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이들은 낑낑대거나, 느릿한 속도로 교구를 맞춰 보고 있었다.
‘그나저나 카론 저놈은 얼마나 멍청하길래 여기서 버벅거리고 있는 거야?’
마지막으로 그날 이후 내게 찍소리도 못하고 숨죽여 지내는 카론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내 인생에서 이렇게 순조로운 삶이 있었던가.
여기에 불안함을 느끼는 나도 정상은 아니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 인생이 얼마나 기구했는데!’
물론 고작 세 살에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건 알지만.
직전까지 너무나 잘나가고 있던 인생이 원작 남주의 계략으로 거하게 망하고 말아먹었지 않은가!
이 경험은 내게 경각심을 주었다.
‘제아무리 인생이 잘 흘러가는 것처럼 보여도 변수 하나가 말아먹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걸!’
내가 씩씩 숨을 몰아쉬는 사이 해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뇨님, 다 해써요? 나도 다 했는데!”
“다 했는데!”
“……문득 궁금한 건데 너희는 늘 세트로 말하는 게 취미냐?”
“앗, 루가가 따라하눈 거예여!”
“안이야, 루바가 따라하눈 거예여!”
“그래그래. 취미인 거구나. 존중하마.”
나는 아무렇게나 끄덕이며 루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루바도 자기도 해 줘야 한다고 주장해서 똑같이 쓰다듬어 주었다.
“공뇨님! 선샘님이 다 하면 블록해도 된대여! 블록노리 할래요?”
“아니, 이 몸은 그런 유치한 놀이는 하지 않는단다.”
나는 루바의 청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블록을 건네던 쌍둥이는 물론 활동에 집중하던 다른 아이들도 총총총 달려와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게 아니던가.
……뭐야.
“와, 머싯어.”
“우리 아빠가 쓰눈 말투에여.”
“나도 쓰고 시퍼!”
나는 고개를 살살 흔들었다.
“너희는 좀 더 크면 쓰도록 해. 나이에 맞는 말투가 있는 법이니까.”
“네!”
“네에!”
몰려온 아이들이 열심히 끄덕였다.
나는 아이들을 해산시켰다.
고민에 방해돼. 저리 가. 훠이훠이!
그렇게 남은 건 결국 다시 쌍둥이였단 점은 애석했지만 말이다.
“공뇨님, 저히 엄마가 공뇨님 한번 보고 싶대요.”
“그래? 고맙지만 나는 아무나 만날 수 없는 몸이라고 전해 주거라.”
“앗, 하디만 꼭 인사하고 싶대요!”
“싶대요!”
삐약삐약. 마치 병아리처럼 조잘대니 무시하기도 어려워 고개를 돌렸다.
“웬 인사?”
“감사 인사요!”
“공뇨님 덕분에 이제 우리 카론이한테 머리 안 맞아요!”
“발로 차이지도 안아!”
내 표정이 미묘해졌다.
이 애들이 괴롭힘을 당했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떠올랐으니까.
물론 고래 애들은 몸이 튼튼한 만큼 지구에서 보았던 보통 인간 애들과 비교하긴 어렵단 걸 알면서도 조금 짠해졌다.
“……그렇게 많이 맞았어?”
“우리랑 니로가 제일 마니 맞아써요.”
“맞아써. 마자마자.”
니로는 이 반에 있는 귀신고래 수인 아이의 이름이었다.
나는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손을 풀었다.
“지금이라도 한 대 더 때려 주랴?”
“헉, 정말여?”
“헉!”
“응. 선생 몰래라면 한 번쯤 가능할 것 같은데.”
생각해 보니 애들을 얼마나 패고 다녔는데 한 방으로 복수가 될까 싶었다.
그리고 우리의 벨루가 쌍둥이는 이것이 무척이나 기쁜 듯 눈을 반짝거렸다.
“공뇨님 충성할게요!”
“충송해요!”
“뭘 또 충성까지야.”
지금은 너희 충성 받아 봐야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단다. 좀 더 자란 다음이면 모를까.
나는 훠이훠이 손을 내저으며 이제 그만 가 보라고 했지만 쌍둥이는 물러나지 않았다.
이 빨판상어 같은 것들!
“공뇨님 피료한 거 없어요? 우리 집 부쟈에여!”
“응. 우리 아빠가 더 부자란다.”
“공뇨님 저희 집에 맛난 거 많아요!”
“응. 난 충분히 등 따시고 배불러.”
아니지. 나는 문득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어떤 생각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그대로 늘어져 있던 자세를 바로 했다.
“나한테 뭘 줄 필요는 없고 궁금한 건 하나 있는데 말이야.”
“녜!”
“녜!”
“너네, 혹시 요리해 본 적 있니?”
“녜에?”
말을 꺼내 놓고 보니 괜히 물어본 거 같다.
그래, 이 어린애들한테 물어볼 질문이 아닌데 말이야.
갑작스럽게 떠오른 생각이라 얼떨결에 입 밖으로 술술 나와 버렸다.
“……음, 아니다. 아니야. 내가 상대를 잘못 골랐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려는데, 양손이 덥석 붙잡혔다.
“요리해 봐써요!”
“저희 아빠가 자래요!”
“그래?”
