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어쩐지 불만이 쌓이는 기분이라 뒤집어엎고 싶다.
문제는 훈련의 성과가 안 보이는 게 아니니 뭐라 말도 못 하겠고.
아니, 그래도 그렇지. 빨래 한번 시키자고 이렇게 모아 두는 건…….
게다가 어떻게 보관한 건지 검은색 옷들이 하나같이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었다.
“혹시 스승님, 이 옷들 말인데…… 처음부터 받아 놓고 여기서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거야?”
“그렇다만.”
“…….”
나는 얼굴을 문질렀다.
‘아, 피에르가 깨끗한 걸 좋아했다고 한 수하놈이 누구였지…….’
이번 생애에서 만나면 죽일 테다. 반드시 죽일 테다.
보통은 자신의 방만, 그것도 자신이 쓰는 자리만 깨끗하게 쓰는 인간을 우린 깨끗하다고 부르지 않는다고 약속했어요. 이 망할 생선 자식아.
나는 속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스승님 다 좋은데, 나 물은 어떻게 해야 해?”
“아직도 물을 불러내지 못한단 말인가?”
마치 아주 기이한 것을 보듯, 정확하게는 덜떨어진 것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스쳐 지나간 아빠의 표정에 나도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힘과 민첩성, 체력은 네 나이와 견주지 못할 수준일 텐데.”
“그러엄, 내 나이랑 비교하면 되겠어? 내가 말했지? 자랑했지? 내가 8살도 때려잡았다니까.”
“그 정도도 못 하면 직계가 아니다.”
“……이래서 천재랑은 이야기하기가 싫어.”
“뭐?”
나는 당당하게 배를 내밀었다. 후후.
“아니이, 들어 봐. 나도 우리 반에서는 완전히 천재라고.”
그러자 피에르의 표정이 묘해졌다.
“네가?”
와, 말과 표정이 일치하는 것 좀 봐. 아주 언행일치의 표본일세.
“최근 범고래 유아들의 수준이 꽤 바닥까지 내려간 모양이군.”
……피에르는 할망구의 아들이 맞는 것 같아.
어쩜 볼수록 독설이 똑같을까.
본인이 지나치게 천재라 범인과 평범한 천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임을 알고 있다.
아는데도 어처구니가 없을 때가 종종 있었다. 지금처럼.
‘오빠들이 한결같이 아빠를 좋아하지 않았던 건 아빠가 이렇게 굴었기 때문 아닐까.’
가주가 되었을 때 오빠들이 하나같이 아빠에 관해서 투덜거리거나 썩 기분 좋은 표정이 아니었던 걸 봐서는 말이다.
이전 생에서는 내가 돌아오기 전에 아빠가 죽었기 때문에 잘은 모르겠지만,
“스승님은 내가 얼마나 대단한지 조금 알아야 해.”
“내가 왜.”
“그럼 스승님이 얼마나 잘 가르쳤는지 스스로 뿌듯해할 수 있잖아? 자랑도 할 수 있고.”
“일리 있군.”
그치? 범고래는 기본적으로 자기 잘난 맛에 산단 말이지.
이런 걸 보면 늘 나른하고 체념에 젖어 사는 피에르 또한 결국은 범고래구나 싶다니까.
“그나저나 스승님, 빨래하는 건 좋은데…… 그래서 물은 어떡하란 말이야?”
그러자 피에르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느릿하게 손을 움직였다.
허공에서 흘러나온 물이 산더미처럼 쌓인 빨래를 감싸더니 그대로 둥실 떠올랐다.
창문이 활짝 열렸다.
나는 빨래가 날아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와, 물의 힘을 이렇게 쓰는 것도 기예다. 기예.’
나 또한 이전 회차에서 최강자였지만, 피에르가 쓰는 물의 힘은 성격과 다르게 무척이나 섬세했다.
가끔 3회차의 나라도 저건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갸우뚱하게 만드는 컨트롤 능력.
‘……탐난다.’
너무 빤히 봤을까.
나는 창문을 넘어간 빨래가 어떻게 되었는지 보지 못했다.
“뭘 그리 보고 있는 거지?”
“응?”
“가서 빨도록.”
“그러니까, 뭘 어떡, 으앗!”
참방, 발이 젖는 느낌이 들었을 때, 나는 어느새 물에 둘러싸인 채 둥실 떠 있었다.
거대한 햄스터볼 안에 갇힌 햄스터의 느낌이었달지.
어차피 우린 수중 동물이라 물로 감싸인다고 숨 막혀 죽진 않지만…….
‘옷이 젖는다고 옷이!’
능력만 섬세했지, 성격의 섬세함은 사자 노린내만도 못한 아빠는 나를 그렇게 창문 밖으로 휙 던져 버렸다.
내가 도착한 곳은 피에르가 사는 건물 앞에 놓인 분수대였다.
분수대엔 맑은 물이 가득 채워져 있었고, 빨래가 수북하게 담겨 존재감을 자랑했다.
게다가 물들이 연신 둥실 뜨면서 어디선가 가져온 비누도 툭 던져 넣더라.
“뭐 하지? 밟지 않고서.”
고개를 들면, 창문틀에 느슨하게 기댄 채 턱을 괸 피에르의 모습이 보였다.
“스승님, 혹시…… 나를 제자가 아니라 식모로 아는 거 아니지?”
