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범고래 아기님 (46)화 (46/275)

제46화

“무엇이냐.”

차디찬 목소리였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간 내게 차갑지 않은 목소리를 찾는 게 더 어려운 삶을 살아왔으니까.

“범고래 가문의 가훈이자 가치는, 강자가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는 것. 다시 말해 강자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맞나요?”

“말해 입 아픈 소리구나.”

나는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 높이가 부족한데.’

나는 아빠를 흘끗 보았다. 오늘따라 내게 조금 유한 것 같았지?

애비야, 이것도 한 번만 봐줘야 해.

나는 아빠의 허벅지를 밟고 책상 위로 올라갔다.

아, 이제야 잘 보이네.

내 갑작스러운 행동에 가신들이 술렁거렸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멋있어……!”

줄곧 침묵하던 아게노르의 이상한 감상이 들려 온 것 같지만.

무시했다.

“그렇다면, 할머니. 오늘 할머니께서 가져와 주신 안건의 가장 큰 쟁점은 결국 ‘싸움’이 있었다는 거고. 저는 본래 이 최고 징계위에 ‘피해자’로서 참석할 예정이었어요. 이건 의장으로 참여했던 라일라를 비롯한 두 사람에게 물어봐도 좋아요.”

“이의 있습니다, 할머님!”

“할머니, 저는 바이얀이 이야기하는 동안 경청했어요.”

바이얀의 목소리를 잡아먹을 만큼 큰 소리로 외쳤다.

“할머니께서 혹시 공정하게 이를 지킬 수 있게 해 주신다면 저는 아주 재밌는 것을 보여드릴 수 있어요.”

바이얀 이 새끼야, 네 차례는 끝났어. 지금은 내 차례야.

“허락한다. 바이얀, 입 다물거라.”

“하지만, 할……!”

“얘 바이얀. 가주님께서 조용히 하라고 하지 않니.”

조용하던 큰어머니가 단조롭지만 단호하게 말하자 바이얀이 움찔하더니 물러났다.

‘그냥 떠들게 뒀으면 할머니에게 한 번 치였을 것을. 아깝네.’

나는 다시 기회를 얻었다.

“뭐, 바이얀과 의견이 갈리니 싸움만 두고서 말하자면. 모든 싸움엔 승자와 패자가 있죠. 중요한 건, 이 싸움의 승자는 저였어요. 할머니.”

나는 가슴에 당당하게 손을 올렸다.

“할머니, 바이얀은 보시다시피 그날 혼자서만 오지 않고 십여 명의 동료를 데려왔고, 여기서 네 명 정도는 함께 있던 아게노르 오빠에게, 나머지는 제게 덤볐어요.”

정확하게는 3:7로 나뉘었던 것 같지만 슬쩍 아게노르 쪽에 숫자를 올려주었다.

“저는 이 패싸움에서 상대를 조져 버리고 이긴 거예요, 할머니.”

바이얀이 할머니의 경고를 어기고 또 무어라 지껄이기 전에 이어 말했다.

“아, 물론 승리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겠지만. 제 나이는 올해로 세 살이고, 여기서 멀쩡하게 살아 숨 쉬며 이 자리에 아무렇지 않게 참여한 것이야말로, 제가 승리자라는 증거 아닌가요? 저는 이 나이로 중급 기관에 다니던 범고래들을 이긴 거예요.”

모두가 조용해졌다.

그럴 테지. 이제야 내 나이를 자각했을 테니까.

“지금 바이얀의 증인들도 입 아프도록 얘기했잖아요? 그 피에르의 딸이라 더럽게 잘 싸우더라고요. 그렇다면 저는 승자고, 범고래 가문의 뜻에 따르면 승자인 제 맘대로 한 것뿐인데 대체 여기서 무엇이 잘못되었나요?”

나는 씩 웃었다.

“설사 제가 저놈들을 욕했더라도 반발할 수 없어요. 전 강자고 승자니까요.”

“…….”

지금까지 나온 증언들은 모두 내가 저놈들과 대등하게 싸웠다는 것을 가정하여 말했다.

저놈들의 증언은 이제 정반대로 내 의견을 뒷받침해준다는 소리다.

“이처럼 저는 대대로 우리 범고래 집안에 내려온 강자만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조상의 뜻이자 가주이신 할머니의 지엄한 뜻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어요.”

하지만 이 말로는 저놈들이 주장하는 내가 가해자이며 부모 욕설을 했다는, 싸움을 시작했다는 소리를 뒤집을 수 없다.

여기서 끝내려고 준비한 건 아니지.

“그렇지만 할머니, 강자만이 모든 것을 멋대로 한다면, 여기 있는 수많은 가신은 어떻게 살까요? 모두가 범고래일 수는 없고, 현명하신 할머니께서는 이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규칙을 세우신 걸 거예요.”

“…….”

“범고래는 수중 동물 수인들을 굽어살피는 역할을 한다.”

“…….”

“즉, 전투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건 적어도 범고래끼리의 일로 한정하고자 함을, 존경하는 할머니께서는 일찍이 지정하셨어요. 그것이 강자의 미덕이라고.”

“……퍽 많은 것을 아는구나. 세 살 주제에.”

