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화
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나는 끼긱,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돌렸다.
“공녀님께서도 부모님을 모셔 와야 합니다.”
그 말인즉 피에르, 내 아빠를 데려오란 소리였다.
아니, 징계 위원회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내 입이 절로 쩍 벌어졌다.
……여기서 어떻게 그 인간을 데려와?!
* * *
달칵. 징계실의 문이 닫혔다.
나는 문 앞에 선 채로 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허, 이걸 어떡한다?’
머릿속이 매우 복잡했다.
‘패싸움 벌일 때만 해도 여기까진 생각 못 했는데.’
내가 생각한 건 딱 징계위가 열리는 것까지였다.
설마 최고위에서 ‘부모님 모셔 와!’가 동반되는 줄 몰랐지!
알았다면 쫄래쫄래 따라가서 그놈들 다 두들겨 패 버리는 2안을 택했을 거다.
물론 바이얀 때문에 결과가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지만!
나 하나 살아서 나오지 못할까!
‘하씨, 징계 위원회에 나가는 봤지만 그땐 부모님 동반이 아니라서 꿈에도 생각 못 했네.’
앞서 말했듯 내가 아는 징계위가 열렸을 땐 굳이 부모 소환은 하지 않았다.
당황스럽지만 일단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해결책을 한번 생각해 보자.
어떻게든 방법이 있지 않을까?
복도는 고요했다.
하기야 모두가 하교한 지 오래였다. 나만 라일라에게 설명하느라 남았을 뿐.
다행스럽게도 남은 설명은 무사히 마쳤고 라일라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라일라 또한 전형적인 범고래 중 한 사람이지만.
그와 별개로 공정함만큼은 칼 같은 사람이니, 분명 이 상황에서는 내 편을 들어 줄 거다.
의문스럽지만 아빠가 내린 명령도 있을 테고 말이다.
“으, 아야야.”
나도 모르게 입술에 힘을 준 탓인지 입술이 아팠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홱 돌렸다.
‘기척.’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정확하게는 내가 문을 열고 나올 때부터 희미하게 기척을 느꼈지만, 나와 상관없다 생각해서 방관하던 중이었다.
이제는 방관할 수 없게 되었지만.
나는 가까이 다가온 사람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안녕하세요, 공녀님.”
나지막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흡사 노래하는 듯한 음율도 느껴졌다.
나는 솜털처럼 새하얀 머리카락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루가와 루바가 이대로 성장하면 꼭 이렇게 되지 않을까?
‘걔넨 10년 뒤, 20년 뒤를 계속 스포당하면서 살겠네.’
눈앞에 서 있는 남자는 쌍둥이의 부친이었다.
“루가랑 루바는?”
나는 인사보다도 얼른 쌍둥이의 안부를 물었다.
쌍둥이를 데리고 돌아간 게 아니었나? 왜 여기 있지?
내 의문을 느낀 건지 쌍둥이의 아빠가 쓰게 웃었다.
“가주님이 오셔서 데려갔습니다.”
가주, 쌍둥이의 모친이었다. 나는 작게 안심했다.
“얼른 치료받아. 애들은 뇌진탕에 약하잖아. 특히나 이 나이 대 벨루가들은 더더욱 머리에 가해지는 충격에 취약할 테고.”
“…….”
남자는 조금 놀란 얼굴을 하더니 끄덕였다.
“저희에 대해 잘 아시는군요.”
“조금은.”
“……과연 저희 아이들이 허언을 한 건 아니군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가주님께서 데려가실 때 의사와 함께 동행했습니다. 다행히 외견상으론 머리나 생명에 큰 지장은 없어 보인다더군요.”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었다.
“그리고 아이들의 특기에 대해서 잘 알고 계셨다고 들었습니다. 덕분에 위기를 모면했다고 루바가 울면서 말하던걸요.”
“뭐, 그런 일이 있긴 했어.”
이야기만 들었을 뿐이라 정말 될진 몰랐지만.
“하지만 정말 가능한 줄은 몰랐어. 보통 고래 아이들의 특기는 여덟 살 이후에나 능숙하게 쓸 수 있다고들 하던데 대단하던걸.”
“알파반에 들어갈 정도로 우수한 아이들이니까요.”
그런 우수한 아이들이 나랑 엮였다가 무슨 봉변을 당한 것인지.
