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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범고래 아기님 (11)화 (11/275)

제11화

라일라의 허락도 떨어졌겠다, 나는 월반했지만 당장 그 반에 들어가진 못했다.

마침 그 반이 바깥으로 외부 활동을 나간 탓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이대로 일찍 돌아가기로 했고 그 길로 피에르를 찾아온 참이었다.

‘근데 이 인간은 언제 오든 늘 분수대에 있네?’

나는 의문을 가지면서도 오늘 교육 기관에서 있었던 나의 위엄을 신나게 조잘조잘 설명했다.

이 치사한 애비는 중간중간 나를 잠수하게 하거나 뺑뺑이를 돌리길 멈추지 않았다.

“뭐가 신난다는 거지? 결국 물의 힘을 다루지 못하면 거기서 도태될 텐데.”

“와…… 스승님 표현 한번 주옥 같다.”

“주옥?”

“욕 아님! 알지? 옥, 옥 말이야.”

나는 앉았다 일어났다를 열심히 반복하면서 말했다.

“그리고 나 그렇게 못나지 않았거든? 봐. 스승님 이렇게 지구력 좋은 세 살 봤어? 나 조금 있으면 돌도 부술 수 있을걸?”

“참으로 희한하군.”

피에르가 미미하게 눈을 찌푸렸다.

신기한 것을 보는 표정이었다.

“물은 만들어 내지 못하면서 신체 능력만 좋아지다니.”

그러게. 그건 나도 의문이었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신체가 강화되는 건 느껴지는데, 여전히 가장 기초 능력인 물을 만들어 내는 건 어려웠던 것이다.

왜 그렇지?

“걱정 마, 스승님.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진 않을 테니까.”

“글쎄.”

“응?”

피에르가 무언가 중얼거린 것 같았지만 들리지는 않았다.

피에르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와라.”

“응? 어디로?”

“시킬 일이 있다.”

시킬 일?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까지 우리가 만나서 훈련 외에 처음으로 다른 일을 하게 된 것이었으니까.

‘헉, 이거 혹시 그린라이트? 아빠와 딸의 극적인 친해지기?’

육아물 빙의 4회차!

혹시 나도 이제 ‘빠빠’에 넘어가는 가족을 볼 수 있는 건가……!

라고 생각했건만.

내 예상을 한참이나 빗겨 나간 상황을 마주했다.

“저기, 스승님……. 이거 뭐야?”

눈앞에 펼쳐진 것은 엉망이 된 방의 모습이었다.

‘아니, 내가 여기 들어올 수 있을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피에르가 따라오라고 했을 때만 해도 나는 어디 근사한 연무장이라도 가는 줄 알았다.

제자를 데리고 이제 좀 더 본격적인 훈련을 해 보려고 그러나? 싶었지.

그런데 도착한 곳은 놀랍게도 피에르가 거주하는 건물이었다.

서쪽에 위치한 건물들은 대체로 다 허름했지만, 여기 피에르가 사는 건물만큼은 홀로 새것인 듯 반짝거렸다.

‘약간 다 쓰러져 가는 폐허 속에서 유일하게 멀쩡한 집처럼 보였지.’

하기야 조용히 산다고는 하나 현 범고래 가문에서 가주만큼이나 강한 자가 거주하는 건물이었다.

‘할머니는, 이 가문은 힘을 가진 자에게는 마땅한 대가를 주곤 했으니까.’

아마 할머니 딴에는 이것도 모자라서 피에르가 좁다 느끼고 본가로 돌아오길 바랐을 테지만, 어림도 없지.

범고래들은 대체로 고집도 세다.

아닌 건 죽어도 아닌 놈들이 많았고, 할머니와 아빠도 여기서 다르진 않았다.

어쨌거나 애비가 사는 건물에 들어오게 된 것까진 좋았는데 말이지…….

‘어째서 이런 광경을 보게 된 거야?’

그랬다. 피에르는 자기가 사는 건물에 나를 데려온 걸로 모자라, 가장 좋은 방으로 향했다.

가장 좋은 방이란 당연히 자기가 거주하는 침실이었다.

놀랍게도 이 침실은…… 매우 엉망이었다.

왜 이렇게 사는 건가 싶을 정도로 아주 엉망!

‘……분명 이전 생에서 수하놈 하나가 피에르는 깨끗한 걸 좋아한다고 했던 것 같았는데?’

나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방 안을 살펴보다가 피에르를 한 번 보았다.

“스승님, 이거 혹시 돼지우리야?”

“불쾌하군. 육지 동물에게 비유하다니.”

아, 애비야 너도 육지 동물 혐오자야? 갑자기 반가운 마음이네.

나는 순순히 사과했다.

“미안, 미안. 너무 당황해서 그만……. 어쨌거나 이 엉망인 방은 뭐야? 닥터피시 애들이 쓰레긴 줄 알고 먹어 치우겠다.”

내 적나라한 감상에도 피에르는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한마디 할 뿐이었다.

“네가 치울 곳.”

“아, 청소……. 뭐? 뭐를 해?”

“네가 치울 곳이라고 했다.”

이 애비가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나더러 이 더러운 방을 치우라고?

나는 방 안에 널려 있는 물건들을 보다 다시 고개를 들었다.

‘자세히 보니까 이거…… 자기가 자는 침대만 완벽하게 깨끗하잖아?’

