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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범고래 아기님 (16)화 (16/275)

제16화

아이들의 새까만 눈동자에 별이 총총 박힌 것 같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조금씩 귀찮아지고 있었다.

피에르가 애들을 안 좋아했다고 했나? 나도 별로 안 좋아하나 봐…….

솔직히 오늘 하루 온 종일 시달린 탓이 큰 거겠지만.

“이게 처움의 느낌일까요?”

“응. 아니야. 엄마한테 가서 이르지 말렴.”

“저눈 다 커서 이론 고까지 말하지 않아요!”

“저도 않아요!”

“그래그래, 기특하다.”

나는 성의 없이 손을 흔들어 주며 계단에 발을 디뎠다.

그런데 내가 한 계단 내려가는 걸 보던 쌍둥이들이 다시 말을 걸어왔다.

“공뇨님, 계단 힘들어요?”

“힘두러요?”

“아니, 안 힘든데.”

진짜다. 힘들진 않다.

‘아무래도 아빠랑 함께한 훈련이 도움이 안 되지 않은 것 같단 말이지.’

안 되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 꽤 대단했다.

물을 만들지도 못하면서 나보다 5살 많고 덩치도 2배 가까이 되는 8살짜리를 날려 버릴 수 있을 줄은 나조차도 몰랐으니까.

나이를 고려하지 않은 미친 훈련이라 생각했는데, 판단을 잘못한 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간에 힘이 세졌으니 내려가는 건 어렵지 않은데, 문제는 이 짧은 다리였다.

‘……아무래도 이 계단을 만든 놈은 아이에 대한 배려심이 전혀 없던 게 분명해!’

그렇게 얼굴을 찌푸리는 순간이었다.

정신 차린 순간 몸이 번쩍 들어 올려졌다.

“돌고래눈 동료 도와요!”

“도와요!”

“공뇨님운 오늘부터 동료!”

“마자! 같은 반 친구친구!”

고개를 내리면 마치 가마라도 태운 듯 쌍둥이가 내 다리를 하나씩 붙잡고 들고 있었다.

누가 고래 수인들 아니랄까 봐 기본적으로 힘이 셌다.

허어, 내가 헛숨을 삼키는 사이, 눈 깜짝할 시간에 1층에 도착했다.

나는 길게 뻗은 복도를 한 번 보며 뺨을 긁적였다.

“고마워.”

‘은혜와 원수는 명확히 기억하자’가 내 신조다.

“너네 이름이 뭐야?”

덕분에 나는 그냥 지나가는 관심이려니 생각했던 것을 멈추고 흥미를 가졌다.

내가 모르는 얼굴인 것 같으니, 아마 전 회차에서 만난 이들은 아니겠지만.

“루가예요!”

“루바예요!”

“합쳐서 루가루바!”

“두비두바?”

“루가루바!”

나는 흰돌고래 아이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래, 앞으로 잘 부탁해.”

귀여운 부하놈들이 생긴 것 같다.

* * *

이상함을 느낀 건 마차에 타면서부터였다.

‘뭐지?’

함께 마차를 탄 시종의 표정이 영 이상했다.

껄쩍지근한 걸 보는 표정인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면 난감하다 못해 진땀까지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얼굴.

시종을 빤히 쳐다보자, 시종이 흠흠, 헛기침을 하더니 시선을 슬그머니 내렸다.

‘역시 이상해.’

시종의 태도가 미묘했다.

행동도 표정도.

심지어 아까 마차에 탈 때 인사도.

“오셨습니까, 칼립소 님.”

딱딱하게 굳은 표정에다가 지나치게 정중한 인사.

오히려 격식이 지나쳐 경직되어 보이던 모습이었다.

빤히 쳐다본 끝에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아하, 할머니 귀에도 들어갔나?’

앞서 말했듯 나를 오며 가며 데려다주는 시종은 할머니 직속 시종이기도 했다.

나는 이제야 할머니 귀에 내 모든 일거수일투족이 들어갔음을 알았다.

‘그래, 이 정도는 해야 귀에 들어간단 말이지?’

턱을 문지르며 피식 웃다 의자에 느긋하게 늘어졌다.

놀랄 일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막 건물 앞에 도착했을 때 낯선 이들이 서 있었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저 사람들은 뭐야?’

“저 칼립소 님, 한동안 계속 이 건물에 머무시겠단 뜻은 변함없으십니까?”

“응.”

여기가 딱 피에르와 접촉하기 편하다.

“……칼립소 님은 본성으로 옮길 예정이셨으나 이동을 거부하셔서, 대신 본성에서 지원할 이들을 이곳으로 보내기로 했습니다.”

“지원할 이들?”

“예, 칼립소 님의 시중을 들 하녀들입니다.”

그제야 문 앞에 서 있는 저 여성들의 정체를 알았다.

이곳에 정중하게 서 있는 이유도.

그러나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아, 이제야 줄을 좀 댈 만해졌다?’

내가 초급 기관에 간 데다가 첫날에 바로 월반을 한 사실은 이미 본성에도 알려졌을 텐데.

이제야 조치를 한 걸 보면, 최상위 반 정도엔 바로 가 줘야 관심을 보일 거란 내 예상이 맞아떨어진 셈이다.

