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범고래 아기님 (17)화 (17/275)

제17화

나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을 뱉었다.

“어떤 조사?”

시종이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앞선 전임자에 대한 조사를 깊이 진행해 보겠습니다.”

“아하. 그래? 근데…… 조사는 증인도 필요한 거지? 마침 그건 나밖에 못 하겠네. 이 건물은 꽤 오랫동안 나 혼자만 썼잖아.”

잠깐 있던 범고래 방계 아이는 곧 제 부모가 몰래 데려갔다.

그런 일이 없진 않은지라, 나는 홀로 남겨졌었다.

아, 물론 이 이야기를 꺼낸 건.

‘증인이 나밖에 없을 텐데 내게 출석하라 하지 않으면 그대로 묻어 버리겠단 소리지.’

실제로 조사할 생각은 없고 지금 대답만 잘하고서 말이다.

“그, 그렇습니다. 나중에 칼립소 님께 도움을 요청드릴 일이…….”

“응, 나야 좋지. 다른 아이들이 피해를 입었을 수도 있는 거잖아.”

그 하녀는 내가 이곳에 오기 전부터 아주 오랫동안 있었다.

그렇다면 뭔가 더 있었을지도 모르지.

‘자고로 애들 때리는 인간은 절대 그냥 둬선 안 되지.’

문득 카론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자업자득인 녀석 생각은 금세 떨쳐 버렸다.

나는 시종을 흘끗 보면서 미사의 옷자락을 살짝 잡았다.

원래 손을 잡고 싶었는데 키가 닿지 않았다.

“그리고 말했듯이 유모는 이 사람으로 할 거야. 이것도 그냥 이야기하면 되는 거지?”

“……예.”

“본성에서 조사해 준다니 다행이다. 아빠한테 같이 이야기해야겠네!”

“…….”

시종이 추욱 처진 어깨를 한 채로 돌아갔다.

‘이곳을 감시하는 것도 댁들 역할일 텐데. 근무 태만은 스스로들 책임져야지.’

* * *

미사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신의 옷자락을 쥔 조그마한 칼립소를 보았다.

분명 범고래였기에 살짝 올라간 눈꼬리지만 그보다는 워낙 커다랗고 동그래 날카로운 분위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무구한 얼굴이었다.

게다가 살면서 또 이런 아이를 볼 수 있을까 싶은 빼어나게 사랑스러운 외양이었다.

그런데 말은 또 어찌나 잘하는지…….

‘천재라고, 하셨지.’

첫날에 또박또박 말을 하는 이 작은 공녀님을 보고서 얼마나 놀랐던가.

그 아이가 어느새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렇게 됐으니 잘 부탁해. 미사.”

“…….”

이상하게도 미사는 자신을 올려다보며 웃는 칼립소를 보며, 어쩐지 이 공녀님이 자신을 예전부터 알고 있던 것처럼 행동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 생각을 털어 버렸다.

‘착각이겠지.’

고작해야 3살밖에 되지 않는 분이 자신을 어디서 만났단 말인가.

미사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네. 공녀님. 최선을 다해서 모시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조그마한 공녀님이 자신을 선택했다는 점이었다.

미사는 이것 하나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 건물에 보내진 이상 자신의 역할은 어린 고래 수인들을 돌보는 것이었지만, 애석하게도 지금 이 건물엔 칼립소 하나밖에 없는 상황.

게다가 미사 또한 이토록 사랑스러운 아기 공녀님의 유모가 될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흐음, 역시 눈치가 빨라.’

칼립소는 미사가 선한데 눈치가 없는 타입은 아님을 판단했다.

하기야 눈치가 없는 타입은 전쟁에서 살아남기 어렵다.

이전 생에서 자신의 직속 부대는 아니어도 오랫동안 살아남았던 걸 보면 감각도 처세도 꽤 괜찮은 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칼립소는 더는 직전 회차에서처럼 가주가 될 생각은 없었지만, 오늘 흰돌고래 쌍둥이를 만나며 생각을 바꿨다.

‘기억났어. 이전 회차에서 흰돌고래 가문의 원조를 받았다면 더 편해졌을 거란 걸 말이야.’

고래 수인 중에서 흰돌고래 수인들은 돌고래 수인들과 함께 특히 머리가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흰돌고래 수인들은 칼립소가 가문으로 돌아오기 전에 어떤 사건으로 대다수가 죽어 버렸다.

범인은 제 큰아버지의 아들 바이얀이었으며.

이로 인해 살아남은 흰돌고래 수인들은 모두가 이 땅을 떠나 버렸다.

‘적어도 이전 회차처럼 가문이나 전쟁을 위해 인재를 모을 필요는 없지만.’

앞으로 자신이 이곳을 떠날 10살 이전까지는 인재를 옆에 둘 필요성을 느꼈다.

‘다만 걱정되는 건 한 가지.’

오늘 시종이 놓고 간 하녀들. 그들은 어엿한 본성의 사람들이었다.

그녀들이 혹여나 미사에게 텃세를 부리면 어떡하지?

사실 이것 때문에 미사를 유모, 그러니까 상급자로 지정한 거기도 했다.

그러나 칼립소의 걱정은 3분 뒤 유명무실해졌다.

“꺄아, 칼립소 님 너무 귀여우세요!”

“와, 눈이 정말 크시네요.”

