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범고래 아기님 (35)화 (35/275)

제35화

‘첫째 형보다 더 오싹한 건 처음이야.’

물론 아게노르라고 놀고만 있진 않았다.

무려 여동생님의 명령이었다.

이를 어기면 어떤 벌이 있을지 약간, 아주 약간은 기대됐지만!

‘정말 쫓겨나면 안 되지.’

실망시키는 건 안 될 노릇이다.

다행히 칼립소와 이쪽에 7:3 정도로 나뉘어서 덤빈지라 자신 쪽은 수월했다.

저 숫자를 감당하고 있는 칼립소가 대단한 거였다.

‘대단하지만…….’

아게노르의 얼굴로 근심이 스쳤다.

아무리 대단하다고는 하나 리치의 차이가 분명했다.

게다가 다수와의 전투였기에 어쩔 수 없이 다치고 상처가 쌓이는 게 눈에 보였다.

그러나 잠시 뒤, 아게노르는 자신이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었음을 알게 되었다.

‘앗! 이런.’

아게노르 또한 한계가 있는지라 아주 잠깐 한 놈을 놓쳤을 때, 바닥에 기절한 루가에게 손을 뻗는 범고래가 보였다.

아게노르의 손보다 그쪽이 더 빨랐다.

그러나 범고래는 루가에게 손을 대는 대신 그대로 귀를 잡고 털썩 주저앉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게노르 근처에 있던 범고래 방계들이 모두 비슷하게 귀를 잡고 주저앉아 괴로움에 신음을 흘렸다.

“……공자님. 실례지만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아게노르가 천천히 고개를 들자 새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남성이 보였다.

아게노르는 처음 본 사람이었는데도 바닥에 쓰러진 쌍둥이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흡사했다.

아니나 다를까 엉엉 울던 나머지 쌍둥이 쪽이 매달렸다.

“아, 아뺘, 아뺘! 효, 횽이, 눈을 안 떠……! 공뇨님이, 공뇨님이!”

“설명은 잠시 뒤에 들어.”

아게노르는 피를 닦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한편으로는 기분이 묘했다.

귀를 잡고 주저앉은 범고래놈들 사이에서 자신만 멀쩡했기 때문이다.

“내 여동생님 쪽도 끝나가는 것 같으니까.”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칼립소의 손이 푸욱! 누군가의 목을 타격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그와 동시에 누군가가 소강 사태를 선언하는 소리가 함께 울려 퍼졌다.

다행스럽게도 찾아온 이는 이 초급 기관의 이사장, 라일라였다.

라일라는 아주 잠시 아연한 표정으로 이 모든 광경을 보았다.

숨이 꿀꺽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 * *

‘멍청한 놈. 소르테의 말은 한 귀로 듣고 흘린 모양이지?’

바이얀이 루가를 인질로 붙잡고 협박하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저놈은 다름 아닌 이곳 1층에서 일을 벌인 걸 처절하게 후회하게 될 거다.

놈이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면 알면서도 무시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곳 초급 기관과 중급 기관 사이에는 강력한 불문율이 하나 있었다.

“상황을 모두 설명하세요.”

라일라는 이번 일만큼은 좌시할 수 없었는지 나까지 징계실로 이끌었다.

‘하기야 그냥 둘 수 없는 상황이긴 했지.’

바이얀만 멀쩡했을 뿐이지 덤볐던 방계들은 다들 하나둘씩 치명적이거나 커다란 부상을 입은 채였다.

나? 나는 멀쩡하냐고?

‘음, 느낌만 봐도 그리 멀쩡하진 않은 것 같은데.’

한쪽 시야가 어째 가물가물한 걸 보니 슬슬 눈이 붓고 있는 것 같다.

뺨은 쓰라리고 한쪽 다리가 욱신거린다.

자잘한 욱신거림이야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

이건 보통 힘을 지나치게 썼을 때 오는 근육통이다.

‘뭐, 근육통은 익숙하지.’

이 부분만큼은 아빠에게 고마워해야겠다.

이 몸으로 제일 먼저 익숙해진 게 근육통이니까 말이야.

“잠깐 진정할 시간을 줄 수 있어?”

“물론입니다.”

나는 마음을 고르기 위해 이렇게 말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저는 어디까지나 사실 전후 관계를 파악하고자 공녀님을 소환한 것으로, 이 자리에서 공녀님께서는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닙니다.”

오, 역시나 공정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그러나 아주 잠깐 나를 복잡한 시선으로 보던 라일라가 찡그리더니 작게 덧붙였다.

“하지만 저도 인간인 이상 측은지심이 어디로 향할지는 모르겠군요.”

“그거 이사장이 해도 되는 말이야?”

나는 작게 웃었다.

“이사장이지만 따르는 분이 있으며, 명을 받고 움직이는 사람이기도 하니까요.”

왜일까.

그 말이 몹시 든든하게 느껴졌다.

앞선 회차에서 내가 물건을 훔치지 않았다고 결론을 짓던 라일라를 보던 그때처럼.

‘바로 앞 회차에서 라일라는 내가 돌아왔을 때 이미 저택에 없었지. 무슨 이유로 사라졌던 걸까.’

아마 이것도 기억을 뒤져 보면 나올지도 모른다.