하기야 내 위에 있는 오빠 놈들이 또라이에 미친 수인들이라 그렇지.

성격을 제외하고 보면 좀 우수하고 천재들이었어야 말이지.

‘근데…… 하녀들이 걸친 옷이 내가 사는 건물 벽보다 비싸 보이는데…….’

하녀들은 하나같이 순한 얼굴이었다.

정확히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대개가 똘망똘망한 낯이었고, 이 상황에 불만을 가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허어, 저 사람들 입장에서는 갑자기 유배지로 보내진 것이나 다름없을 텐데 말이다.

포커페이스인가.

나는 하녀들 사이에서 홀로 어쩔 줄 모르는 자세로 서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미사였다.

얼마 전에 이곳으로 발령받은 하녀.

그리고 ‘수원지’를 발견하는 데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수인.

“뭐, 나야 있으면 좋긴 한데……. 내 전담은 내가 정하고 싶은데.”

“전담이라 하시면.”

“유모 말이야. 유모. 보아하니 거기까지 붙여 줄 생각은 없는 모양인데, 내가 정해도 상관없지?”

“예? 예. 그렇습니다만…….”

“그럼 저 사람으로 할래.”

내 손가락 끝을 따라간 시종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홀로 서 있던 미사에게 다가갔다.

“미사야. 본래부터 이곳에 있던 사람이고, 그사이 아주 많은 의지가 되었어.”

“예……?”

물론 비록 우린 며칠 전에 처음 본 사이지만, 본래 사람은 며칠만 주어져도 천년의 정을 맺기도 한다고.

‘뭐, 우린 이야기도 거의 안 했지만.’

미사는 시종과 비슷한 당황스러운 얼굴로 나를 향했다.

뭐라 뻐끔거리려던 그녀를 입 모양으로 제지했다.

“나한테 다정하고, 착하고 나를 아껴 주고 ‘식사’도 잘 챙겨 줬단 얘기야. 특히나 식사.”

“……식사 말입니까.”

“응. 식사. 나를 비롯한 범고래와 고래 애들이 약하게 태어나는 거야 알고 있어.”

그래서 여기 버리잖아? 살아남는 애들만 키우려고.

“그렇다면 최소한 식사 정도는 챙겨 줘야…… 우리 중에 우수한 체력과 체격을 가진 아이로 살아남지 않겠어? 할머, 아니 가주님께서도 그렇게 규칙을 정하신 걸로 아는데.”

“맞습니다.”

“나는 어린 시절에 아주 많이 굶어서…… 하마터면 내 재능을 가주님께 선보이지 못할 뻔했지 뭐야.”

이 소린 내가 재능을 인정받지 못했더라면 절대 할 수 없는 소리다.

하지만 이런 말이 있지.

사람은 권력을 쥐면 안 되던 일도 되게 만든다고.

아니꼽지만 괜히 정치인이 병원에 가면 1순위 프리패스로 진료를 받는 게 아니듯.

며칠 사이에 내 위상이 달라졌다면.

이걸 굳이 이용하지 않고 썩힐 필요 없다.

‘날 굶기고 때린 이전 하녀도 그냥 둘 생각이 없지.’

여기 오는 건 말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는 신생아들이다.

그런 애들을 학대하는 재미로 살던 하녀들을 가만 내버려 둘 생각이 절대 없었다.

“과연, 또 어떤 재능있는 애가 여기서 죽었을지 누가 알아?”

“……크흠, 유감스러운 일이나 공녀님 이건 강자만이 생존한다는.”

“범고래 가문의 규칙이다. 잘 알지.”

나는 생글 웃었다.

“근데, 그럼 뜨거운 물로 화상 입는 목욕도 견디고 걸레 냄새가 나는 음식을 먹고 견디든 약 없이 배탈을 견디는 것도 정해진 시련이야?”

이에 듣고 있던 하녀들 몇이 사색이 되었다.

입을 가로막는 이도 있었다.

옳거니? 

너네들도 해 본 적 있는 것들이라 이거지?

“그런 행동을 하는 이가 있었단 말입니까?”

“글쎄, 관리는 본성이 하는 거라면서?”

“…….”

“내가 언젠가 할머니와 만났을 때 어떤 얘기를 하게 될지 궁금하지 않아?”

할머니는 내가 웬만큼 업적을 쌓지 않는 이상 다시 볼 일은 없겠지만.

이외에도 할 말은 있었다.

“그래도 아빠한테는 할 생각인데. 내가 어떻게 지내 왔는지 궁금해하더라고.”

“피, 피에르 님 말입니까?”

“응. 우리 아빠.”

나는 곧 화사하게 웃었다. 이용해 먹을 수 있는 건 다 이용해 먹겠다 이 말이야.

“아, 내가 교육 기관에서 최고 반에 들어간 건 알고 있었으면서 이건 몰랐던 거야?”

“…….”

몰랐을 리가. 내 일거수일투족이 새어 나갔다면.

분명 내가 우리 아빠 운운했던 말들도 나갔을 텐데.

“아빠가 나에 대해서 아주 많이 궁금해하셔. 오늘도 만나러 갈까 했는데.”

“저, 칼립소 님.”

“응?”

“조사를 진행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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