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화
“최고 징계위를 열어서 바이얀을 조져 버릴 건데?”
“…….”
잠시 당황하던 로바가 물었다.
“혹시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건 없을까요?”
“없는데?”
있을 리가.
‘굳이 하나 찾자면 혹시 당신이 우리 아빠 대역 좀 가능한지 물어보고 싶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범고래의 아빠가 벨루가라. 이것도 재밌긴 하겠네.’
나는 엉뚱한 생각을 넘기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얘긴 다 끝났지? 루가루바가 얼른 쾌차하길 바랄게.”
“병문안 오신다면 아이들이 더 좋아할 겁니다.”
“생각해 볼게.”
그렇게 로바의 손수건만 쫄래쫄래 든 채로 등을 돌리는데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희 벨루가는 은혜를 잊지 않습니다, 공녀님. 저는 벌써 아이들이 공녀님께 평생 은혜를 갚는다고 주장할 생각을 하면 머리가 아픕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머리가 아플 거라던 남자는 말의 내용과 달리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은혜는 무엇으로든 꼭 갚겠습니다. 바다의 이름을 걸고서.”
“……그래, 뭐.”
수중 동물에게 물과 바다는 생명의 원천이다.
그렇기에 바다를 걸고 하는 맹세는 그리스 신화 속 스틱스강에 대고 하는 맹세처럼 어길 수 없는 맹세나 마찬가지였다.
“안아 들어서 옮겨드려도 될까요?”
“그건 싫어.”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걸어갔다.
머릿속은 이미 로바의 말이 한쪽 구석으로 넘어간 지 오래였다.
‘와, 학부모 소환 어떡하냐, 이거.’
* * *
초급 기관과 중급 기관이 발칵 뒤집혔다.
바로 바이얀 아콰시아델이 저지른 일 때문이었다.
물론 평소 바이얀의 행실은 익히 널리 알려져 있기에 일의 내용 자체는 그리 특별할 게 없었다.
그러나, 여기에 새로운 사람이 엮였으며 그 존재가 이뤄낸 업적에 다들 기함했다.
“야, 야, 들었어? 이번에 새로운 공녀님 얘기!”
“그 바이얀 님이랑 엮인 거?”
“그거 진짜야? 같이 갔던 방계 애들 다 쥐어 터졌다던데?”
“그래서 누가 이긴 건데?”
“당연히 바이얀 님이지! 넌 그걸 말이라고 하냐?”
“내가 들은 소문이랑 다르니까 그렇지. 공녀님이 이겼다던데?”
“뭐어?!”
특히나 언어가 자유로운 중급 기관은 소문이 더더욱 자유롭고 빠르게 퍼졌다.
아이들은 고래고 일반 수중 동물이고 떠나서 모였다 하면 이 얘기를 하기 바빴다.
“근데 소문이 진짜긴 해? 과장된 거 아니고?”
“아니야! 우리 사촌 형이 봤는데…… 같이 갔던 형이 팔이 부러져서 왔대!”
“헉, 범고래 강골들이?”
대개가 흥미 위주의 소문이었다.
소문은 점잔을 빼는 고래반에도 퍼지긴 마찬가지라, 중간 학년에 해당하는 6학년. 이 중 최상위 반 또한 소란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아니, 근데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니야? 고작해야 초급 기관에나 다니는 공녀가 무슨 방계 애들과의 패싸움에서 이겼다는 거야. 게다가 바이얀 님도 계신데?”
“그러니까 말이야! 흥, 소문도 작작 과장해야지.”
“그 덜떨어진 공녀는 물의 힘도 각성 못 했다면서?”
최상위 반은 대체로 바이얀을 따르던 방계들이 많았던지라 칼립소를 험담하기 바빴다.
그러면서도 목소리를 최대한 낮추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이 반에 있는 누군가를 의식해서였다.
이런 범고래 방계들의 모습을 보던 한 소년이 쯧쯧 혀를 찼다.
“흐음, 저 범고래들 좀 보게. 눈치 보기 바쁘네. 눈알 빠지겠다, 빠지겠어.”
전체적으로 진한 회색 머리에 머리 가운데만 볼록 솟은 듯 뿔 같은 무늬를 가진 소년이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소년은 일각고래 수인이었다.
연신 이쪽의 눈치를 보면서도 험담만은 보란 듯이 멈추지 않는 범고래들을 속으로 비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흐음, 소문을 정리하면 바이얀이 포함된 무리와 초급 기관 다니는 공녀가 붙었다. 그런데 공녀가 싸움을 압도했다. 이거라는 건데? 본래 소문은 과장되기 마련이라지…….”
일각고래 소년이 꾹꾹 엎드린 이의 어깨를 찔렀다.
“넌 어떻게 생각해? 응? 응? 너도 나름 당사자인데 말 좀 해 봐.”
몇 번을 찔러도 반응이 없던 이는 소년이 열 번쯤 찌르자 부스스 일어났다.
“오, 일어났어? 어떻게 생각해?”
“……야.”
“응?”
“뒤질래?”
“…….”
몹시도 사나운 눈동자에 성질 더러워 보이기 짝이 없는 붉은색 눈동자가 일각고래 소년을 향했다.
