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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범고래 아기님 (56)화 (56/275)

제56화

신기한 점은 유려하게 생겼으면서도 묘하게 소녀처럼은 보이지 않는단 점이었다.

그건 그렇고 쟤가 왜 여기 있냐.

놀랍게도 벽에 기댄 자세를 바로 하는 걸로 봐서는 나를 기다렸던 눈치였다.

저놈이 날 왜 기다려?

하지만 저놈이 초급 기관에 다른 볼일은 없을 테니.

나를 찾아온 게 맞는 것 같은데.

“일단 미리 확인하는 건데, 날 찾아온 거야?”

“맞아.”

“날 왜?”

“대화가 하고 싶어서.”

단출한 질문에 단답이 돌아왔다.

나는 찌푸리면서도 복도를 슬쩍 보았다.

애들은 모두 하교한 뒤라 복도에는 사람이 없었다.

“무슨 대화인지는 몰라도 짧게 해. 용건이 뭔데?”

“…….”

바로 직전 회차라면 모를까, 이번 생에서는 크게 만날 이유가 없는 상대였다.

사실 일주일 전 가문 회의에서만 해도 저놈의 인성을 고쳐 주고 갈까 싶었지만.

용의 축제에 갈 수 있게 되면서 폐기해 버린 계획이었다.

‘능력 좋은 놈이니 잘살겠지, 뭐.’

게다가 일이 잘 풀려 내가 이대로 용 공작 집에 눌러앉아 돌아오지 않으면 첫째 입장에서도 이득이었다.

‘아마 이번 생의 가주는 아게노르나 저놈이 하지 않을까?’

벨루스는 차가운 얼굴이었지만 나를 빤히 보다가 조금 이상하단 표정을 지었다.

“……왜 전투 자세지?”

“대화하자며?”

“그런데?”

“네 대화는 말로 하는 대화가 아닐 거 아니야.”

내가 쟬 모를까.

벨루스가 저렇게 생겼지만 얌전히 대화를 하는 놈은 아니었다.

“덤벼.”

내 첫째 오빠는 형제들 중에서 가장 신중한 인간이었지만.

‘쟤가 움직인다는 건 확실하게 이길 자신이 있을 때. 혹은 확실하게 상대를 조질 자신이 있을 때.’

벨루스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아닌데.”

음? 저건 어이없는 소리를 들었다는 표정인데.

“칼립소 아콰시아델. 애초에 이런 훤한 대낮에 복도에서 네게 싸움을 걸 리가 없잖아.”

“거짓말. 전투야 어련히 장소만 옮기면 되지.”

나는 불신으로 가득한 눈을 한 채 살짝 찡그렸다.

“네가 싸우러 온 게 아니라고? 넌 확실할 때만 움직이잖아.”

“마치 날 잘 아는 듯한 말투네.”

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모아 보면 이 저택에 널린 게 대단하신 첫째의 정보일 텐데 뭐가 어렵겠어?”

“확실히 그건 그렇지.”

벨루스는 팔짱을 꼈다.

나는 저것이 그리 좋은 신호가 아님을 깨달았다.

팔짱을 낀다는 건 저놈이 심기가 불편할 때 하는 행동이니까.

‘지금의 나는 벨루스에게까지 통하는 수준인가?’

발을 한 발 뒤로 빼며 여차하면 선빵을 날릴 준비를 했다.

선빵 필승! ……이 저놈에게도 통할지 모르겠으나, 장소는 반드시 여기여야 한다.

‘장소는 이동하면 안 돼. 바이얀의 처벌을 본 저놈이 여기서 덤빌 리가 없지.’

다행스럽게도 이곳은 복도였다.

바이얀 때와 마찬가지로 싸움이 일어나면 전적으로 저쪽이 불리했다.

‘온다면 밤에 오지 않을까 싶더니, 이렇게 대놓고 찾아올 줄이야.’

그렇다는 건, 나를 어디론가 데려갈 가능성이 더 크다는 이야기다.

‘목덜미부터 조심해야 하려나.’

“오해하는 것 같은데, 난 정말 싸우러 온 게 아니야.”

“거짓말. 넌 지금 심기가 불편하잖아?”

“……어떻게 그걸 안 건진 모르겠지만.”

벨루스가 가늘게 눈을 좁혔다.

동시에 벨루스 옆으로 물줄기가 흘러나와 살랑살랑 움직였다.

“심기가 불편한 게 아니라 네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내 소문을 들었다기에 알 줄 알았는데? 나는 중급 기관에서 얌전한 모범생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니까.”

“…….”

내가 입을 다문 건 긍정해서가 아니다. 황당해서지.

……네가 모범생이요? 차라리 범고래가 초식을 한다고 주장해라.

“심지어 나는 걸려 오는 싸움이 아닌 한, 쓸데없는 전투도 한 적이 없는데.”

얇았던 물줄기가 굵직해지고, 동시에 더 많은 물줄기가 확 튀어나온 건 순식간이었다.

“내가, 전투를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나는 경악했다.

‘미친, 저놈 지금 물줄기를 몇 개나 만든 거야!’