나는 가슴을 누르면 쓴 물이 나올 것 같은 기분에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어 올렸다.
“우선은 사과할게. 미안해.”
남자는 당황하지 않았다.
대신에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외람되지만 공녀님, 무엇에 대한 사과이신지 감히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꽤 신기한 사람이었다.
범고래 직계손을 앞두고 가신들이 보이는 반응은 대체로 두 가지였다.
매우 어려워하거나 공포에 질리거나.
하기야 내 나이와 외양이 이러한 만큼 어렵거나 공포에 질릴 일은 없겠지만 이를 감안하더라도 평온한 동시에 지나치지 않게 공손했다.
‘보통 머리가 좋은 자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하고 평온한 편이지.’
“첫 번째로 루가와 루바는 내 일에 휘말린 거야. 여기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야.”
“공녀님께서 원하신 일이 아니니, 사과하실 이유는 없을 듯합니다…….”
“그리고 멍청하기 짝이 없는 범고래들을 대신해 사과하지.”
남자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마치 잘못 들었다는 듯이.
“네?”
“가끔 아니, 꽤 많이. 범고래들은 힘만 세면 뭐든 무시해도 되는 줄 알지. 도덕, 선함, 윤리, 규칙. 뭐 이런 것들 말이야.”
그 애들은 바이얀에게 얻어맞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앞선 회차에서 바이얀이 벨루가들에게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잘 알기에 더욱 신경이 쓰였다.
“그런 멍청이들과 같은 범고래란 점이 참 유감스럽지만. 그런 악함에 휘말린 루가와 루바에 대해선 대신 사과할게. 미안해.”
나는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가 들어 올렸다.
“그 애들의 치료비는 내게 달아 둬도 좋아.”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지금 당장은 돈을 지불할 수 없지만, 곧 내게 돈이 생길 거거든. 그때 돌려줄게.”
“……이야기는 익히 들었지만. 때로 소문이 과소평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해야겠습니다.”
나는 작게 웃었다.
“왜, 말을 너무 잘해?”
“아니요, 사려 깊으심에 놀랐습니다. 저는 범고래와 선량함이 함께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며, 도덕과 윤리가 범고래가 가는 길에 함께 갈 수 없다고 여겼으니까요.”
나는 잠시 복도를 흘끗 보았다.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과 동시에 남자에게서 말이 다시 흘러나왔다.
“사과해야 할 것은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른 바이얀 님과 그 휘하의 범고래들입니다.”
명료한 말. 하지만 쉬이 할 수는 없는 말이었다.
아무래도 여긴 범고래 가문이니까 말이다.
‘나는 이런 입바른 소릴 하는 수인들을 참 좋아했지. 앞 회차가 그립네.’
이런 애들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자기 할 말을 하고 소신을 펼친다.
바꿔 말하면 이런 사람한테 신뢰만 얻는다면 죽을 때까지 충성을 바친단 소리다.
아마 내가 이번 생에도 가주를 노렸다면 탐냈을지도 모르겠다.
“당신 이름이 뭐야?”
“이런, 경황이 없어…… 저희 아이들을 구해 주신 분께 감히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로바 벨루가입니다.”
이름을 듣는 순간 나는 눈을 깜빡였다.
어라라.
‘이 사람이었어?’
이름을 듣고 조금 난감한 기분이 먼저 들었다.
그도 그럴 게, 앞선 회차에서 벨루가들이 바이얀 손에 제거되었단 이야기는 익히 한 바 있는데.
기억을 차차 더듬어 보니 최초의 원인이 된 사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벨루가요? 걔들 진짜 불쌍한 애들이에요. 거기에 진짜 똑똑해서 전대 가주님까지 눈여겨보던 놈이 하나 있었거든요. 근데 그걸 어떻게 알고 바이얀 그 인간이 먼저 가서 협박한 거죠.”
“협박?”
“예. ‘잔말 말고 날 따라라.’ 하고 말입죠. 근데 인재가 왜 인재겠습니까? 특히나 벨루가는 자유를 중시하는 애들인데 그런 폭력적인 주군을 따르겠어요? 당연히 거부했고, 그때부터 시작이었던 거죠.”
“바이얀 그놈은 업이 참 크다 커.”
“그죠. 그 전대 가주님이 눈여겨보던 놈이 제 동생의 친구라 아직도 기억해요. 로바라고. 되게 젊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