 4회차고 나발이고 이번 삶은 여기서 끝나겠네.

나는 조용히 애비의 옷자락을 잡았다.

“아빠, 나 죽게 두면 안 된다.”

어떻게 용의 축제에 가게 됐는데 죽을 수야 없지.

내 몸이 둥실 떠올랐다.

“그렇게 안 둬.”

“다행이다. 용의 축제에 꼭 데려가 줘.”

“…….”

주변은 물로 엉망이었다.

할머니는 넘어간 소파를 한 손으로 번쩍 일으키더니, 푹 젖은 소파에 손을 가져다 대는 것만으로 모든 수분을 흡수했다.

뽀송해진 소파에 할머니가 털썩 앉았다.

“뭐 해? 앉기나 해라.”

나는 자연스럽게 아빠를 보았다.

곧 물줄기가 넘어진 소파를 일으켜 세우더니 아빠 역시 할머니처럼 소파의 수분을 흡수했다.

나는 거기 앉혀졌다.

오, 뽀송해.

“그래, 여기로 달려온 이유가 뭐냐?”

“달려온 건 아닙니다.”

“땀이나 닦고 말해라. 거지 같은 아들아.”

“…….”

자연스럽게 바라본 아빠의 이마와 목덜미엔 정말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하도 물이 난무해서 물로 착각할 뻔했지만.

할머니가 허튼소릴 하지는 않았을 테고.

‘정말로 여기까지 뛰어온 거라고?’

나는 아빠의 거처와 이 본성 가주의 집무실 거리를 생각했다.

멀었다. 마차를 타고 다닐 만큼 멀다.

그 거리를 그대로 뛰어온 거라고?

에이, 설마. 그건 아니겠지. 거리가 얼마나 되는데.

차라리 달팽이 수인이 덜 느긋하겠다 싶을 만큼 평소에 움직임이 적은 인간이었다.

“들어오기 전에 재미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쥐새끼처럼 훔쳐 들었단 말을 잘도 돌려 말하는구나.”

“어머니더러 사자 새끼들처럼 자기 새끼나 죽이려 하는 모진 맹수라고 하면 기분 좋으십니까?”

“이 새끼가?”

“피차일반이니 육지놈들에 대한 비유는 삼가 주셨으면 한단 말입니다.”

와, 역시 아빠도 육지놈들 혐오자구나.

암, 이건 수중 동물인 이상 당연한 거다.

‘타도 육지놈들.’

그놈들이 얼마나 우릴 핍박했는데.

어쩐지 좋은 공통점이 생긴 것 같아 속으로 끄덕였다.

‘그나저나 애비가 이렇게까지 막 나가도 되는 건가……?’

어째 조마조마한 기분이었다.

아빠가 할머니와 호각을 겨룰 만큼 강한 범고래였다는 소리는 자자하게 들었지만.

‘실제로 본 적은 없잖아.’

소문이란 때로 얼마나 허무맹랑할 수 있는지 너무나 잘 안다.

물론 아주 근거 없는 소리는 아니겠지만.

육체는 나이가 들수록 노쇠하지만 물의 힘은 더욱 강해진다.

경험이 쌓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범고래들을 비롯한 전투형 고래 수인들은 노화도 늦은 편이었다.

할머니는 아마 지금도 전성기처럼 싸울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내 용의 축제는 저 할머니가 승인하는 거라고.’

그러니 자연스럽게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 할머니에게 아빠가 날아가기라도 하면, 내 축제행도 거기서 끝 아닐까.

‘애비야, 그러니까 제발 끈 떨어질 행동은 그만해 주면 안 되겠니.’

한편으로 나는 조금 이상함을 느꼈다.

할머니가 웬만큼 봐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으니까.

어째, 아빠의 건방짐을 즐기는 듯한 느낌이…….

‘잠깐.’

그러고 보니, 저 할머니는 강하면 다 좋아했지?

강하면서 건방진 건 더 좋아하고.

……그 건방진 인간을 자기 손으로 부숴 버리는 것도 좋아했지.

이를 떠올리고 할머니를 보자 아니나 다를까.

할머니의 눈동자로 만족감과 놀잇감을 발견한 맹수 같은 시선이 가득했다.

‘음, 어째 이거 범고래 등에 낀 새우가 되는 꼴이 되지 않으려면 조심해야겠는데.’

나는 슬쩍 아빠의 옷자락을 놓고 자리도 조금 떨어졌다.

아주 조금만.

“그래, 육지의 네발 새끼들에게 비유한 건 심했지.”

할머니는 순순히 인정하고는 다리를 꼬았다.

그러고 보니, 아빠가 조금 전에 이야기를 모두 들었다고 했나?

“허겁지겁 달려와서는 들어오지 않고서 무얼 하나 궁금했더니. 그래, 게으른 네놈의 흥미도 이끌 일이더냐?”

할머니가 소파 손잡이에 느긋하게 팔을 늘어트리며 말했다.

“너라도 네 새끼는 예쁘더냐?”

“…….”

아빠가 대답이 없자, 할머니는 등을 떼어 내며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 좋아. 이미 다 들었다니 네게도 물어보지. 저 꼬맹이가 판단을 요청한 일을 두고 나는 처벌이 마땅하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그 하녀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죽여야죠.”

“음?”

마지막 말은 나였다.

으응? 죽여?

‘아니, 뭐…… 몇 명의 아기를 죽였는지 알 수 없으니, 그래도 싸다고 생각하지만.’

일단 조사라도 먼저 해 보는 게 먼저 아니야?

아무리 지구랑 여기는 다르다지만, 엄, 용의자라도 자기 방어권을 줘야 하는 것 아닌가.

‘아, 물론 고통 준 만큼 맞든지 벌을 받든지 그건 당연하지만.’

잘은 모르겠지만, 아빠의 단호한 대답이 할머니 마음에 쏙 든 것 같았다.

“좋다. 그럼 가주의 권한으로 이 전임자의 처분은 네게 넘겨주지.”

“감사히 받겠습니다.”

전임자가 처벌을 받는다니, 좋은 일이긴 한데.

“저어, 따로 조사하거나 조사단 같은 걸 꾸리지는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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