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범고래 아기님 (32)화 (32/275)

제32화

둘째 아틀란.

이 인간은 넓게 보자면 내가 앞서 욕했던 ‘바이얀’과 비슷한 성정의 인물이다.

화가 많고 난폭하고 다혈질에 잔인하기까지 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아틀란 쪽이 장난기가 많다는 거?’

셋째인 아게노르가 강자가 방심하기를 기다렸다 관계 전복을 노리는 쪽이라면 놈은 강자를 가지고 노는 걸 즐겼다.

특히나 전투에서 흐르는 피를 즐겼는데. 굳이 따지자면 안 맞고도 이길 수 있는 전투를 기어이 맞아서 피를 흘린 끝에 승리하는 걸 좋아하는 미친놈이었다.

이놈의 집안은 왜 이리 미친 자가 많은 건지 성가신 곳이다, 아주.

‘광기와 미친놈은 한 끗 차이지.’

아마 여기서 한 발짝만 더 갔다면 나는 아틀란을 그냥 맛이 간 놈이라 생각했을 거였다.

그런데 이놈은 치밀하게도 생각이 있는 놈이라 자신의 위치에 해가 될 정도로 피를 즐기진 않았다.

그게 참으로 머리 쓰는 범고래다웠다.

여기까지 생각을 마치고는 기지개를 쭉 켰다.

일단 아게노르의 미친 소리는 접수만 해 두기로 했다.

‘일단은 당장 아틀란과 마주칠 일이 없을 테니까.’

아게노르도 그렇지만 아틀란도 현재 중급 기관에 있을 것이다.

딱 중간 학년쯤 됐을 테니 더더욱 나랑은 볼 일이 없을 터였다.

“루가.”

“녜! 공뇨님!”

“루바눈 안 찾아여?”

“그래. 너도 앉아 볼래.”

나는 마침 옆에서 기차 모형을 들고 쏘다니기 바쁜 쌍둥이를 불러다 앉혔다.

아무래도 활발할 때라 그런지 앉아서도 엉덩이를 씰룩씰룩하는 모습이 오래 붙잡아 두긴 글렀겠다 싶어 빠르게 입을 열었다.

“너흰 쌍둥이지? 사이도 좋고.”

“사이 안 조아여!”

“안 조아여!”

“안 좋다고?”

루가와 루바가 서로를 보더니 끄덕였다.

“아빠눈 사이좋게 지내라구 하눈데…… 루바는 맨날 자기가 형이래여.”

“내가 형 맞거둔?”

“이거 바여. 바여. 어른스러운 제가 참눈 거예여.”

“웃기지 먀. 공뇨님, 루가는 맨날 거짓말만 해여!”

“아니거둔?”

“맞거둔?”

“어어…….”

저기, 얘들아? 싸우지 말렴. 워워. 진정해.

졸지에 사이좋은 쌍둥이를 싸우게 만들 수도 있겠단 위기감이 들었다.

나는 얼른 두 사람을 뜯어말리기 위해 틈새를 비집고 낑겨 앉았다.

루가루바는 언제 다퉜냐는 듯 내 손을 하나씩 잡고 희희낙락했다.

“와, 우리 투닥투닥하면 공뇨님이 손잡아 줘여?”

“잡아 주는구나!”

“학습하지 마. 이 영악한 것들.”

“헤헤.”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너네 혹시 다른 형제도 있니?”

“없어여. 엄마눈 더 낳고 싶지 않대여.”

“가주라 바빠여!”

“그래?”

보통 가주들이 아이를 많이 낳는 편은 아니긴 하지.

할머니가 좀 예외긴 했다.

“대신 사촌운 많아여!”

“엄청엄청 많아여!”

“그래?”

우리 대화에 관심이 생겼는지 근처에서 놀던 고래 아이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나는 모인 김에 여기서 형제가 있는 애들을 추렸다.

“우리 횽님운 맨날 간식 뺏아 머거여!”

“우리 횽운 잘해 주눈데!”

“너네 형은 몇 살이니?”

“스무 땰이여!”

“기각. 다음.”

“저눈 남동생이 있눈데, 엄먀가 동생만 조아해여…….”

그리고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눈 끝에 우리 반에서 대체로 형과 사이가 좋은 아이들은 나이 차가 꽤 나는 경우를 제외하면 드물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도 셋째 오빠처럼 조져 달라는 수준은 아니고 평범하게 투닥투닥하지만 형제에 대한 정은 넘치는 수준이었다.

“근데 공뇨님 오눌도 카론이가 안 와써여.”

“안 와써여.”

“아아. 그래.”

한창 데이터를 통해 아게노르와 다음에 어떤 대화를 나눠 볼까.

셋째 오빠의 인성을 걱정 중이던 나는 고개를 들었다.

‘오늘 결석이었지?’

카론은 며칠째 결석이었다.

나와의 일이 있는 후부터였다.

나만이 유일하게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벨루가 쌍둥이에겐 티를 내지 않았다.

“카론이 없어서 편하니?”

그러자 루가루바가 서로를 보다가 머뭇거렸다.

얼굴은 분명 긍정인데, 대답을 망설이는 것 같았다.

“카론이눈 선샘님 안 보고 싶을까여?”

