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화
“아니?”
걔네들이랑 안 마주치려고 묻는 건데?
난 가주 생각 없다니까.
혜성 같은 인재로 살다가 열 살에 용 공작에게 튈 거야.
그러거나 말거나 일리아는 웃는 그대로 신중하게 말했다.
“아무튼 간에 이렇게 되었으니, 칼립소 님께서 무너지시면 저희도 무너집니다.”
“…….”
“하지만 칼립소 님께서 가주가 되신다면 모든 걸 얻겠지요.”
들을수록 더욱 이상했다.
결국 이 선택권이란 건, 보통의 가문들이 후계를 지지하는 것과 차원이 다른 문제라는 소리다.
‘도박으로 치면 올인(All-in)이잖아?’
심지어 보통 가문들이 안 되겠다 싶으면 지지하는 후계를 바꿀 수 있는 것과 다르게.
이들은 한 번 선언하면 바꿀 수조차 없단다.
지지한 후계가 잘못되면 같이 가라앉는단 소리다.
그리고 저 흰돌고래 가문은 지금 침몰이 예정된 배에 자신의 전 재산을 건 셈이었다.
나는 너네가 잡은 주식이 휴짓조각이라는 것을 어떡하면.
‘충격이 덜하게 알려 줄 수 있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너무 걱정하진 마십시오. 저희는 돌고래 가문과 친하니 이들과도 함께 자리를 마련하려 합니다. 괜찮으실까요?”
돌고래란 이야기를 듣자마자 씁쓸함이 몰려왔다.
저 돌고래 사이에는 내 과거의 인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회차에선…….’
아니, 걔도 만나긴 만나야 하는데.
그 돌고래 수하는 가주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만나야 할 이유가 있긴 했다.
“……도대체 뭘 믿고 그런 선택을 한 거야? 공표는 더 고민해 봐도 좋았잖아.”
“아, 그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황할 줄 알았던 일리아는 그저 웃기만 했다.
“제 아이는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저희는 짝짓기를 잘 하지 않는 수인들이라, 아이들을 잃었다면 다음은 없었겠지요.”
“무슨 말이야, 로바는 목숨에 지장이 없다고 했는데?”
“아. 그것 말입니다. 로바가 공녀님을 생각해 선의의 거짓말을 했더군요. 반려를 대신해 깊이 사죄드립니다. 하지만 지금은 많이 회복되어서 생명에 지장이 없습니다.”
일리아의 말인즉 이러했다.
막 루가를 데려왔을 때 루가는 뒤늦게 공황으로 인한 발작이 와서 정말로 목숨을 잃을 뻔했다고.
“미리 말을 하지 그랬어? 그랬다면…….”
그 말을 듣는 순간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새끼의 처벌이 고작 그 정도로 끝나게 두지 않았을 거야.”
“…….”
일리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서 나를 보았다.
말려 올라간 입꼬리로 만족감이 스몄다.
“어떡하겠습니까, 차기 벨루가 가문의 가주가 이렇게나 생각해 주시는 후계자님 아니면 안 되겠다는데.”
“…….”
“사실 저희는 선택권이 주어졌지만, 크게 긍정적이진 않았습니다. 이번 세대에 우수한 후계자께서 많은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누가 범고래가 아닌 고래와 이 중에서도 약한 개체까지 생각해 줄까요? 나아가 더 약한 수중 동물들은?”
“…….”
“여기 피에르 님께서도 계시기에 조심스럽지만, 저희는 범고래님들이 도덕과 선에 대해 인지하고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아니, 정확하게는 알지만 거추장스러워하고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쯤은 모두가 알고 있겠지요.”
아니, 뭐가 조심스럽단 거야. 전혀 조심스럽게 얘기하고 있지 않잖아.
‘조용한 곳으로 오길 잘했지.’
저건 호전적인 범고래가 들었다면 가만있지 않을 소리였다.
“저도 어미이다 보니 자식들에게 약해질 수밖에 없더군요.”
“…….”
“마치 오랫동안 칩거하셨던 피에르 님께서 딸을 위해 신념까지 잠시 제쳐두시고서 오늘 이 자리에 나선 것처럼 말입니다.”
이번 말은 마치 장난인 듯 덧붙였으나 눈빛만은 진지했다.
“저기, 내가 세 살이란 건 알고 있는 거지?”
“그런 정보도 없겠습니까.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는 머리만은 잘 돌아가는 수인들이니까요.”
“아니, 그러니까. 나이가 어린 후계자가 이 구도에서 불리하다는 것쯤은 계산이 될 거 아니야.”
“하지만 그 한계를 오늘 부순 것이 바로 공녀님 아니셨습니까?”
의도하지 않았다곤 하나 누구보다 화려하게 데뷔한 사람으로서 할 말이 없긴 했다.
사실이었으니까.
일리아가 싱긋 웃었다.
