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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범고래 아기님 (38)화 (38/275)

제38화

우리 애비는 또 그 사이에 침묵을 사랑하는 병이 다시 도지고 만 걸까.

처음 만났을 때만큼이나 말이 없었다.

‘게다가 아게노르 얘는 왜 없어?’

내가 없으면 혼자 나와서라도 열심히 재깍재깍 훈련을 받아야지.

게다가 아직 제대로 고맙단 인사도 못 했는데, 얼굴을 보기가 힘드니.

그날 이후 아게노르와는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

라일라에게 듣기로 아게노르 또한 열심히 증언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다만 나처럼 아게노르 또한 중급 기관 출석 제외 대상인지라 본인 건물에 있다는 것 같은데.

‘음, 머리 돌아가는 게 조금 느릿하긴 하네.’

한참 생각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

그 사이에도 아빠는 말이 없었다.

이쯤 되면 침묵병이 다시 도진 게 맞는 것 같은데.

‘……아니면 뭐가 불만이라서 저렇게 또 심기가 불편한 표정인 거야?’

저건 분명 내가 아게노르를 두 번째 제자랍시고 데려왔을 때 한 번 봤던 표정과 비슷했다.

지금 아직 한쪽 눈이 가물가물하지만 분명했다.

“승리는.”

드디어 아빠의 입이 열렸다.

학부모 송환이라는 무거운 과제를 등에 업고 있는 나로선 경청할 수밖에 없었다.

“……상처 없이 쟁취했을 때나 승리라고 부르는 거다.”

“엥.”

이게 다 무슨 소리야?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무슨 소리야, 스승님. 어떻게 늘 상처 없이 승리해? 그건…….”

“넌 나를 스승으로 부르는 순간부터 내 말을 법처럼 따르기로 한 것이 아닌가?”

“……그, 그건 그런데.”

내가 언제. 법처럼 따르겠다고 한 적은 없거든?

하고 싶은 말이 산더미 같았다.

하지만 상황은 언제나 켕기는 게 있는 사람이 약자였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려다가 쓰라림에 놀라 참았다.

“나는 상처 없이 승리해 왔다.”

“그건 스승님이잖아.”

……저기요, 저는 아직 각성 못 한 쩌리라고요.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어쩐지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하필 이때 조금 서러울 게 뭐람.

‘패싸움에서 이겼는데. 이 나이 먹고 이기기 쉬운 줄 아나. ……칭찬이라도 한 번 하고 욕하지.’

이럴 땐 참 약게도 어린 몸은 어쩔 수 없다라고 생각한다.

참고 또 참아도 어쩔 수 없이 역치가 낮아지고 마는 때가 있다.

쪽팔리게 눈시울이 붉어질 것만 같아서 고개를 푹 숙였다.

아이 씨, 그래도 내가 근육통까지 안고 여기 온 건데. 좀 반겨 주기나 하지.

하기야, 언제는 저 애비가 날 반겨 주기나 한 적 있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인간.’

나는 입술을 깨물려다가 합하고 이를 꾹 깨물었다.

“어딜 가는 거지?”

“……갈 거야.”

훈련받으려고 온 거였지만 다시 보니 오늘은 훈련받을 상태가 영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이 절뚝이는 다리로 뭘 하겠다고 온 건지 모르겠다.

그냥 여기 와야겠다 싶어서 온 거였는데.

지금 와서 되짚어 보니 홀린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나는 몇 발짝 가지 못하고 둥실 떠올랐다.

내 의지는 아니었다. 물줄기가 나를 둘둘 감고 있었으니까.

살짝 젖은 옷을 느끼며 나는 차라리 이 물줄기가 얼굴에도 끼얹져졌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우리 아빠라면, 절대 이렇게 말 안 했어.’

지구에서의 아빠를 떠올릴수록 눈시울을 견디는 근육이 약해지는 것만 같았다.

나약해 보일 것 같아서 힘을 풀고 싶지 않았다.

자존심이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 건지. 아니면 알 가치조차 못 느끼는 건지.

나는 기어코 엉망인 얼굴로 아빠와 마주해야만 했다.

평온하다 못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부아가 치밀었다.

뭐야, 뭔데. 이 순간에도 드럽게 잘생긴 얼굴이나 자랑하려고 들어 올렸나?

“네 몸은 무기다.”

평소와 같은 나지막한 말이 흘러나왔을 때 삐딱한 마음이 먼저 고개를 치켜들었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표정으로 노려봤다.

“어쩌라는 건데.”

“무기는 관리하지 않으면 녹슬거나 부서진다.”

“그게 뭐 어쨌……!”

“네 몸도 마찬가지다.”

“…….”

나는 말을 잃었다.

“나는 스승으로서 무기를 소홀히 한 너를 나무랄 자격이 있다.”

“…….”

……무슨. 사람을 인간 병기 취급하고 있어.

화를 내야 하는데, 화가 나질 않았다.

내 시선이 정처 없이 굴렀다.

심기가 불편한 표정이 나 때문이라고 착각할 것 같으니까.

“올바르게 정제되고 정련된 무기는 평생을 사용할 수 있다.”

“…….”

“나는 그 무기를 제련하는 데 실패한 사람이기에 해 줄 수 있는 조언이다.”

문득 이 공간에 홀로 있던 피에르를 떠올렸다.

아주 강대한 힘을 가졌지만 마치 패널티라도 받은 듯이 병약한 몸을 가지고 태어난 범고래.

자연에서 정상적이지 못한 동물은 거의가 도태된다.

그러나 홀로 고고한 힘을 가진 내 아빠는 도태조차도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면.

무기를 제련하는 데 실패했다고 표현했다. 당신도 어떻게든 나으려고 노력했다가 실패했다는 소린가?

“피에르 님은 정말이지, 모두가 선망하는 대상이셨죠. 눈감을 때까지 관심받지 않던 날이 없으셨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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