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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범고래 아기님 (57)화 (57/275)

제57화

아게노르도 아빠한테 관심이 없다지만 최소한 아버지라고는 부르던데.

벨루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난 아빠 없어.”

오.

……첫째놈 패륜 오졌다.

‘하지만 이해는 해.’

아빠가 우리한테 해 준 게 없다.

다른 큰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자식들 보호다 세력 키운다 뭐다 할 때 어땠던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방관하고 뭘 하든 무시한 게 다였다.

첫째인 만큼 당연히 우리보다 더 나이가 많으니 방치당한 세월도 길 터였다.

“자꾸 주제가 빙빙 도는 것 같은 데다가, 시간만 가니까 그냥 말할게.”

“…….”

“널 관찰하고 싶어.”

“왜?”

“그냥.”

벨루스의 얼굴로 처음으로 생기 같은 것이 어렸다.

“때에 따라서 널 지지하고 싶으니까.”

“뭐?”

나는 순간 벨루스의 냉막한 인상 아래로 선량함 같은 것이 함께 떠오르는 모습을 보았다.

‘내가 지금 뭘 떠올린 거야?’

눈이 삐었나? 벨루스와 선량함이라니 지나가던 멸치가 웃을 일이다.

“가문 회의에서의 널 꽤 인상 깊게 봤어. 적어도 난, 너와 같은 나이였을 때 그 정도의 일은 못 했을 것 같거든. 그래서 한 번 더 보고자 온 거야. 내가 지지할 만한 상대인가, 하고.”

거짓말, 이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저놈 새끼가 날 지지해?’

해마가 앞구르기를 한다고 해도 이것보단 믿길 터였다.

참고로 쟤는 앞선 회차에서 나랑 싸우다 안면이 깨질 때까지도 항복하지 않던 놈이었다.

항복 또한 승복해서 한 게 아니다.

깨지고 또 깨지다 돌연 변덕을 부려 항복한 것에 가깝다.

나는 벨루스의 가주를 향한 어마어마한 집념을 아주 잘 기억하고 있다.

평소 제일 침착하고 냉정한 인간이지만 한번 눈 돌아가면 나도 벅찰 정도의 미친 인간이었으니까.

원래 평소에 조용하던 놈이 눈 돌아가면 더 무섭다고 하던 말에 딱 걸맞은 놈이었다.

나는 당황하는 대신에 살짝 웃었다. 하고 싶은 말도 많았지만 차분하게 정리했다.

“그렇구나. 오빠.”

태연하게 대꾸하며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벨루스의 손을 덥석 잡았다.

놈은 흠칫하긴 했지만 뿌리치진 않았다.

“사실.”

나는 최대한 화사해 보이도록 할 수 있는 한 활짝 웃었다.

“나도 오빠랑 친해지고 싶어.”

목소리도 부드럽고 나긋하게.

아주 잠시지만 내게 잡힌 첫째놈의 손이 살짝 떨렸다.

놈의 표정 또한 찰나 묘해졌다.

“그리고 있잖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잠깐 귀 좀 빌려 줄 수 있어?”

벨루스는 찌푸리면서도 천천히 상체를 숙여 내게 귀를 빌려 주었다.

나는 까치발을 들어 놈의 귀에 입술을 바짝 붙이고는 순간 씩 웃었다.

“어디서 눈에 빤히 보이는 헛수작이야, 첫째야.”

나는 발을 내리고서 놈에게서 한 발짝 떨어진 뒤 고개를 들고 생긋 웃었다.

첫째야, 네 꿍꿍이를 모를까.

“때에 따라 날 지지한다고? 정말이야?”

“……맞아. 그런데?”

“그럼 그 말, 바다의 맹세를 걸고도 할 수 있겠네.”

오동통한 팔로 팔짱을 끼려고 노력하며 비웃었다.

못하지? 못하지? 이 시키야.

어디서 이빨도 안 들어갈 뻥을 치고 있어.

“……영악하네.”

“뭔 소리야. 되지도 않는 수작은 누가 부렸는데.”

그 순간 내게로 부웅 주먹이 날라왔고, 나는 기다렸다는 듯 회피한 다음 손목을 잡았다.

“네 수가 얕다는 소리잖아. 지금 이 공격처럼.”

“공격 아니야. 그저, 여동생을 쓰다듬어 보려 한 거지.”

“웃기시네.”

그러나 벨루스는 바이얀 놈이랑 달랐다.

내게 손목을 잡히기 무섭게 물 흐르듯 힘을 빼며 빠져나간다.

나는 속으로 쯧 혀를 찼다.

차분하고 신중하게 말을 잇다가 주먹을 뻗은 걸 보면, 역시 이놈도 아직은 어린애구나 싶었다.

내가 아는 ‘벨루스’는 더욱 철저하고 금욕적인 인간이었으니까.

그나저나…….

‘나이 차이가 문제야. 나이 차이가!’

첫째놈과는 리치 차이가 아주 심하게 났다. 아주 심하게.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뒤로 살짝 피했다.

내가 있던 자리로 물줄기가 촤악 흩어졌다.

공격은 아니었다는 듯 물줄기는 웅덩이를 만들고는 사라졌다.

“그건 그렇네. 확실히 되지도 않는 수작 같았겠어.”

벨루스는 아무렇지 않게 수긍했다.

“그렇지만 난 오늘 대화를 하러 온 게 맞아. 겸사겸사 싸울 기회가 있다면 좋았겠지만, 네가 나보다 약하다면 그대로 끝이었겠지. 일방적인 폭력엔 관심 없어.”

“…….”

“다만, 지금은 조금 진심으로 궁금해졌어.”

“뭘 궁금해해. 오늘 그냥 마지막으로 보자?”

이젠 대화도 하기 싫어진지라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걸음을 더 물렸다.

그러나 벨루스는 내게 잡혔던 손을 폈다가 쥐었다가 다시 펼쳤다. 이내, 살짝 웃었다.

“올해 용의 축제에 가지?”

빈틈을 찾던 그대로 멈칫했다. 뭐?

“난 할머니랑 사이가 꽤 가까워. 할머니께서 보고를 들을 때 옆에 있었거든.”

나는 눈을 끔뻑이다 말고 흠칫했다.

잠깐만, 잠깐만. 저거…….

“음, 네게 흥미가 생겼어. 내가 졌어. 널 진심으로 따르고 싶어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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