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화
그래, 바로 이 맛이지.
회귀하면, 이런 맛도 있어야지. 안 그래?
앞선 회차에서 느꼈던, 짜릿한 승리의 맛이었다.
할머니는 한참을 우습다는 듯 웃더니, 이내 누군가를 보았다.
“피에르,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할머니의 질문에 나는 아빠를 쳐다봤다.
아빠는 잠시 나와 눈을 마주하더니, 할머니 쪽으로 향했다.
“제 딸입니다.”
나직하고 단호한 목소리.
“저는 틀린 판단을 하지 않고.”
“…….”
오만한 두 강자의 대화였다.
“이 아이는 저를 닮았습니다.”
이를 듣고 있으려니, 기분이 묘해졌다.
‘내 편.’
아빠가 이렇게 선언한 것 같아서.
가슴이 울렁거리는 기분은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구 찡그리고 말았다.
“당사자들의 모든 이야기가 끝났군.”
나는 이 세계에서 이런 걸 소화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판결을 내리겠다.”
이미 듣지 않아도 분위기는 명백했다.
바이얀 저놈 쪽은 초상집 분위기였으니까.
“바이얀 아콰시아델은 힘을 결코 낭비하지 말라는 명을 무시하고서 주요 가신의 아이에게 치명적인 상해를 입혔다.”
바이얀은 손까지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큰아버지는 거대한 낭패가 어린 얼굴이었다.
“나아가 절대적으로 지켜져야 할 초급 기관과 중급 기관 사이의 엄중한 규칙을 어겼다. 이에 그치지 않고 본인의 죄를 고하기는커녕 이 신성한 회의에서 거짓을 고하고, 감히 가주를 기만한 점.”
“…….”
“이 모든 것을 고려해…….”
본디 재판이 아니던 징계위를 거대한 재판장으로 만든 것은, 가문의 가주가 가진 권력을 보여 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바이얀 아콰시아델에게 중급 기관에서 3년간 퇴소, 1년간 근신을 명한다. 모든 대외 활동, 사람을 만나는 일, 모든 것을 금지한다.”
“……!!”
“어, 어머니! 잠시만요!”
중급 기관은 단순히 범고래들이 교육을 받는 기관에 그치는 곳이 아니었다.
고래들은 이곳에서 사회적인 써클을 만들고 이는 곧 장차 성인이 되었을 때 인맥이 되며.
범고래들은 이곳을 얼마나 우수하게 수료했느냐에 따라 자신의 우수성을 증명했다.
특히나 직계 범고래들은 졸업 나이가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자신의 특별함을 증명했는데.
아마도 나름의 월반도 했거나 월반 졸업을 기대했을 바이얀에겐 청천벽력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1년간의 근신은 곧 팔다리를 잘라 버리는 소리였다.
‘휘유, 기대 이상의 결과인데.’
내가 기억하기로 이전 회차에서 저놈이 사냥 놀이란 명목으로 초급 기관 애들을 죽기 전까지 때렸을 때에도 저놈의 처벌은 퇴소까진 가지 않았다.
‘반년 정도 근신.’
이조차도 유력한 후계자였던 놈에게는 불리한 처벌이었지만, 그날 거의 죽음까지 갔던 아이들에겐 결코 보상이 될 수 없는 수준의 처벌이었다.
“이, 이럴 수는 없습니다. 어머니. 바이얀 이 애가 잘못한 것은 맞지만, 네, 맞지만 지금까지의 성적을 생각해서라도 한 번만 재고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게, 바이얀 네놈의 최후의 변론이냐?”
할머니는 큰아버지의 말을 듣더니 바이얀을 향했다.
분노로 파들파들 떨다 못해 절망마저 어렸던 얼굴이 급하게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할머니!”
할머니는 시선을 이쪽으로 던졌다.
이번에도 아빠를 향해 말을 거는 건가 싶었는데, 나를 향해 질문이 들어왔다.
“칼립소 아콰시아델, 네 의견은 어떻지?”
어머나. 웬일이야. 내 이름을 다 부르시고?
나는 웃음을 숨기며 표정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가주님의 처벌에는 그 어떤 이의도 없습니다.”
나는 할머니를 보며 슬쩍 눈치를 보다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이고, 저 할망구, 조금이라도 제 의견에 토를 달려 하니까 득달같이 차가워지는 것 좀 봐.
몇 회차가 되든 독불장군 폭군이라니까.
“이 사건의 당사자는 저만이 아니었어요. 여기 있는 제 오빠 아게노르와…… 누구보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흰돌고래 쌍둥이 루가루바, 그 애들의 보호자인 일리아 벨루가에게도 의견을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요?”
아게노르는 내가 자신을 챙기자 초롱초롱한 눈빛이었다.
고요히 서 있던 일리아는 상당히 놀란 표정이었다.
“할머니께서는 바이얀이 루가루바 형제에게 폭력을 휘두른 것 또한 ‘힘을 함부로 남용한 것이 잘못’이라고 말씀해 주셨으니까요.”
마치 전혀 생각지 못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일리가 있구나.”
할머니가 고갯짓하자, 아게노르가 얼른 대답했다.
“저는 이의 없습니다. 여, 칼립소에게 동의합니다!”
물론 여동생님이라 하려다가 급하게 정정해서 놀랐지만.
“……저 또한 이의 없습니다. 가주님.”
