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범고래 아기님 (47)화 (47/275)

제47화

“……허한다.”

묘했다. 할머니는 강자가 아니면 무시하는 게 일상인 사람이었다.

‘저 할망구가 무력 없는 지능을 인정하는 사람이 아닌데.’

그리고 적어도 벨루가 가문은 그렇게까지 무력이 강한 가문이 아니었다.

똑똑한 걸로 유명했다면 모를까.

‘쌍둥이의 부친이, 할머니가 눈여겨볼 정도의 인재였다고 했지. 그 때문인가?’

고민하는 사이 발언을 허락받은 벨루가의 수장은 성큼 걸어왔다.

루가루바의 부친인 로바도 함께였다.

“공녀님께선 저를 모르시는 것 같으니 소개 드리자면 저는 벨루가 가문의 수장인 일리아 벨루가입니다. 공녀님께서 구해 주신 아이들의 모친이기도 합니다.”

가까이서 보니 루가루바와 아예 닮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역시 걔들은 아빠를 더 닮은 것 같았다.

일리아는 이어서 피에르와 아게노르에게도 인사를 올렸다.

‘나한테 가장 먼저 인사했네. 이것 참.’

기분이 묘한데.

일리아는 앞선 증인들이 그러했듯 자리를 찾아서 가더니, 말을 시작했다.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피해자였던 제 아이들 루가루바를 대신해 보호자로서 소상히 듣고서 그대로 증언하는 것임을 전합니다. 참고로 제 아이들 중 하나는 두부에 심각한 외손상과 내손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다가 오늘 아침 겨우 의식을 찾았습니다.”

그 말에 나는 놀라 로바를 응시했다.

뭐야, 분명 루가는 생명에 지장이 없다고 했는데? 거짓말이었어?

“제 아이는 바이얀 님의 주먹에 맞아 사경을 헤맨 셈이지요.”

내 시선을 느낀 건지 눈이 마주친 로바는 나만 볼 수 있게 입을 슬쩍 가리더니 입 모양으로 쉿, 하고 속삭였다. 저건 거짓말이라고.

증인이 거짓말을 해도 돼? 해도 되지.

‘저쪽도 했는데, 우리도 못할 게 뭐람?’

나는 웃음을 숨겼다. 흰돌고래들, 마음에 드는데?

이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일반 가신들의 마음을 흔드는 소리다.

“저는 범고래님들의 투지와 용맹함을 지극히 존경합니다. 앞으로도 수장으로서 따를 것을 굳건히 맹세하는 바입니다. 이분들의 전투는 신성한 것이며, 강자와 또 다른 강자를 나누는 멋진 행위라고 생각합니다만.”

“…….”

“제 아이는 어째서 사경을 헤매야 했던 것입니까?”

범고래들이 다른 수중 동물 수인들을 괴롭히는 일이 없진 않다.

심지어 죽이는 일도 심심찮게 일어난다.

“이번 행위는 모든 가신을 대표하는 입장으로서도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죄도 짓지 않는 연약한 가신을 괴롭히는 이가 있다면, 저희를 존중해 주는 훌륭한 범고래님들께 피해가 가는 행위이지 않습니까?”

어디까지나 너무 큰 문제가 되지 않는 선에서 움직였다.

왜냐, 지나치게 핍박해 봐야 범고래들에게도 득이 없다는 것을 안 수장들이 대대로 최소한의 선은 지키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이 때문에 바이얀도 할머니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난폭하게 굴었던 거고.’

그럼에도 이 순간 공식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가주가 있는 자리에서 문제 삼았기 때문이다. 이전처럼 덮을 수 없게 되었다.

“수장님, 부디 이를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여 주십사 합니다.”

일리아의 말은 강력한 주장으로 끝맺었다.

바이얀은 당장이라도 일어나고 싶은 얼굴이었다.

좋았어. 흰돌고래 가문이 직접 나서서 저쪽이 당황하는 동시에 우리 쪽으로 호의적인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나는 이틈을 타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할머니, 아게노르 오빠는 비록 이 싸움에 참여한 사람이지만 적어도 그 자리에 제 급우이자 흰돌고래 쌍둥이인 루가루바 형제가 있다는 사실은 증명해 줄 수 있는 증인입니다!”

“맞……아요, 그렇습니다.”

아게노르가 눈치 빠르게 맞장구치며 대답했다. 나이스.

이어 여기서 그치지 않고 로바가 다음 증인으로 나섰다.

어째서 일리아와 함께 나갔나 했더니, 본인도 증인으로 나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로바는 싸움이 소강될 때쯤에 나타났던 정황을 확실하게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직접 싸움을 만류했던 것까지 이야기했다.

“제가 바로 초급 기관의 기관장에게 상황을 알린 장본인입니다. 저와 그 자리에 함께 간 시종들이 여럿이니, 모두 증인으로 초빙할 수 있습니다.”

로바의 증언이 끝을 맺자, 분위기는 완전히 반전되었다.

“존경하는 할머니, 저는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확인하면서 제 발언을 마무리하고자 해요. 혹시 이 자리에 증인 대신 조언을 구할 상대를 불러도 되나요?”

허락이 떨어지자, 나는 지금까지 조용히 앉아 있던 상대를 향했다.

“라일라.”

라일라는 맨 앞줄에 앉아 있었기에 굳이 크게 소리쳐 부르지 않아도 되었다.

