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화
‘곧 달려오겠군.’
피에르는 분수대에 앉아 길 끝을 보며 나른하게 생각했다.
모든 것이 귀찮고, 또 귀찮다.
피에르 아콰시아델의 일상은 규칙적이고 단조로웠다.
달리 말하자면 정해진 루틴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 그의 일상에 최근 한 가지 추가된 일이 있다면 갑자기 제자가 된 칼립소를 훈련시키는 일이었다.
어째서 제 딸이 제자랍시고 나타나 제 밑에서 구르고 또 구르는지 모르겠으나.
‘굴리다 보면 알게 되겠지.’
피에르는 비교적 느긋했다.
그는 간만에 느끼게 된 흥미 어린 문제를 천천히, 달걀 껍질 까듯이 느릿하게 즐겨 볼 생각이었다.
그래, 그럴 생각이었는데…….
그의 딸은 나타난 순간부터 예상을 빗나가는 것으로 모자라 가끔 생각지 못한 문제를 터트렸다.
지금처럼.
“인사해, 스승님.”
칼립소는 활짝 웃었다.
그러고는 옆에서 쭈뼛쭈뼛 기를 펴지 못하는 아게노르를 해맑게 소개했다.
“여긴 내 오빠야.”
“……그래서?”
피에르가 바보가 아니고서야 나타난 소년이 제 어린 시절과 퍽 닮은 아들임을 눈치 못 챌 리가 없었다.
피에르는 침묵했고, 지켜보던 아게노르는 더욱 희게 질렸다.
“…….”
지금 이 상황,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과 다를 게 뭐지?
그 사이 칼립소는 눈썹을 홱 치켜드는 피에르를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이제 저 애비의 감정 표현이 조금 보인달까.
‘저건 심기가 불편하단 소리지.’
그러거나 말거나 칼립소는 웃으며 슬쩍 눈치를 보았다.
“스승님.”
칼립소는 피에르가 자신의 셋째 아들인 아게노르를 보는 것을 느끼며 준비했던 대사를 꺼냈다.
아주 활짝 웃으며!
“혹시 두 번째 제자는 안 필요해?”
* * *
다음 날.
제아무리 강력한 범고래라 하여도 졸음이 쏟아질 것 같은 나른한 오전이었다.
곧 점심시간인 걸 알면서도 자꾸만 하품이 쏟아지는 시간.
이럴수록 낭독하는 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텐데.
너무나 평화로운 날이었다. 기울이기는커녕 눈이 감길 것만 같았다.
‘안 되지, 안 돼.’
할머니도 돌아온 이상, 더더욱 모범을 보여야 할 때였다.
반듯하게 자세를 유지하는 동안 어디선가 키득대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 고개를 돌리니, 놀랍게도 카론 놈이 다른 방계 범고래와 키득대고 있었다.
‘웬일이래?’
내게 한 방 먹은 뒤로 쥐 죽은 듯이 살던 놈이었다.
플랑크톤도 이처럼 기척이 없을 수는 없겠다 싶을 정도로 살던 놈이.
기분 나쁘게 히죽대고 있다니?
게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완전 겁먹고 움찔하긴 했지만 기가 완전히 꺾인 느낌은 아니었다. 요거 뭔가 있겠다 싶다.
‘요 며칠 그냥 뒀더니, 다시 기가 산 건가?’
저걸 그대로 뒀다가 쌍둥이라거나 다른 애들을 때리고 다니는 깡패로 돌아가면 곤란했다.
그렇지 않아도 루가루바 쌍둥이에게 약속도 했겠다, 날을 잡아야지 다짐하며 잠시 생각을 털어 냈다.
그렇게 점심시간이 되었다.
“공뇨님!”
“공뇨님!!”
오늘은 조금 특별하게도 하녀들과 점심 대신 다른 이들의 방문을 받았다.
“점심 준비해써여!”
“가치 먹어여!”
“좋아.”
어제 루가루바 쌍둥이에게 물어본 것이 있기도 한 데다, 겸사겸사 오늘은 같이 점심을 먹기로 했다.
이미 하녀들에게도 아침에 미리 말해 둔 참이었다.
“공뇨님 기분이 좋아 보여여.”
“보여여!”
“그래 보여? 음, 틀린 말은 아니겠네.”
나는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쌍둥이들은 날 따라서 웃다 말고 멈칫했다.
“공뇨님 팔이 아파여?”
“아야 했어여?”
“아아, 이거? 별거 아니야.”
나는 멍든 팔을 소매에 얼른 숨겼다.
이건 말이지…….
“어제 굉장한 일이 있었거든.”
“굉장한 일이여?”
“응. 아무도 모르는 부자 상봉이랄까…….”
으음. 굉장했지. 굉장했어.
나는 슬쩍 어제 일을 떠올렸다.
“혹시 두 번째 제자는 안 필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