“저 일하면서 칼립소 님의 이야길 벌써 들었어요. 정말 똑똑하시다고 들었는데, 어쩜 이렇게 말도 잘하실까……!”

“저…….”

“꺄악, 목소리도 귀여우셔.”

“세상에 손이 앙증맞으신 것좀 봐.”

하나같이 은은한 은색 머리를 가진 이들은 도무지 말을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칼립소는 ‘분명 까탈스럽게 굴 것이다’ 그리고 ‘텃세.’

이 두 가지를 머리 저편으로 치워야만 했다.

‘……뭐지. 분명 하교했는데 우리 반에 다시 온 것 같은 기분은?’

게다가 이전 생에서는 한 번도 받아 보지 못한 대접이어서 얼떨떨하기까지 했다.

한참이나 정신없는 감탄이 지나고 나서야 칼립소는 이들의 정체와 이름을 알 수 있었다.

“청어?”

“네! 저희는 청어 수인이에요.”

“이 아이와 저는 자매랍니다.”

“저는 같이 나고 자란 일족 친구예요.”

머리 색이 엇비슷하다 싶었더니 모두가 청어 수인들이었다.

수중 동물 수인들의 다수를 차지하는 수인 중 하나이자,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종이었다.

무리 지어 다니는 이들은 대체로 성실했으며, 순하고 착한 편이었다.

‘이 모습이 진짜라면…… 미사랑 못 지낼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이제 막 소문의 주인공이 되고 관심을 끌었다곤 하나 영향력 하나 없는 게 자신의 현실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방긋방긋 웃는다는 건 정말 진심으로 반갑다는 소리 아닐까?

“본성에서 왔다고 했지?”

이름이 각각 에이야, 비요, 데데였다.

에이야와 비요는 자매. 데데는 두 사람의 동네 친구.

하녀들은 새삼스럽게 감탄했다.

“와아, 공녀님 정말 말을 잘하시네요!”

“정말 천재이신 건가요?”

“있잖아, 소문이 얼마나 돈 거야?”

그러자 하녀들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엄청난 천재라고요.”

“맞아요, 저희 같은 수인들에게도 정말 놀라운 소식이었어요. 세 살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은 처음 봐요.”

“맞아, 맞아. 벨루스 님와 아틀란 님도 이 정도는 아니셨지 않아?”

“그치, 그치!”

또다시 대화가 시작될 것 같아 나는 일단 그녀들을 진정시켰다.

“자자, 이쪽은 아까 이야기 들었지만 미사. 내 유모야.”

“네, 공녀님! 여기서 일하던 분이시지요? 반갑습니다. 에이야예요.”

“비요입니다!”

“데데예요.”

“아…… 미사입니다.”

“유모님이신데 말 편하게 하세요!”

“아, 저도 하녀였던지라…….”

청어 자매들이 어찌나 붙임성이 좋은지, 1분도 되지 않아 미사와 하녀들은 서로 가족관계까지 알게 되었다.

‘심지어 지금은 돌잡이에 무슨 생선을 먹었는지 이야기 중이라니…….’

그렇게 말을 놓기까지 채 2분도 걸리지 않은 걸 생각하면 정말 대단한 친화력이었다.

칼립소는 신선한 기분을 느꼈다.

이 삭막한 범고래 가문에 이런 하녀들이라니.

사회성 특채로 고용되었다 해도 믿을 만한 능력이었다.

“그럼 다들 여기 있어. 아, 미사가 오늘 온 세 사람에게 방이랑 건물을 안내해 줘도 좋고.”

“엇, 공녀님 어디 가셔요?”

“같이 갈까요?”

“아니.”

칼립소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빠에게 갈 거야.”

그러자 하녀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상에, 피에르 님과 이야기를 나누신다더니. 진짜였나 봐!

이것도 소문이 진짜였던 거야?

칼립소는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이들의 얼굴 표정까지 읽게 된 것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다들 돌아와서 봐.”

……그래도. 돌아온 곳이 조금 시끌벅적해지겠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 * *

며칠 뒤.

초등 교육 기관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지난 시간을 진지하게 돌아보게 되었다.

아니, 최근의 삶은 나쁘지 않아.

정말 나쁘지 않아.

그런데…….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나는 눈앞에 산더미처럼 쌓인 옷을 보며 가만히 생각했다.

요즘 일과는 아주 단출했다.

일단 초등 교육 기관에 등교한다. 모든 교육이 끝나고 하교한다.

잠시 집에 들러서 하녀들이 준비해 준 간식을 먹고 피에르의 집으로 출근(?)한다.

이 일상의 반복이었다.

좋다, 그 어떤 회차보다 평화로워! 평온해! 게다가 나는 반에서 짱이야!

아주 흡족할 정도로 이 모든 것이 좋단 말이지.

“스승님.”

한 가지만 빼면.

“저기, 이 건물에 혼자 사는 거 아니었어?”

“그런데?”

내 얼굴이 살짝 찡그려졌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니, 그런데 이 많은 옷은 대체 어디서 난 거야?”

“한 건물에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하녀와 시종복의 할당량이 있다.”

“그게 저것들이라고?”

피에르에게서 답이 없다는 건 대체로 긍정을 뜻했다.

어쩐지 다 하나같이 익숙한 형태에 검은색이라더니.

“나, 이거 정말로 다 빨래해?”

……이번에도 답이 없으니 긍정이란 소린데.

‘어째, 갈수록 훈련이 미친 것처럼 보이는 건 내 착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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