“내가 징계위에 앞선 조사에서 했던 말을 다시 증명받고 싶어. 그때 나는 분명 이렇게 물었어.”

“듣고 있습니다.”

“이곳 초급 기관과 중급 기관 사이에서는 반드시 어겨선 안 될 규칙이 있다.”

마지막 무기를 꺼낼 차례. 나는 씩 시원하게 웃었다.

“중급 기관의 학생은 어떤 상황에서도 초급 기관의 학생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다.”

“맞습니다.”

“이것은 범고래 가주님, 지금 우리 할머니와 동격의 이름으로 선포된 규칙이다.”

“……맞습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땀이 나는 손은 뒤로 살짝 숨겼다.

지금부터 하는 말은 저 대단한 할머니의 심기를 거스를지도 모르기에.

“할머니, 들으셨죠? 최소한 혼돈과 혼란을 방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규칙이 이렇게 무참하게 무시당한 거예요.”

할머니의 눈썹이 씰룩 움직였다.

“할머니께서 직접 만들고 강조하셨던 규칙이 말이에요.”

우리 세대는 알 리가 없는 이야기였다.

유명무실해질 즈음에 바이얀이 잘 모르고 깽판을 쳤다가 처벌을 받았던 거였으니까.

“그걸 꼬맹이, 네가 어떻게 아는 거지?”

아니나 다를까 날이 선 소슬한 목소리에 나는 슬쩍 숨을 삼키며 아빠를 가리켰다.

“어찌 모를 리가요. 아빠는 항상 할머니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해 주신 걸요!”

나는 헤헤 해맑게 웃었다.

이럴 땐 웃음으로 넘기는 게 최고다.

졸지에 할머니 이야기를 한 사람이 된 아빠의 시선이 지그시 내게 닿았지만 슬쩍 모른 척했다.

아, 왜. 오늘 많이 모른 척해 줬잖아.

이것도 그냥 넘어가 줘.

“존경하는 할머니, 바이얀의 가장 큰 죄는 할머님께서 감히 제정하신 규칙을 어기고 가여운 아이를 때린 것. 규칙 미준수에 해당하는 일인 거죠.”

“할머님! 이의 있습니다. 저게 지금 말도 안 되는 소릴 지껄이고 있습니다!”

나는 속으로 씩 웃었다.

‘아, 네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

근데 어떡하냐?

“말도 안 되는 소리?”

“네! 무슨 그런 규칙이 있단 말입니까. 이 약육강식 세계에! 그저 강하면 짓밟아 버리면 그만 아닙니까.”

“……그래서, 넌 흰돌고래 아이를 사경을 헤매도록 때렸다는 거구나.”

“그, 그건 맞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슬쩍 끼어들었다.

“이런 할머니, 바이얀은 지금 이 신성한 회의에서…… 거짓말을 했다고 방금 스스로 증언했네요. 저런. 감히 할머니 앞에서 어떻게 저런 일을……!”

“……!!”

바이얀의 얼굴에 낭패 어린 표정이 떠올랐다.

그제야 옆에 있던 큰아버지가 황급히 바이얀의 입을 가로막았지만.

쯧. 이미 늦었지. 멍청이들.

바이얀, 나는 네놈을 잘 알아. 왜냐고?

너는 앞선 회차에서도…… 결국 그 우둔하고 멍청하며 폭력만 좇던 네 본성이 자멸을 불러왔으니까 말이야.

그게 조금 빨라진 것뿐이지.

“보셨다시피 감히 할머니께서 정한 규칙을 어겼어요.”

나는 앞서 힘주어 말했던 것과 다르게 차분함을 유지했다.

“사실 싸움이 뭐 대수겠어요? 애들은 크다 보면 싸우는걸요.”

“…….”

옳거니. 할머니의 미간이 씰룩이는 걸 봤다.

“그러나 범고래들의 싸움이 아니라 연약한 흰돌고래 아이가 휘말렸으며, 할머니께서 정한 지엄한 규칙을 완전히 무시한 채 ‘사고’로 위장하려 한 저 가증스러운 모습! 보셨죠?”

나는 바이얀을 가리키면서 예쁘게 웃었다.

“할머니, 쟤가 어떻게 강하고 멋진 할머니 뒤를 이을, 유력한 후계자일 수가 있나요?”

내 미소는 순식간에 자신만만하게 변했다.

“나보다 드럽게 못한 놈인데?”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할머니의 날카롭고 험악한 시선이 내리꽂혔다.

그와 동시에 할머니의 입가가 움직이더니, 이내 날카로운 광소가 들려 왔다.

“하, 하하. 아하하하하하!”

홀을 채울 듯 커다란 웃음소리 끝에, 할머니의 검푸른 시선이 다시 나에게 향했다.

“맹랑한 것이구나.”

서슬 퍼런 목소리도, 날카로운 시선도 없었다.

검푸른 눈동자 안에 있는 것은 예기로운 흥미뿐.

“그래, 나는 겨우 세 살짜리에게 지고 처박힌 놈에겐 관심이 떨어져.”

“하, 할머님!”

“닥치거라. 네가 지금 할 말이 있느냐? 지금 그 위치에서도 쫓겨나고 싶지 않다면 그 주둥아릴 다무는 게 좋을 게다. 한심한 생선 새끼.”

“…….”

됐다. 귓가로 땡그랑 승리의 종소리가 들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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