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화
칼립소는 그러려니 했다.
이전 회차에서도 벨루스는 저 모양 저 꼴이었으니까.
확실히 알 수 있긴 했다.
역시 우리 오빠 새끼들에겐 가족애란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고.
‘내가 이 저택 떠나기 전엔 저 인간 인성도 고치고 가든가 해야지.’
저 악랄한 주둥이는 앞선 회차에도 똑같았다.
게다가 벨루스는 세 오빠 중에서도 마지막까지 꺾이지 않던 놈이었다.
아주 치열한 싸움 끝에야 마지막으로 무릎을 꿇고 충성했던 오빠였다.
‘어휴, 제일 성가신 상대였어.’
칼립소는 앞선 회차를 떠올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간간이 할머니의 웃음소리가 들려 오는 걸 보아선 저놈은 이미 가주에게 제대로 눈도장을 받은 듯했다.
‘어휴, 저놈 저거 지 성질 죽이고 지느러미 흔드는 것 좀 보게.’
사실 내가 벨루스 쪽으로 향한 것엔 이유가 있었다.
쉬는 시간이 되면서 아빠의 시선이 강하게 내게 꽂히기 시작했는데, 아직은 마주 볼 자신이 없던 것이다.
아니다. 자신이라기보다는, 조금 전 상황을 소화할 시간이 필요했다.
게다가 주변을 서성이기 시작하는 가신들이며 회색 머리의 범고래 방계들도 신경 쓰였다.
‘말 한번 걸어 보고 싶다는 모습들이네.’
내게는 익숙한 모습이었다.
이전 회차에서 가주이던 시절 질릴 정도로 보았으니.
이상한 것은 쉬는 시간이 되었는데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지 않는 일리아의 모습이었다.
생각에 깊이 잠긴 표정이라 나도 따로 말을 걸진 않았다.
그녀의 남편인 로바 또한 나와 눈이 마주치면 싱긋 웃을 뿐이었다.
“아게노르.”
“응? 응? 와, 여동생님 저것 좀 봐. 쟤네, ‘콰이르’ 가문인데, 이쪽을 집요하게 쳐다보고 있어. 말 걸고 싶은가 봐. 아, 쟤네는 방계 중에서도…….”
“알아, 방계 중에서도 꽤 높은 서열인 가문이잖아.”
“알아? 이것도 알아?”
아게노르의 눈이 더욱 초롱초롱해지는 동시에 짙어졌다.
어후, 이 셋째 오빠 놈은 왜 갈수록 눈에 집착이 심해지고 있어.
“그보다 궁금한 게 있는데.”
“응, 뭔데?”
“아틀란은 어딨어?”
쉬는 시간이 되어 찾아봤지만.
여전히 첫째 줄 어디에도 둘째 오빠인 아틀란은 보이지 않았다.
이상했다.
불참은 할머니 눈 밖에 나겠다는 거나 다름없을 텐데?
“응? 어디 있긴, 저기 있잖아.”
하지만 놈이 앉을 만한 자리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는다.
곧 아게노르가 천진하게 한곳을 가리켰다.
그곳은 세 번째 단이었다.
거기서 이제야 부스스 일어나는 한 소년이 보였다.
범고래 직계의 머리 색인 검은 머리칼과 흰색 반점이 도드라지는 머리카락.
더럽게 사나운 눈매는 졸음을 담고 있었다.
그 아래 끔뻑이는 붉은 눈동자.
분명 아틀란이었다.
‘뭐야, 쟤는 왜 저기 앉아 있어?’
내가 알던 대로라면 저놈이 저 자리에 앉아 있을 리가 없었다.
“말도 안 돼……. 왜 저기 있어?”
아틀란은 세 오빠 중에서도 제일 호승심과 승부욕이 강한 놈이었다.
특히나 남을 이기고자 하는 경쟁, 가주 경쟁에 누구보다 열성을 다했던 놈이기도 했다.
그런 놈이 현재 저 자리라고?
지 자존심에도 절대 앉지 않을 텐데?
“아. 자리? 음, 처음부터 저기는 아니었는데. 능력이 괜찮으면 뭐 하겠어. 회의 시간에 졸다가 할머니 눈 밖에 났는데.”
……뭐? 이 무슨 범고래가 초식하는 얘기냐.
의문이 가득했지만 더 물을 시간은 없이 회의가 재개되었다.
그리고 나는 당장 회의에 집중할 수 없게 되었다.
“존경하는 가주님. 안건을 시작하시기 전에 이 미천한 가신이 조심스럽게 한 말씀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회의가 다시 시작함과 동시에 지금까지 생각에 빠져 있던 일리아가, 제 자리에서 손을 들었다.
막 할머니가 회의 개시를 외친 순간이었다.
“무엇이지?”
할머니는 언짢은 기색을 보이면서도 응대해 주었다.
……이상한데.
할머니가 묘하게 흰돌고래 가주에게 유하다.
‘잘못 느낀 게 아니었어.’
이미 쉬는 시간이 끝나기 전에 일리아는 인사와 함께 돌아간 지 오래였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한 것인진 모르겠지만, 내게 ‘다시 보자’는 인사를 남기고 자리로 돌아갔다.
‘사실 나는 처벌이 마음에 안 들어서 화가 난 건가 했는데.’
솔직히 자식이 얻어터지고 왔는데, 부모 입장에서 가해자가 어떤 처벌을 받든 성에 차기나 할까.
게다가 루가루바의 부모는 아이들을 매우 사랑하는 부모처럼 보였다.