얘네 말로는 벨루가 집안에서는 남자가 요리를 잘하지 못하면 사랑받지 못한다나.
그런 말은 처음 들었지만 얘네가 그렇다고 하니 일단 끄덕였다.
“그래? 그럼 그 요리 잘하는 너희 아빠한테 좀 물어보자. 뭐냐면…….”
* * *
“점심시간이에요!”
“이에요!”
초급 교육 기관에서 점심시간은 이러했다.
아침에 가져온 도시락을 먹거나 하녀들이나 시종들이 시간 맞춰 직접 가져다주는 걸 먹는다.
개중 아이들을 끔찍이 생각하는 집안에서는 친지가 직접 끼니를 챙겨 오기도 했다.
내 경우 나를 그렇게 생각하는 가족이나 친지는 없지만 그렇다고 밥을 굶지도 않았다.
“꺄아, 칼립소 님. 아 하세요. 아아~”
“아아~.”
“꺄아악, 너무 귀여워.”
아무래도 회차를 거듭하며 바뀌는 것들이 있다.
이번 회차에서도 그랬는데, 유독 달라진 점이 하나 더 있다면 하녀들과 처음으로 친해졌다는 것이다.
이상한 점이긴 하다.
이전 회차들에서는 노력해도 바뀌지 않았는데 말이다.
‘나라고 노력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어.’
다만 1, 2회차에서처럼 물의 힘을 각성하지 못한 때에는 일개 하녀조차 보기 힘든 가혹한 골방에서 버티다가 팔려 갔고.
3회차에서는 누군가와 친해질 시도조차 못 한 채 집에서 도망쳤으며, 돌아왔을 땐, 하녀들과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될 강자가 되어 버렸다.
그렇다 보니 새롭게 일어난 일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청어 수인들은 유달리 적응력이 좋다고들 하더니.’
그녀들은 그 허름한 건물에 적응하기 무섭게 나를 귀여워하기 시작했다.
정말 대단한 적응력이었다.
‘어색하네…….’
내게는 무척이나 어색한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게 이 세계에서 나를 예뻐라 해 주던 사람이 있었어야 말이지.
게다가 제아무리 의지가 몸을 지배한다지만 가끔은 본능적으로 어린아이 같은 행동이 나와 곤란하기도 했다.
지금도 봐라. 음식을 눈앞에 두니 몸이 먼저 달려들 듯 반응할 뻔했다.
‘그러면 안 되지.’
그래서야 내가 언어를 극복한 보람이 없는걸.
나는 근엄하게 포크와 수저를 잡고 말했다.
“다음엔 소시지가 좋겠구나.”
“꺄아, 네! 칼립소 님.”
막 도시락 반찬을 정리해 주던 에이야가 고개를 번쩍 들고는 열심히 끄덕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비요와 데데 두 사람은 신나서 내 양옆에 서고는 물어봤다.
“칼립소 님, 머리가 헝클어졌는데, 이번엔 양 갈래로 땋아 올려도 될까요?”
“된다. 하지만 너무 당겨 묶지 말거라. 고개 숙이면 아파.”
“네, 그럼요! 그럼요!”
“저도 함께할게요!”
대체 미사는 하녀들과 언제 이렇게 친해진 것인지, 이제 오래 알던 사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듯했다.
두 사람이 열심히 머리를 묶어 주고, 미사는 밥 먹고 먹자며 사탕과 초콜릿을 흔들었다.
에이야는 열심히 비행기를 태우며 수저를 내밀었다.
굉장히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젠장, 이렇게 줄 필요는 없는데. 할머니가 알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나 곧바로 생각을 바꿔먹었다.
그래……! 마음껏 귀여워하라고!
‘나는 나보다 약한 놈들에게는 관대하다.’
홍조를 띤 하녀들 대부분이 연약한 수중 동물 수인이라는 점이 떠오르자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분명 위엄이 떨어지는 일이지만 어차피 할머니가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뭐 어떤가 싶었다.
“어쩜 우리 공녀님 얼굴은 이렇게 희고 뽀야신지. 머리카락과 너무너무 잘 어울려요!”
“머리카락도요. 어쩜 이렇게 보드라우신지.”
“공녀님처럼 얌전한 아이는 처음이에요!”
이미 유모로서 여러 번 경험이 있다는 데데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흐음, 이렇게 훌륭하게 말을 해내는데도 아이 취급할 수 있는 건 역시 몸이 어리기 때문인가.’
나는 자그마한 손을 한번 내려다보며 묘한 감상을 느꼈다.
말했듯 이런 극진한 시중은 다른 회차에서는 없었던 신선한 일이었기에.
그래서 그녀들이 온 뒤로 가끔 머리를 다섯 가닥으로 땋는 다거나 앙증맞은 만두 머리에다가 여기에 어울리는 거추장스러운 옷을 입혀 주는 등.
귀찮게 해도 그냥 두었다.
‘행동만 보면 육아물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네.’
어쨌거나 식사 시간이기에 나는 우물우물 열심히 씹기 바빴다.
식사는 성장에 매우 중요해.
‘내게 필요한 건 성장과 용뿐이지만.’
내가 식사하는 동안 어느새 다 같이 모여 즐겁게 내 머리를 묶던 하녀들은 자신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올해도 용의 축제가 열린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