“말이나 해 보자는 거지. 말이나.”
소년은 언제 봐도 살벌한 제 급우라 생각하며 항복의 자세를 취했다.
“네 여동생이잖아, 아틀란.”
그러자 막 일어난 아틀란의 이마가 꿈틀했다.
직계의 상징인 검은 머리카락과 거기 콕 찍힌 흰 반점이 마치 노려보는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사납고 날카로운 눈매가 소년을 향했다.
“무슨 상관이야.”
더럽게 사나운 눈매와 다르게 아틀란은 더는 시비 걸지 않고 눈을 감았다.
“난 여동생 없어.”
성질하곤.
일각고래 소년은 입을 삐죽 내밀면서도 다시 잠을 청하는 아틀란을 건드리진 못했다.
* * *
한편 소문은 당연하겠지만 중급 기관 최고 학년인 9학년 사이에도 파다하게 퍼졌다.
그러나 이들은 얼마 안 있으면 성년이 될 나이들답게 대체로 점잖은 편이었다.
나오는 의견 또한 바이얀은 왜 나이답지 못한 짓을 많이 하나, 하는 건설적인 토론이 주를 이뤘다.
최고 학년 중에는 대체로 어느 파에도 속하지 않거나 연구직으로 나갈 학구파 범고래들이 많기 때문이기도 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누군가의 물음에 조용히 책을 읽던 소년이 고개를 돌렸다.
소년과 청년 사이의 나이 대에 머문 소년이었다.
긴 단발 머리카락과 하얀 피부 덕에 소녀로 착각할 만도 했지만 반듯한 외형은 누가 봐도 소년의 것이었다.
“벨루스.”
머리에 그려진 흰 반점과 아래로 갈수록 도드라진 은발은 범고래 직계의 상징이었다.
벨루스의 차갑기 그지없는 시선이 급우를 향하자, 그를 불렀던 급우가 움찔했다.
“……죄를 지었다면 벌을 받아야지.”
“죄? 무슨 죄 말이야? 여기서 죄가 될 게 있나? 벨루스 조금만 더 설명해 주라.”
“규칙을 어기는 일은 할머니께서 제일 싫어하는 일이지.”
“규칙?”
급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벨루스가 더는 대답하지 않았기 때문에 답을 들을 수 없었다.
흥미를 잃은 급우가 다른 대화 상대를 찾아 떠났을 즈음, 벨루스가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진짜 문제는 바이얀이 아니지.”
한편, 이 모든 소문의 주인공이자 당사자인 칼립소는 현재…… 병석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 * *
문제는 바이얀 놈이 아니었다.
‘그래, 그놈이 아니었어.’
나는 이불을 덮은 채 으으 앓는 소리를 냈다.
고작해야 패싸움 한 번에 이렇게 앓다니. 이건 수치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그날 패싸움을 하고 나서도 분이 안 풀려 멋대로 훈련까지 한, 전적으로 내 탓이었지만.
아니지. 아니지.
내 탓이 어딨어!
‘이게 다 바이얀 그 사자 노린내 같은 놈 때문이다!’
어쨌거나 기관엔 병결로 빠지게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라일라는 어차피 징계위가 열릴 때까지 소란을 방지하기 위해 출석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좋아. 이 세계엔 개근상이 없지만 나름 그런 걸 노리고 있단 말이지.’
나는 애써 엉뚱한 상상을 하며 고통을 떨쳐내기로 했다.
고작 근육통에 질 정도로 나는 나약하지 않다!
그렇게 오기로 이겨내고 온 곳이 바로 아빠가 사는 건물이었다.
“…….”
어째서인지 며칠 만에 만난 아빠는 그사이 업그레이드라도 한 것처럼 사람이 더욱 마피아 같아 보였다.
뒤로 어두운 음악을 깔고 연기 효과라도 내뿜어 줘야 할 것 같은 포스마저 풍겼다.
나는 당당하게 어깨를 폈다.
“패싸움 이겼어.”
매우 자랑스러운 이야기였다.
심지어 상대 중엔 바이얀 그놈도 있었지 않았나.
“상대 대장이 지나치게 강한 놈이어서 일단 한 놈씩 패자 전법으로 갔는데, 생각보다 성과가 괜찮았어. 스승님.”
“…….”
“무엇보다 내 주먹이 그 나이 대 놈들에게도 통하더라고. 훈련을 열심히 한 덕분인 것 같아.”
“…….”
“스승님이 훌륭한 덕분에 제자도 이런 훌륭한 업적을 이룰 수 있었던 거야. 스승님이 최고란 소리지!”
나는 일단 침착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현재 나에겐 생각만 해도 아찔한 부모님 소환이 남아 있다.
이걸 아빠에게 어떻게 이야기할지 모르겠는데, 일단 내 계획의 시작은 이거였다.
‘우선 아부부터 진하게 해 두자!’
어쨌거나 난 승리하지 않았나?
범고래치고 승리를 싫어하는 인간은 없다.
어쨌거나 싫은 소리를 해야 되는 상황인데, 그 전에 사람을 꿀에 절여 놓고 하면 역효과가 덜할 것이다.
조금 띵한 머리로 급하게 떠올린 계획치곤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그런데 애비야, 왜 대답이 없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