내 수하들은 정말이지 너무나 수다스러웠으니까.

‘이번 회차에선 내가 도와줄 수 있다면 좋겠는데.’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치료가 필요하십니까? 치료 먼저 하시더라도 괜찮습니다.”

“아니야, 괜찮아.”

이건 기회였다.

아마 바이얀을 비롯한 놈들은 치료부터 하고서 느지막이 여기에 나오겠지.

“바이얀과 그 패거리는 치료받으러 갔어?”

“네. 그렇습니다.”

역시나.

“우선 미리 말해 두는 건데, 처음 공격을 시작한 건 그쪽이야. 공격당한 건 우리라고.”

“예, 경청하고 있습니다.”

“정확히는 내가 아니라 함께 있던 흰돌고래 수인 아이가 가장 먼저 폭력을 당했어.”

그 이전에 내가 바이얀의 손을 꺾은 게 있지만, 모르는 일이다.

나는 안다. 바이얀은 자존심 때문에라도 죽어도 이걸 말하지 않을 것이다.

“믿겨? 흰돌고래 수인 아이는 고작해야 일곱 살이 채 안 된 아이야.”

“…….”

나는 붓기 시작한 얼굴을 들어 올렸다.

“우리 범고래들이 아이를 보호하는 데 큰 관심이 없단 사실은 내가 가장 잘 알지.”

이 평화로운 육아물 세상 속. 가장 사악한 악당 범고래.

그 이름에 걸맞게 여긴 아이가 보호받는 시스템 따윈 없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범고래를 비롯한 전투 계열의 고래 이야기야, 안 그래?”

“……그렇습니다.”

모두가 공평한 울타리에서 태어나 생존한 자만이 누리며 강한 자만이 얻는다.

“그리고 난 알고 있어. 이곳 초급 기관과 중급 기관 사이에는 어겨선 안 될 규칙이 있어. 다시 말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칙이지.”

“…….”

나는 속으로 웃었다.

설마하니 내가 믿는 구석 하나 없이 패싸움을 시작했을까.

“중급 기관의 학생은 어떤 상황에서도 초급 기관의 학생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다.”

바이얀 너는 네 직위를 철석같이 믿고서 그 자리에서 일을 벌였겠지만 그게 네 실수였다.

그곳은 지나치게 넓고 공개적인 장소였으니까.

“나는 이것이 범고래 가주, 지금 우리 할머니와 동격의 이름으로 선포된 규칙으로 알고 있는데. 어때. 틀려?”

“……맞습니다.”

나는 입술을 닦으며 살짝 숨을 내쉬었다.

아, 어쩐지 입술이 따끔하다 싶더라니. 피가 맺혀 있던 모양이었다.

“오래되어 이제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규칙임에도 잘 아시는군요.”

어느새 라일라가 내민 손수건이 눈앞에 보였다.

나는 손수건을 받는 대신에 라일라를 빤히 보며 말했다.

“이건 혼돈과 혼란을 방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규칙이었어. 안 그래, 라일라?”

그리고 라일라는 이 규칙대로 일을 처리할 의무가 있다.

이렇게 말하고 싶은 내 뜻을 알아차린 듯했다.

‘오래전 일이지만…….’

오래전, 내가 이전 회차에서 잠시 초급 교육 기관을 다니던 때에 있었던 일이다.

그때도 바이얀은 지금과 비슷한 일을 벌였다.

초급 기관의 약하디약한 아이들을 사냥 놀이란 명목으로 무자비하게 괴롭히고 폭력을 휘두른 것이다.

당시에도 바이얀은 제 능력과 직위라면 아무렇지 않게 무마될 거라 생각했다.

이때 라일라가 나섰고, 마침내 열린 징계 위원회에서 깜짝 놀랄 결정이 떨어졌다.

바로 할머니가 바이얀에게 처벌을 내리는 쪽을 택한 것이었다.

‘그 누구보다 약육강식을 외치는 할머니가 내린 결정이라 다들 놀랐었지.’

그러나 바이얀의 처벌 명목은 약자에 대한 폭력이 아니었다.

‘규칙 미준수.’

그때 알게 된 것이 바로 이 규칙이었다.

“이건 그냥 넘어갈 사안이 아니야.”

그렇기에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중급 기관과 연계해 징계 위원회를 열어 줘.”

나는 라일라의 손수건을 쥐며 명확하게 말했다.

“아니, 당사자이자 직계손인 나 칼립소 아콰시아델의 이름으로 요청하는 바야.”

라일라는 잠시 입을 벌렸다가 이내 꾹 다물었다.

그녀의 얼굴로 이채가 스쳤다가, 왜인지 복잡한 표정이 떠올랐다.

“우선 징계 위원회는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공녀님. 그것도 최고위 징계 위원회가 열릴 예정입니다. 지금은 사실관계를 위해 공녀님을 모신 것이고요.”

내 얼굴로 화색이 돌았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진 말은 나를 벼랑으로 뚝 떨어트리기 충분했다.

“공녀님, 아시다시피 공녀님께서도 관계자이기에 참석은 필수입니다.”

“그런데?”

“하지만 최고 징계 위원회의 특성상 미성년인 학생의 경우 반드시 보호자를 동반해야 한다는 규칙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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