“나눈 보고 싶울 것 같운데.”

교사들이 꽤 방목적으로 애들을 교육시키는 것치고는 애들은 애들답게 선생님들을 참 좋아했다.

나는 쌍둥이 형제가 그렇게 괴롭힘을 당하고도 카론을 생각해 주는 걸 보면서 기분이 묘해졌다.

‘내가 얘들이라면 영원히 안 와도 좋겠다 생각할 것 같은데. 아, 내 손으로 복수 못 해서 아쉽다는 생각은 하겠다.’

이게 내가 잃어버린 동심, 뭐 그런 건가.

나는 반을 쭉 둘러보았다.

카론이 결석한 후로 범고래 방계들 사이의 분위기는 조금 묘했다.

원래는 아예 하나로 똘똘 뭉쳐 다녔던 것 같은데, 미묘하게 두 무리로 나뉘었다고 해야 하나.

게다가 무리끼리도 은근히 배척하거나 서로를 적대하는 느낌이었다.

며칠 사이에 형성된 분위기치고는 참 신기하고 묘했다.

‘쟤네들을 나누는 기준이 뭐지?’

쟤들을 잘 알 만큼 대화를 나눠 보지도, 관심을 두지 않아서 그저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위협도 안 될 저놈들까지 신경 쓰기에는 시간이 아깝다.

* * *

“안녕하세요, 공녀님.”

그날 모든 교육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나는 교실 앞에서 익숙한 사람과 마주했다. 바로 라일라였다.

“응. 혹시 나한테 볼일 있어?”

그녀가 마치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서 있어서 의아함을 느끼게 했다.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잠시 이 반의 교사와 나눌 이야기가 있어 왔을 뿐.”

그런 거라면 더욱이 이상했다.

교사를 자신이 있는 곳으로 부르면 될 것을? 평소에는 그러지 않았나?

내가 알기로 라일라는 자신의 이사장실에서 잘 나오지 않는 성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런 것치곤 우리가 유달리 좀 마주하긴 했지?

“그럼 교사를 부르지 않고서?”

“아, 때론 직접 봐야 할 일도 있어서 말이에요.”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물었다.

“혹시 범고래 무리에 관한 일이야?”

“…….”

그러자 잠시 입을 다물었던 라일라가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하는 대부분의 일이 범고래 가문과 관련된 일일 겁니다.”

이걸 이렇게 피해 가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라일라와는 한 번쯤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오늘은 때가 아닌 것 같았다.

아이들이 아직 다 떠나지 않아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고 있는 데다가.

교사를 보러 왔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저기 카밀이 안절부절못한 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녀님.”

“왜?”

그렇게 돌아서 가려고 하는데, 라일라가 문득 나를 불렀다.

“얼마 뒤에 가문 회의가 있다는 걸 아십니까?”

가문 회의. 이미 청어 자매에게 들어서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라일라의 얼굴로 살짝 놀라움과 이채가 스쳤다.

“역시 피에르 님께서 알려 주신 겁니까?”

“그건 아니지만 다른 출처가 있긴 해.”

“그분이 아니시라니, 꽤 정보가 빠르시군요?”

그런가? 청어 자매들이 워낙 아무렇지 않게 떠드는 걸 봐서 사방팔방 퍼진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다 아는 소식이 아닌가?

난 어깨를 으쓱했다.

라일라는 복도를 한번 훑어보더니 이내 나를 빤히 응시했다.

그러고는 우아하게 다리를 굽혀 나와 눈높이를 마주했다.

“조심하세요, 공녀님.”

작게 낮춘 목소리였다.

이윽고 고개마저 숙여 귓가에 속삭였을 때, 아마도 나만 들릴 만한 작은 목소리가 이렇게 말했다.

“여태까지 유망주들이 모두 가문 회의 직전에 사라지는 일은 흔한 일이었으니까요.”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대신 말간 눈으로 라일라를 향했다.

곧 내 얼굴로 예쁜 웃음이 어렸다.

“괜찮아. 아빠가 날 지켜 줄 테니까.”

“네, 그렇네요.”

라일라 역시 마주 미소 띠었지만 곧 웃음기를 지우며 말했다.

“하지만 방심하지 마세요, 공녀님. 이 거대한 가문은 틈이 너무나 많답니다.”

“조언 고마워.”

말은 이렇게 했지만 아빠가 나를 지켜 줄 리가 없으므로 나는 조금 심각해졌다.

‘아마 무슨 일이 있을 것 같아서 라일라가 친히 경고를 해 준 것 같은데.’

계단으로 다가가자 기다렸다는 듯 루가루바 형제가 고개를 홱 내밀었다.

아, 깜짝이야.

쌍둥이는 오늘도 이 시간만을 기다렸다면서 나를 번쩍 들어 계단 밑으로 날랐다.

……이제는 이것도 익숙해지네.

“고마워 얘들아. 조심해서 가.”

“녜! 내일 바요, 공뇨님!”

“바요, 공뇨님!”

오늘은 애들 아빠가 데리러 오는 날이 아니었는지, 다른 이가 쌍둥이를 데려갔다.

그렇게 고개를 돌리다가, 나는 그대로 멈칫했다.

“와, 놀랐어.”

그곳에서는 편안한 복장을 한 아게노르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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