“진짜 식모는 어떤 일을 하는지 궁금한가?”
“…….”
나는 지지 않았다.
“그럼 혹시 노예로 아는 건.”
“그 또한 원한다면 체험시켜 줄 수 있다만.”
“밟으라고 했죠, 스승님?”
그러니까 결국 지금 취급이 제일 양호하다는 소리다.
나는 투덜거리며 치마를 걷고 밟을 준비를 했다.
‘진짜 이상하단 말이지. 무슨 훈련을 집안일로 잔뜩 시킨담.’
기이하기 짝이 없었다.
오히려 틈을 타 내 손으로 이 건물을 싹 치우고 쓸고 깨끗하게 만들 작정인가 싶을 정도였다.
‘아니, 세 살배기 손으로 건물 전체를 리모델링(?)한다니 양심 어디 갔냐.’
물론 여태 있었던 성과를 봤을 때 아니라는 생각이 크지만 요즘 들어 봐서는 그것도 영 간당간당하긴 했다.
뭐 어쩌겠어.
‘훈련이 안 되는 것도 아니고. 까라면 까야지.’
어느새 나는 군대 한번 가 보지 못했지만 이등병의 심정과 동화되어 까랍신 대로 열심히 밟기 시작했다.
문제는…….
‘몸무게가 가벼워!’
빨래를 밟으려면 무게가 있어야 하는데, 한참 모자랐다. 어디 세 살의 무게가 나가 봐야 얼마나 나가겠는가.
“그렇게 해서야 어디 때가 빠지겠나. 삼 일은 밟아야겠군.”
“이익……!!”
하고 있어. 하고 있다고.
나는 머리 위에서 내려오는 잔소리를 흘려보내며 고민했다.
이거 다 못 끝내면 집에도 못 갈 텐데 말이지.
지난번에 정해진 청소를 다 못 했던 적이 있는데, 저 건물에서 잘 뻔한 뒤로 나는 한번 할 때 열심히 하기로 결심했다.
“무게가 없으면 어떻게 해야 돼, 스승님? 아, 혹시 힘을 줘서?”
“그래. 네 힘은 뒀다 어디 쓸 거지?”
다리에 조금 더 힘을 줘서 꾸욱 밟아 보았다.
오, 들어간다, 들어간다……!
‘들어간다!!’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스승님, 들어가!! 봤지? 봤지! 들어갔어!!”
나는 있는 힘껏 활짝 웃었다.
물이 살짝 튀었지만, 그래도 즐거웠다.
아, 역시 더욱 강해지는 길은 즐겁단 말이지!
‘무게를 이런 식으로도 실을 수 있다니. 이거 나중에 전투에서도 작은 신체를 극복할 수 있겠잖아?!’
그렇지 않아도 고작해야 시간이 빠르게 흐르길 기다릴 수밖에 없는 몸.
이 몸은 어떻게 해야 약점을 좀 극복할지 고민하던 참이었는데!
“…….”
입 열지 말고 훈련이라도 하라며.
타박이라도 줄 것 같았건만 고개를 들면 아빠는 왜인지 고개를 돌려 버린 모습이었다.
어라, 아까는 나 쳐다보고 있지 않았나?
뭐 어때.
“스승님 말대로네. 진짜 최고야!”
옛다. 립서비스다, 애비야!
나는 키득키득 웃으며 열심히 밟기 시작했고, 그렇기에 다시 한번 정수리로 꽂히기 시작한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빠가 어둡게 가라앉은 모습이란 사실도.
* * *
칼립소는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냈다.
‘후, 생각보다 더 양이 많네.’
열심히 했지만 양이 남았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힘으로 무게는 극복했지만, 칼립소가 생각 못 한 한 가지!
‘발이 작은 걸 어떡해!’
큽, 분하다.
칼립소는 이것만큼은 시간이 제 몸을 키워 주길 바랄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분함을 느꼈다.
본인은 스스로 크게 자각하고 있지 못했지만 3회차 인생으로 인해 강해지는 것에 진심이었다.
게다가 정신만큼은 강골이었다.
스스로도 세 살, 세 살 중얼거리면서도 정작 평범한 세 살 수인은 견디지 못하리란 기본 사실은 떠올리지 못하곤 했다.
이는 이 모든 것을 시키는 아빠 피에르 또한 마찬가지니.
두 사람은 몰라도 그 아빠에 그 딸이라 할 수 있을 법한 광경이었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저무는 노을을 보며 칼립소는 고민에 잠겼다.
‘남은 걸 어떡한다…….’
내일 한다고 해 봐?
아니면 조금만 더 해서 끝내 버려?
늦어지면 어느새 울먹이며 걱정하는 토끼 같은 자식……
아니, 걱정할 청어 떼 같은 하녀들을 떠올리며 칼립소는 고민에 잠겼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림자를 느끼지 못했다.
‘저건 대체 뭐 하는 존재지.’
피에르는 조그마한 등을 보며 평생 해 보지 않았던 고민에 잠겼다.
그는 살면서 언제든 어딜 가든, 자신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존재나 물건을 본 적이 없었다.
정확하게는 어디를 가든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존재가 그 자신이었기에.
그런 관심을 귀찮아하기에도 바빴다.
“내기할까요, 범고래 공자님. 당신은 분명 언젠가 당신과 비슷한 존재 때문에 당황할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