할머니는 일리아의 말까지 들은 후에 더는 듣지 않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는 이곳에 방청객처럼 앉아 있던 수많은 방계와 가신들 차례였다.
“처벌에 이의가 있는 자는 거수해 의견을 말하라.”
징계위는 기본적으로 배심원 역할의 귀족들이 함께한다.
의장이 징계위 끝에서 처벌 수위를 정하면 배심원들이 이것이 옳은지, 줄이거나 더 많은 처벌이 필요한지 찬반을 논하거나 의견을 피력했다.
‘하지만.’
이곳이 어디다? 여긴 이미 징계위도 재판도 아니었다.
할머니가 명하면 그저 따르는 곳.
가주의 힘이 절대적인 장소였다.
‘할머니가 처벌하기로 결심한 것에서 이미 게임 끝난 것이지.’
통쾌함을 느끼는 동시에 할머니가 쿵, 발을 굴렀다.
이 거대한 홀이 진동했다.
전율이 일었다.
‘……이게 할머니의 진짜 힘이구나.’
공포? 두려움? 아니, 호승심이 일었다.
만약 3회차에서 최강자가 된, 가주까지 되었던 나와 싸웠다면 승부는 어떻게 됐을까.
피가 끓는 기분이었다.
“아빠, 이 힘 죽인다. 그렇지?”
“…….”
어느새 아빠가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초롱초롱한 시선으로 할머니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배심원의 이의가 없으므로. 판결을 선고한다.”
“…….”
“처벌은 변동 없이, 바이얀 아콰시아델에게 중급 기관에서 3년간 퇴소, 1년간 근신을 명한다. 모든 대외 활동, 사람을 만나는 일, 모든 것을 금지한다.”
똑같은 선고가 한 번 더 떨어졌다.
한 번만 당해도 뇌가 털릴 것 같은 충격이 들었을진대, 두 번이라니.
‘이거야 원, 사이다를 병째로 들이켜는 기분이네.’
사실 정말 난놈이라면 저런 처벌이 있더라도 복귀에 성공하겠지.
아니면, 더 난놈이라면 처벌 기간 중에 어떻게든 할머니 눈에 들어 처벌을 중단하는 방법도 있다.
처벌을 내리는 것도, 거둬들이는 것도 할머니 마음이니까.
하지만 저놈이 돌아올 자리가 과연 있기나 할까?
저놈은 제 능력으로 저 자리에 있던 놈이 아니다.
그저 장자라서, 혈통을 잘 타고난 데다 운까지 따랐을 뿐.
나는 시선을 한곳으로 옮겼다.
조금 전 할머니에게 발언한 뒤로는 쭉 조용히 침묵을 지키며 지켜보던 소년.
내 첫째 오빠 벨루스가 시선 끝에 걸렸다.
“…….”
벨루스 또한 내 시선을 느낀 듯 고개를 돌렸다.
‘벨루스가 바이얀이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만들 거야.’
나는 안다.
저 조용히 대기하는 첫째 오빠가 얼마나 약고 강한 놈인지를.
현재 후계 구도는 바이얀 원톱에 이어서 소르테와 벨루스가 뒤따르는, 일강(一强) 이중(二中) 체제였다.
바이얀 저놈이 큰아버지가 먹은 세력을 바탕으로 독주하는 상황이었지만 오늘부로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벨루스는 기회를 놓치는 놈이 아니었다.
‘할머니는 이를 모르지 않아.’
결국 고작해야 퇴소와 근신 명령 같아 보여도, 저놈을 벼랑 끝에서 뛰어내릴지 말지를 결정하게 만든 것이나 다름없다.
‘근데 그나저나 왜 벨루스 저놈 혼자지?’
나는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까지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지라 미처 신경 쓰지 못했으나.
본래 벨루스 근처에는 한 놈이 더 있어야 했다.
‘그놈도 후계자 경쟁에 뛰어들었을 거야. 그게 아니라도 이미 할머니에게 인정받았을 거고.’
내 두 번째 오빠 아틀란.
‘여기 안 왔을 리가 없을 텐데.’
그놈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그 사이 커리어를 거의 작살 낸 데다 바이얀을 나락의 시작으로 몰아낸 할머니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안건이 끝나는 줄 알고서 풀어지던 가신들이 서둘러 허리를 반듯하게 세우거나 자세를 바로 했다.
“이 시간부로 여기 있는 ‘칼립소 아콰시아델’을 정식으로 범고래 직계로 인정한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속으로 쾌재를 부른 건 물론이었다.
‘됐다!’
내가 이 가문 회의에 참석하고 싶었던 궁극적인 목적.
그건 바로 가신들에게 소개받는 일이었다.
범고래 직계는 이 순간부터 비로소 완전한 직계손으로 인정받는 것이었다.
다만…….
‘이 정도로 화려한 데뷔는 생각 못 했는데?’
어디까지나 가문 회의에 참석하고 할머니에게 저런 놈도 있었지.
하는 정도로 인식시킬 생각이었지, 이처럼 화려한 피날레를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계획했던 그림도 지나가듯이 저놈이 바로 새로운 신삥이다. 듣는 정도였지.’
뭐 나쁘지 않았다.
주인공이 되는 건 언제나 짜릿한 법.
‘3회차에서 가주가 되었을 때 이런 기분이었단 말이지.’
나는 그때를 떠올리며 웃었다. 여기서 쫄 필요는 없다.
당당해지자.
나는 이런 시선을 누릴 자격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