“기회를 주신 것에 대단히 감사드리며, 신성한 회의에 누를 끼쳐 사죄의 말씀 또한 함께 드립니다.”
“부산스러운 말은 됐으니, 할 말이나 하거라.”
“예, 가주님.”
일리아는 절도 있게 인사를 올리더니 슬쩍 고개를 돌렸다.
왜 나를 보는 거지?
“가주님께서는 오래전 저와 제 반려. 그리고 흰돌고래 가문에 은혜를 베푸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단 한 번, 너희의 선택을 존중하겠다고, 말입니다.”
선택? 나는 눈을 깜빡였다.
슬쩍 아게노르를 보았지만 고개를 내저었다.
다시 아빠를 바라봤지만, 언제나와 같은 모습이었다.
오히려 흘끗 시선을 주며 짤막하게 타박이나 건넸다.
“집중해라.”
“……아빠는 지금 무슨 얘기가 나올지 아는 거야?”
그러자 푸르른 시선이 나를 빤히 담았다.
“가주가 가신에게 주는 ‘선택’. 떠오르는 것이 없나?”
“아, 설마?”
설마…….
내 놀란 표정과 거의 동시에 일리아의 말이 들려 왔다.
“저희는 선택하려 합니다. 제가 이끄는 벨루가 가문은, 앞으로…… 저기 계신 칼립소 아콰시아델 공녀님을 따를 것입니다.”
사실, 이 가문 회의에서 정식으로 직계로 인정받는다는 건 자연스럽게 후계 경쟁에도 이름을 올린다는 소리다.
물론 모두가 가주가 될 수는 없으니, 결국 상위 후계자들만 치열하게 경쟁하는 셈이고.
나머지는 그저 후계 경쟁에 이름만 올린 수준.
뒤로 갈수록 직계들도 각자가 선택한 후계를 주인으로 모시기 마련이었다.
앞선 회차에서 끝내 굴복하고 충성을 맹세했던 내 오빠들처럼.
“저희는 저분을 후계자로 지지하는 바입니다.”
가문 회의에서 이처럼 가문이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일이 있었다.
나 또한 앞선 회차에서 가문으로 돌아왔을 때 보았던 광경이기도 했다.
“저희 모든 돌고래 가문을 대표하는 저, 돌고래의 수장은 칼립소 님을 후계자로 지지하는 바입니다.”
3회차, 나와 가장 가깝던 수하를 꼽으라면.
내 책사이자 오른팔 집사와 가끔은 시종 노릇까지 했던, 한 수인을 말해야만 했다.
돌고래 수인. 그놈이 말했던 대사를 또 한 번 들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이번엔 흰돌고래 가문에서.
……생이 대치되는 느낌이었다.
“호오라, 내 직접 말한 것이 있으니 굳이 따져 물을 생각은 없다만.”
할머니는 언짢음은 푼 채 턱을 쓰다듬었다.
주름진 얼굴이 슬쩍 웃었다.
“오늘 갓 인정을 받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범고래 꼬맹이를 따르겠다고? 결정에 후회는 없겠느냐.”
웃는 얼굴과 다르게 목소리는 지엄했다.
돌이킬 수 없음을 경고하듯이.
일리아가 귀여운 얼굴로 시원하게 웃었다.
“저희는 머리로 먹고사는 가문일진대, 어찌 계산 하나 못 하겠습니까. 존경하는 가주님.”
할머니가 크하, 시원하게 웃으며 수락했다.
아니, 생각해 보면 퍽 멋진 광경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고작해야 세 살이었으며!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기쁘기는커녕 그저 황당할 뿐.
이 얼떨떨한 기분의 이유는.
‘……나, 가주 안 할 건데?’
눈앞에서 쟤네가 끈 떨어진, 아니.
폐지 예정인 주식을 잡았단 것 때문이었다.
* * *
회의가 끝났다.
‘미친, 어떻게 끝났는지 기억도 안 나네.’
남은 안건은 나와 전혀 상관없었으므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내 머릿속에는 오직 흰돌고래 가문의 수장 일리아가 했던 말만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머리를 쥐어뜯으려다가 내게 쏠린 시선을 의식하며 가까스로 참았다.
“회의를 파한다.”
그렇게 회의가 끝났을 때 할머니는 미련 없이 떠났고.
그 뒤를 범고래들, 특히나 바이얀의 부모가 서둘러 쫓아갔다.
특히나 큰아버지가 전기 충격을 받은 활어처럼 후다다닥 쫓아가기 바쁜 모습이 볼만했다.
바이얀마저 나를 노려보더니 제 아버지를 쫓아갔다.
바이얀네 가족 중에서 남은 건 웬 조그만 소녀 하나뿐이었다.
아마 벨루스보다는 어릴 거 같고, 아틀란과 비슷할까.
아까도 알아보았지만, 예쁘장한 범고래 소녀는 큰아버지의 둘째 딸이었다.
‘쟤는…….’
시선이 마주치기 무섭게 소녀는 고개를 돌려 차분하게 제 부모를 쫓아갔다.
이어서 숙부와 숙부의 아들 소르테의 시선도 느껴졌지만 잠시뿐이었다.
“돌아가지.”
아빠가 말하지 않았다면 잠시 잊고 있었을 것이다.
아, 이대로 돌아가면 아빠의 거처로 가게 되는구나.
윽.
아빠의 얼굴에 이렇게 쓰여 있는 걸.
‘우리, 할 말이 많겠지?’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