“말씀드렸듯 차기 벨루가 가주들이 공녀님 말고는 안 된다고 하는데 어떡하겠습니까? 이미 제 아이들은 벨루가 수인 모두가 인정하는 다음 가주랍니다.”
“……웃으면서 그런 말 하지 말아 줄래? 고작해야 이제 막 인정받은 세 살짜리에게 바라는 게 많아.”
내 삐딱한 타박에도 그녀는 웃음이 스며 올라간 입꼬리를 그대로 둔 채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저희가 지는 도박을 한 것인지, 원석을 미리 알아본 것인지는 시간이 알려 주겠지요. 모쪼록 저희는, 앞으로 최선을 다해 칼립소 님을 보좌할 예정입니다.”
“아니, 괜찮아.”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아니, 괜찮다니까?”
일리아가 박수를 쳤다.
“아, 다른 일곱 개의 가문이 어딘지 알려드릴 순 없지만. 힌트는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 잔머리 정도는 저희가 돌아갑니다.”
……괜찮다니까?
그러나 내가 무어라 하든 저기 계신 귀여운 얼굴의 단호한 루가루바 어머님께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결국 돌아가는 두 부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고민했다.
‘아게노르를 가주로 세워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몸이 살짝 흔들렸다.
문득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보니, 어느새 주변 배경이 움직이고 있었다.
아빠가 조용히 걷고 있었다.
“…….”
갑작스럽게 찾아온 침묵에 나도 입을 꾹 다물었다.
피하고 싶었지만 이 순간이 찾아왔구나.
‘어쩔 수 없지.’
아빠 또한 이 분위기를 느낀 건지.
“우리 어디 가?”
잠시 눈을 돌려 날 향했다.
“집으로 돌아가지.”
집. 기분이 묘해진 건 물론이었다.
그렇게 말하면…….
꼭 우리 집 같잖아.
아빠의 거처로 돌아오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 걸음으로는 한참 걸렸을 텐데.
역시 몸이 크고 작은 건 차이가 컸다.
‘빠르게 성장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빠가 나를 내려주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여기서부터 시작이란 기분이 들었다.
“너와 난 할 이야기가 있겠지.”
아니나 다를까.
아빠가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에휴, 이제 피하기는 글렀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
“글쎄, 일단 호칭 이야기부터 해야겠군.”
조금 놀랐다.
당연히 왜 나를 속였느냐고 화를 내거나 추궁부터 할 줄 알았으니까.
아빠의 표정은 언제나처럼 세상만사에 관심 없다 싶은 무표정이었지만.
이 안 어디에도 분노나 화는 보이지 않았다.
……이게 더 이상했다.
‘왜?’
그렇기에 나는 순순히 이실직고 털어놓는 쪽을 선택했다.
“호칭이라면 뭘 말하고 싶은 건데? 내가 아빠인 걸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있었던 거나. 아빠 몰래 이런저런 소문을 퍼트린 거부터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내가 일부러 힘을 주어 속였다는 말을 했지만 아빠의 표정에 동요는 없었다.
“내가 아빠를 속이고 기만했다는 걸 지적하고 싶은 거지?”
“…….”
다시 한번 강하게 말해 봐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아빠는 내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나를 빤히 보며 다른 말을 툭 뱉었다.
“그럼 너는 내가 네 아빠인 줄 알고 있었나?”
“……맞아.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이렇게 말하면 의도적인 접근이었단 걸 인정하는 셈이지만.
어떡하겠나. 지금은 어설프게 속이느니 그냥 솔직하게 나가는 쪽이 맞았다.
저 아빠는 녹록한 사람이 아니었다.
“……어떻게?”
“어떻게 몰라. 아빤데.”
피에르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나는 이미 오늘을 계기로 아빠와의 관계가 어떻게든 변화가 있을 거란 사실을 받아들였다.
최악의 경우엔 더는 얼굴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럼 열 살이 될 때까지 누굴 보호자로 삼아야 하지.’
아마 오늘 지나치게 얼굴을 알려 버렸으니.
‘분명 수도 없이 암살 위협에 시달릴 거야.’
정식으로 직계손 인정을 받았으니, 큰아버지며 작은아버지의 세력들이 벼르다 못해 달려들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어쩌면 벨루스가 나설지도 모르지.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번 패싸움으로 알게 됐다는 거다.
‘어디 가서든 맞고 살진 않겠구나!’
아빠가 나를 단련시켜 준 덕분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론 문제가 없진 않았다.
바로, 여전히 내가 세 살이라는 점이다.
무슨 말이냐.
‘체력에 한계가 있어.’
그렇다. 아무리 날고 기고 애들까지 팰 수 있어도, 성인 다수를 상대하는 것이 가능할까. 하면 무리가 있다.
‘아빠랑 보지 못하게 되면, 거처도 본성으로 옮겨야 할지도.’
여기까지 생각하는 동안에도 아빠는 여전히 침묵하고 있었다.
내 등 뒤로 식은땀이 맺힐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