암. 세 살 주제에. 그렇죠?

이 세 살만 벌써 네 번째 살아 보면 이렇게 됩니다.

나는 할머니의 차가운 비아냥거림은 못 들은 척하며 또박또박 말했다.

“저는 초급 기관 고래반 중에서 최고 반인 알파반에 들어간 지 단 하루 만에 반을 평정했어요. 그리고 일찍이 배운 가주님의 뜻에 따라 고래들을 굽어살피는 것이 범고래의 역할임을 알고.”

“…….”

“그날, 그 싸움에선 제가 있는 반의 아이를 보호한 것뿐이에요. 싸움이 발발했던 이유는 저기 바이얀이 그저 제 옆에 있었단 이유로 제 급우를 사로잡아 죽일 거라 협박했고, 저는 참지 못하고 싸움을 받아들였어요.”

나는 목소리를 살짝 높였다.

“존경하는 할머니, 대체 여기에 제 잘못은 어디에 있나요?”

나는 승자고, 피해자이며, 내 급우를 지킨 사람일 뿐인데.

새롭게 제시된 정황을 듣고 있던 가신들이 잠시 술렁거렸다.

여기에 있는 사람 중 범고래 방계를 제외하면 모두가 일반 수중 동물 수인이다.

평생 강자로 살아가는 범고래와 다르게, 살다 보면 약자될 때도 있는 일반 수인들 말이다.

그런 수인들에게 있어 중간에 애먼 피해자가 있다는 사실은 동요를 일으킬 수밖에.

저놈들은 교묘하게, 아니 의도적으로 루가와 루바를 다치게 했다는 사실 따위 무시했겠지만.

“너도 증인이 있느냐?”

올 것이 왔구나. 나는 짧게 숨을 참았다.

‘저놈처럼 증인이 있을 리가.’

그때 있던 내 편이라고는 함께 피해자가 된 루가루바 쌍둥이, 그리고 나와 함께 싸운 아게노르뿐이다.

나는 슬쩍 아게노르를 보았다.

‘함께 싸운 아게노르는 저쪽이 목격자로 내세운 시종만큼의 역할을 할 수가 없지.’

아게노르에게 고갯짓하자 아게노르의 집착 어린 눈이 반짝거렸다.

“내 차례야?”

“속삭이지 말고 나서기나 해.”

아게노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존경하는 할머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래, 아가야. 듣자 하니 네가 이 싸움에 휘말린 모양이구나?”

할머니의 목소리가 아주 조금 누그러졌다.

아게노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말했던 정황과 거의 비슷하게 말했다.

“네 말은 잘 알겠다만, 아가. 결국 너도 싸움의 당사자란 소리구나. 그렇다면 목격자는 아닐 테니, 다른 증인은 없느냐?”

있을 리가 없었다.

아마도 아직 치료받고 있을 루가루바를 여기 데려다 놓을 수도 없고.

데려다 놓을 생각도 없었다.

“증인은 없습니다.”

“없다?”

그렇지만 나는 어차피, 증인이 없더라도 이 싸움을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할머니의 서슬 퍼런 시선을 받으며 다시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가주님, 감히 이 회의에 잠시 한 말씀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갑작스럽게 끼어든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있었다.

서 있는 곳은 이곳 가장 아래쪽에서 두 번째 단이었다.

퍽 가주와 가까운 위치. 좋은 자리였다.

‘저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을 보고서 눈을 크게 떴다.

새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였다.

앞머리가 마치 뽕을 넣은 듯이 부풀어 오른 곱슬머리였고, 홍채에 비해 동공이 큰 눈을 가졌다.

몹시도 귀여운 인상이었지만 표정만큼은 싸늘하고 단호했다.

나는 옆에 앉은 남자를 보고서야 여성의 정체를 눈치챘다.

“네가 입을 다 여는 일이 있구나.”

“송구합니다.”

여성의 옆에는 루가루바의 부친이 앉아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눈인사를 하는 모습.

그럼 저 사람은, 루가루바의 모친.

벨루가 가문의 가주일 것이다.

‘엄마랑은 전혀 닮지 않았구나.’

모친은 자신의 원형 동물인 흰돌고래와 상당히 흡사한 모습이었다.

귀여운 인상에 비해 표정은 살벌할 정도로 싸늘했지만.

“그래, 일어나 할 말이 무엇이더냐. 쓸데없는 소리라면 각오했겠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저 저와 제 반려가 이 사건에서 제삼자는 아니기에 끼어들게 되었습니다. 공녀님께서 말씀하신 이야기 속 학급 급우가, 제 쌍둥이 아들의 이야기이니 말입니다.”

여성의 주장에 한 차례 회장이 술렁였다.

나는 다른 것에 놀라고 있었다.

‘흰돌고래 수인들이, 저 자리에 있을 정도로 세력이 있는 가문이었어?’

몰랐다. 그야 당연했다.

이미 몇 번 말했지만, 앞선 회차에선 이미 저들이 멸망한 뒤에야 이 집안에 돌아왔으니까.

1, 2회차엔 아예 저들과 접점이 있기도 전에 팔려 갔다.

“존경하는 수장님, 저는 이 안건에 증인으로 참석하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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