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범고래 아기님 (40)화 (40/275)

제40화

자신의 자리 근처에는 미리 온 듯 아게노르가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손을 헐렁하게 흔들어 댔다.

허물없이 흔드는 모습에 주변에 있던 이들이 술렁거렸다.

“지금 아게노르 공자님께서 반갑게 손을 흔드셨죠?”

“세상에나, 저분께선 형제와도 관계가 좋지 않으실 텐데…….”

“피에르 님 아래 공자님들은 모두 말조차 나누지 않잖아요. 그나마 마주할 때조차도 싸움뿐인 걸로 아는데?”

칼립소는 회장 곳곳을 쳐다보다가 한곳에 시선을 멈췄다.

자신의 자리 맞은편에는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바이얀과 그 일당들이었다.

칼립소가 쳐다보기 전부터 칼립소를 노려보고 있던 것인지, 눈빛이 살벌했다.

‘찢어 죽이고 싶다는 시선이네?’

칼립소는 씩 웃었다.

생긋 웃으며 가운뎃손가락도 들어 주었다.

무슨 의미인지는 몰라도 기분은 퍽 나쁠 것이다.

칼립소의 시선은 분개하는 바이얀을 떠나 그의 옆에 앉아 있는 차분한 인상의 부인에게 닿았다.

‘역시나 큰아버지는 오지 않았네.’

부모가 와야 한다고 했다. 그건 둘 중 누가 와도 상관없다는 소리니.

저쪽은 칼립소의 큰어머니였다.

‘큰일 났네. 차라리 큰아버지가 직접 오는 게 나았을 뻔했는데.’

차분한 인상의 큰어머니는 이곳이 얼마나 소란스럽든 간에, 제 아들이 누굴 노려보든 간에 홀로 침착했다. 마치 다른 공간에 있는 것처럼.

회색 머리카락을 우아하게 틀어 올린 모습.

저 사람 또한 범고래였다.

방계 가문.

하기야 이미 바이얀 본인이 가문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겐 치명적인 영향이 있을 터였다.

‘할머니는 가문 회의에 영향력을 뽐내는 걸 좋아하지.’

괜히 모든 가신이 모이고 집중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그곳에서 모든 대소사가 결정되고 진행되었다.

그곳에서 배제된다는 것은 영원히 이 수중 생물 집단에서 중심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소리다.

‘이번에 꼭 가고 싶었지만 아쉽게 됐지 뭐.’

바이얀이 자리를 비우니 큰아버지인 로데센이라도 가서 할머니 딸랑이가 될 생각인 듯했다.

칼립소는 그 모습이 그려지는 듯해 피식 웃었다.

‘아아, 큰아버지가 딸랑이 한번 정말 잘 흔들긴 하지.’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징계위가 시작될 시간이었다.

같은 시간 어딘가에선 가문 회의가 열리고 있을 터였다.

‘이제 시작인가.’

이곳은 거대한 회의장이었다.

반원 모양의 탁자, 그리고 재판장의 판사 자리처럼 만든 의장의 자리.

반원 탁자에는 듬성듬성하긴 했으나, 칼립소와 아게노르를 비롯한 당사자들과 그들의 부모가 앉아 있었다.

이외엔 배심관 역할을 하는 가신들도 함께였다.

그리고 의장 자리에는 라일라 외에도 두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칼립소는 한 사람이 중급 기관의 이사장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보았다.

‘한 사람은 누구지? 묘하게 얼굴이 익숙한데.’

“모두 정숙해 주십시오. 최고 징계 위원회를 시작하겠습니다.”

가장 상석에 앉은 라일라가 말하자 회장은 일시에 고요해졌다.

“저는 진행과 의장을 맡은 라일라입니다. 이 자리에서는 모든 분께서 계급 여하를 떠나 회의에 충실하게 임하며,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진실만을 말씀하실 것을 바다의 이름을 걸고 약조 부탁드리겠습니다. 먼저, 당사자이자 이번 의제의 가해자이신 바이얀 님.”

“……바다에 걸고 약조하겠다.”

“그리고 당사자이자 이번 의제의 피해자이신 칼립소 님.”

“바다에 걸고 약조하겠다.”

“아게노르 님.”

“바다에 걸고 약조하겠다.”

이외에도 라일라는 모든 당사자에게 맹세를 시켰고, 방계 아이들의 맹세까지 끝나고야 차분한 눈으로 회장을 훑었다.

시선이 칼립소에게 향했을 때, 라일라가 아닌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조용히 있던 중급 기관의 이사장이었다.

“시작하기 전에 저는 의장 중 하나인 차야입니다. 의장으로서 궁금한 사항이 있습니다만.”

손을 들어 올린 차야는 처진 눈을 가진 노년의 여성이었다.

그러나 시선만은 카랑카랑하니 압도하는 힘이 있었다.

“이 자리는 미성년인 교육 기관 학생의 행실을 두고서 징계위가 열리는 자리입니다. 따라서…… 보호자 동반은 필수라고 미리 고지한 것으로 아는데 말입니다.”

그녀는 현 가주와 함께 사선을 헤쳐 온 범고래 전사로서 현재는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쓰는 중인 사람이었다.

