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화
“그러지.”
호기롭게 던진 주제에 곧이어 산뜻하게 답이 흘러나와서 나는 흠칫 놀랐지만.
이내 활짝 웃었다.
“들어줄 테니 너도 잊지 말도록.”
아빠가 내 손을 살짝 잡아당겼다.
“네 분이 풀리고 내가 네게 인정받는 그때에. 그 호칭은 집어치워야 할 거다.”
방금 저 눈이 잠시 맛이 갔던 것 같았는데.
‘……아게노르랑 비슷했어.’
아주 잠깐, 아빠도 역시 범고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 *
“용의 축제, 나 여기 데려가줄 수 있어?”
칼립소는 몰랐겠지만, 이 말을 입에 담은 그 순간.
칼립소의 두 눈은 적어도 피에르가 보았던 그 어떤 순간보다 찬란하게 빛났다.
그 순간 피에르는 알아차렸다.
여태까지 이 조그마한 딸이 단 한 번도 내비치지 않았던 속내 한 가지를 처음으로 내보였단 사실을.
그것의 이름은 기대였다.
샛별처럼 기대로 반짝거리는 시선.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동시에 피에르에게 한 가지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내게 기대한 순간이 없다는 거군.’
이제는 피에르 또한 차차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과연 정말 세 살 난 아이가 이럴 수 있는 건가?
자신의 어린 시절도 평범하지는 않았지만 기대 없이 살아온 것은 아니었다.
‘같은 범고래, 저보다 나이가 많은 상대와 패싸움에서 이기기란 여간 쉽지 않은 일이다.’
대단한 재능과 가주를 앞에 두고 보이는 배짱, 아이답지 않은 처세.
타고난 싸움꾼이기까지.
다양한 호칭을 확보했으면서도 오만하기는커녕 기대조차 없는 모습.
가끔 모든 것을 체념한 자신과 비슷하거나 자신보다 더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칼립소를 관찰하다 보니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아이는 미묘하게 균형이 맞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오늘 최고 징계위에 자신이 나타났을 때엔 어땠던가.
정말 유령을 본 듯한 얼굴이었다.
단 1퍼센트의 기대조차 없었다는 듯이.
피에르는 다만, 그 순간을 기억했다.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