그랬다.

아마도 피에르가 자고 일어날 침대 주변만 이질적일 정도로 깨끗했다.

나머지는 왜 이렇게 둔 건가 싶을 정도로 엉망 그 자체!

“본래 물의 힘은 차분한 마음가짐에서 나오는 법이다.”

일종의 청소나 하면서 마음 수련이나 하라. 하는 말인데.

이 애비가 어디서 개소리를 하고 있어!

‘여전히 내가 3살이라는 자각은 없군. 3살에게 명상이라니 말이 되냐.’

나이는 둘째치고 말이다…….

“거짓말하지 마, 물의 힘은 누군가를 때리고 싶을 때 제일 강해진다고 했어.”

“잘 아는군?”

“맞아, 나는 똑똑하니까. 이뿐이겠어? 물의 힘은 범고래의 감정 상태와도 관련 있잖아.”

“…….”

내 말을 들은 피에르는 자신의 턱을 붙잡더니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저건……. 항상 저런 얼굴을 하고 나면 훈련이 늘어났는데?

경계하는 사이 아빠의 입술이 느리게 열렸다.

“넌 가끔…… 그 힘을 아주 잘 아는 것처럼 말을 하는군. 마치 써 본 듯이.”

“…….”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럴 리가 있다만.

이전 생에서 수중 생물 최고 짱을 먹은 게 바로 나거든?

이렇게 말할 수는 없었으므로 나는 오랜만에 무구한 척 시선을 돌렸다.

힘이 강할수록 감은 예리해진다.

피에르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바닥에 널린 물건으로 손을 뻗었다.

“그래서 내가 이거를 정리해야 한단 말이야?”

“깔끔하게.”

“……깨끗하게?”

“물론이다.”

“스승님, 내가 이런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어지르는 사람 따로 있고 치우는 사람 따로 있어?”

“그렇지.”

너무 당당한 대답에 나는 조용히 손을 내렸다.

여기서 한마디만 더 하면 물의 힘을 맛보게 될 거라는 아빠의 시선을 아주 잘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저 범고래의 머릿속엔 정말로 내가 세 살인 건 잊힌 게 틀림없어. 틀림없다고!’

나는 투덜거리며 가장 가까운 물건으로 다가가서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어디에 둘까 고민하던 찰나였다.

“정리할 때는 물의 힘을 사용하도록.”

“으웅?”

“네가 무의식중에 물의 힘을 근력과 체력, 민첩에 분배하여 쓴다는 건 너 스스로도 알아차렸겠지.”

그건 그렇지.

바위에 흠집을 남기고, 10바퀴를 돌아도 지치지 않는 체력은 물의 힘을 사용했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여전히 물은 생성해 내지 못한다.

“여기 있는 물건은 어차피 네 근력으로는 다루지 못하는 것들이 섞여 있다.”

“맞아. 스승님 정말 더럽다고 생각했……지 않았지. 사람이 어지를 수도 있다고 생각해.”

나는 익숙한 압박을 느끼며 황급히 말을 바꿨다.

“각성까지 머지않았다면 각성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힘을 사용하는 수밖에 없다. 단순한 달리기 말고 이 방법을 써 보자는 거다.”

피에르는 물건을 옮기고 제자리에 두는 일은 생각보다 여러 감각을 쓰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한창 설명을 듣다 보니 의문이 들었다.

“스승님, 그건 꼭…….”

당신이 나를 훈련시키기 위해서 이 방을 어지럽혔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나는 곧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없지.’

왜냐, 지시를 마치자 피에르는 기다렸다는 듯이 침대로 가서는 풀썩 나른하게 앉은 뒤 창문 밖을 응시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내가 뭘 하든 상관없다는 듯이.

나에겐 전혀 관심 없다는 듯이.

익숙한 일이었다.

분수대가 있는 공터에서도 피에르는 나를 뺑뺑이 돌라고 시켜 놓고는 저런 자세를 취했던 것이다.

가만히 보고 있자면, 이 세상 모든 것에 미련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이 말이다.

‘병약하고 아픈 사람은 다 그런 건가?’

무려 네 번째 인생을 살고 있지만 아파서 죽은 적은 한 번뿐.

그것도 갑작스러운 파상풍으로 죽었던 거라 오랜 시간 동안 병약하고 앓았을 피에르의 마음을 이해하진 못하겠다.

“스승님, 쓰레기는 어디에 버려?”

“저쪽이다.”

피에르는 나를 보지 않고 어딘가를 가리켰다.

한참 정리하던 나는 이 방에 어울리지 않는 물건을 하나 발견했다.

새하얀 레이스 손수건이었다.

끝에는 벚꽃 색깔 레이스가 달린 걸로 봐서 피에르의 물건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다른 물건들 사이에서 홀로 이질적이었으니까.

‘이건 어디다 둬야 하지?’

나는 손수건을 두고 고개를 갸웃했다.

피에르는 보기보다 제대로 된 스승 노릇을 했다.

훈련 중에 쓸데없는 말을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고, 뺑뺑이 시간을 가차 없이 늘리기도 했다.

웬만하면 사색에 잠긴 것인지 멍 때리는 것이지 모를 저 잘생긴 아빠를 방해하고 싶진 않았지만.

“스승님 이건 어디에 둬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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