물의 힘은, 물줄기를 동시에 몇 개나 만드느냐에 따라 힘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었다.

적어도 저놈은 절대 같은 나이 대의 수준은 아니었다.

웬만한 성인은 이미 씹어먹겠네.

“범고래 중에 싸움 싫어하는 놈이 어딨어!”

“으음, 처리한 놈 중에서 입을 놀린 놈이 있었나? 누구야? 그렇게 두들겨 맞고도 혀를 놀린 게.”

……이놈 이거 줄줄 읊는 거 보게.

이건 들으란 듯이 읊는 거다.

‘내가 잘못 건드렸네.’

저놈이 모범생 어쩌고 하는 순간엔 당황했지만 차차 깨달았다.

적어도 현재의 벨루스는 내가 알던 그놈과 같은 성격이 아니었단 걸.

내숭 떨고 있는 줄 어떻게 알고 있었겠냐고.

나 또한 이전 회차에서 우연히 들었던 이야기가, 벨루스가 교육 기관에선 얌전했단 소리였는데.

그게 내숭 떨며 지냈단 소린 줄은 몰랐지!

“뭘 누구긴 누구야. 투기나 지워. 이사장을 불러올 셈이야?”

“…….”

보아하니 아직은 사람을 죽이진 않은 것 같은데.

뒤에서 뭔가 다 하고 다닌 건 알겠다.

대체 뒤에서 뭔 짓을 했길래 바로 급발진하는 건지.

“지금의 난, 전투를 좋아하지 않아서 할머니에게도 이것만은 재미없는 놈이라고 소릴 듣는 사람이야.”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그 순간 벨루스의 머리를 살랑 흔들게 만들던 물줄기가 일시에 사라졌다.

“너랑 싸울 생각 없다는 건 진심이란 소리지. 바이얀과 같은 실수를 할 만큼 멍청하진 않아.”

“네가 갑자기 목덜미라도 채가서 아무도 없는 곳에서 때릴지 누가 알아?”

“확실히 그런 생각을 하긴 했는데…… 신기하네.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하네?”

“뭘 또 인정을 하고 있어. 미친놈이.”

“그런 말은 처음 들어 봐.”

벨루스가 예쁘장하고 냉막한 얼굴로 대답했다.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대꾸했다.

“대화가 짧진 않을 것 같은데, 계속 그렇게 긴장할 생각이야?”

“나는 확실하지 않은 건 아무것도 안 믿어. 대화할 거면 할 말이나 하고 꺼져.”

내가 여기서 꼼짝하지 않을 거란 사실을 눈치챈 건지 벨루스는 반보 정도 뒤로 물러났다.

“좋아. 바이얀이 이렇게 된 게 내게는 절호의 기회라 허튼짓을 할 생각이 없다는 걸 말하고 싶었는데.”

“그럴수록 라이벌을 더 제거하고 싶은 건 아니고?”

“…….”

“내가 아직 약하고 만만한 때겠다. 네가 나보다 강할 때 영구 손상을 입히든 죽여 버리든 미리 눌러 놓으면 이득이잖아.”

벨루스가 살짝 놀랐다.

“놀랍네. 확실히 백부와 숙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다.”

벨루스의 얼굴로 희미하게 미소가 스쳤다.

“그리고 나도 그렇게 생각해.”

저저, 미친놈. 본성 드러내고 웃는 것 보게.

나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자기소개 잘 들었고. 여기서 덤비면 너만 X되는 꼴인 걸 가문 회의에서 잘 봤을 거야, 보내 줄 테니까 가.”

“하지만 난 진심으로 네게 관심이 있어서 온 거야. 칼립소 아콰시아델.”

“관심? 나한테?”

이렇게까지 말하니 진짜인가 싶기도 했다.

그렇지만 조금 전에 살인 및 폭력 예고를 해 놓고서 관심이라니.

퍽도 호의적으로 들리겠다.

벨루스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대신에 이번엔 차분한 표정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여기서 뭐라도 하나 부수면 라일라든 선생이든 부를 수 있으려나.’

조금 전 물줄기로 눈치챈 건데.

내가 아무리 뛰어남을 증명해 봐야, 저놈 입장에선 아직 물줄기도 만들지 못한 피라미다.

아마 이빨에 낀 성가신 이물질 정도로나 여기지 않을까?

성가시지만 아직 치울 수 없다면 인내하는 정도.

한편으로 언제든 치워 버릴 자신이 있는 것.

그렇기에 나는 벨루스가 진정 관심을 가진 쪽은 내가 아니란 걸 쉽게 눈치챘다.

“그 관심 달갑지 않으니까 다시 가져가. 그리고 대화도 할 생각 없어.”

“왜?”

“네가 진정으로 관심 있는 건 내가 아니라 아빠잖아.”

앞선 회차에서 벨루스는 내 부하가 된 뒤로도 늘, 한 가지를 아쉬워했다.

“최강이라던 그 사람과 싸워 보지 못해서 아쉬워. 늘 붙어 보고 싶었거든.”

“누구?”

“피에르 아콰시아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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