“어찌하여 칼립소 님과 아게노르 님 옆에는 보호자가 계시지 않으신 겁니까?”

칼립소는 속으로 아주 조금 찔끔했다. 그러나 이는 잠시였다.

올 것이 왔구나.

그래, 올 것이 왔을 뿐이었다.

‘라일라 덕에 슬쩍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했지.’

아마 이건 라일라 나름의 배려였을 것이다.

본인도 이상하다 생각했을 테지만 인사할 땐 전혀 얘기를 꺼내지 않았으니.

“혹 시간이 걸리는 겁니까?”

힘 있는 목소리에 칼립소가 눈을 돌렸다.

칼립소는 시선이 또렷한 차야의 눈앞에서도 호기롭게 시선을 마주했다.

차야의 눈에 이채가 서렸지만 아주 잠시뿐이었다.

“제게 보호자는 없습니다.”

칼립소의 당당한 발언에 회장의 모두가 멈칫했다.

물어본 차야마저도 굳었다.

“보호자가 있는 까닭은 아직 미성년인 저희의 미숙함을 고려하여 보호자의 도움을 받고자 함입니다. 의장님 맞나요?”

“……맞습니다.”

라일라가 끄덕였다. 칼립소는 시선을 돌렸다.

“저와 아게노르 오빠는 스스로의 변호자가 될 것입니다.”

있어 봐야 성가시기만 할 사람이다. 없어도 괜찮아.

나는 헤쳐나갈 수 있어.

의장 셋이 앉은 자리와 가신들이 앉아 있던 배심원 자리가 소란스러워졌다.

대체로 칼립소의 저 의견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 하는 의견이었다.

“혹 제가 보호자가 없다고 한들 이건 저와 아게노르 오빠에게 불리한 점이 되었지, 상대측에 불리한 점이 되진 않습니다. 하여, 이대로 속행을 희망하는 바예요.”

그러나 칼립소가 워낙 똑 부러지게 말한 탓인지, 다들 칼립소의 의견에 그런가? 하고 수긍하는 기색이었다.

한 사람만 제외하고서.

“반대합니다! 이 자리는 엄중한 법도와 규칙에 따라 시작된 자리입니다. 한데 기본적인 규칙조차 지키지 않은 당사자를 대상으로 무슨 회의를 진행한단 말입니까.”

쾅, 소리까지 내며 반대하는 자는 차야였다.

차야 또한 칼립소의 똑 부러지는 깡엔 감탄하는 바였지만 그녀는 지극한 원리원칙주의자였다.

‘아, 할머니 친구랬나. 동료랬나. 도움이 안 되네…….’

차야의 주장이 워낙 강경했던 탓에 지켜보던 이들의 의견도 둘로 갈렸지만 미세하게 차야 쪽으로 쏠리는 분위기였다.

“시간이 걸려도 좋습니다. 보호자를 소환하세요, 칼립소 님.”

아게노르가 칼립소를 향했다. 어떡할 거냐는 시선.

칼립소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사실 여기까지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부터 생각한 방안은 칼립소로서도 별로 하고 싶지 않은 방법이었다.

“……소문에 따르면 공녀님께선 피에르 님과 사이가 좋다고 하지 않았나요?”

“저도 들었어요, 그 소문. 아주 지극히 아끼신다던데…….”

“그런데 왜 이 자리엔 없으신 걸까요?”

“혹 아프신 건 아니실지.”

수군거림이 귀에 그대로 툭툭 꽂혔다.

여기서 자칫 잘못하면 칼립소는 자신이 했던 거짓말을 들켜 불리한 상황이 될지도 몰랐다.

지켜보고 있던 바이얀이 픽 웃었다.

“그냥 하지 그래? 지가 아빠 없다고 하는데, 어쩌겠어?”

“하하하, 바이얀 님 말씀이 맞습니다.”

“그냥 하시죠 의장님?”

“맞아요. 가문 회의나 좀 가게 빨리 시작해요.”

강력하게 주장하던 차야의 표정이 찡그려졌다.

이런 식이면 법도가 모두 무시된 채 시작될 판국이었다.

그러나 흐름이 그렇다면 그녀로서도 더는 주장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었다.

칼립소는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며 속으로 한숨을 참았다.

이대로는 징계위가 잘 끝나더라도 피에르와의 불화설을 피하지 못할 판국이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칼립소가 체념하며 다시 한번 보호자 없이 진행을 요청했다.

“그렇다면 칼립소 님과 아게노르 님께선 보호자 없이…….”

“그렇게 둘 생각은 없는데.”

칼립소가 눈을 크게 떴다.

……분명 이곳에서 들릴 리가 없을 목소리였다.

“법도는 법도.”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언제 들어온 것인지 소리 없이 문을 열고 들어선 인영이 보였다.

길쭉하고 날렵한 실루엣. 매번 느슨한 의상만 걸친 스승은 어디에도 없었다.

“당연히 지켜야겠지.”

칼립소의 눈이 크게 뜨였다.

“내 딸과 아들의 보호자, 출석했다.”

반듯하게 예복을 걸친 모습은 마치 짜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칼립소 자신의 옷과 같은 파란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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