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
보좌관이 사색이 된 얼굴로 나와 할머니를 번갈아 보았다.
흡사 이제 내가 죽은 목숨이라는 듯 가엾게 보는 것도 같았다.
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기왕이면 머리카락도 뽑아 보고 싶은데, 하는 생각을 할 따름이었다.
생각은 실천으로 옮겨야지.
내 앙증맞은 손이 훅 뻗어 나갔을 때였다. 그 손은 커다란 손에 턱 막혔다.
이런, 머리카락은 막혔나? 아니면 화가 났나.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하, 으하하하하하!”
할머니가 무척이나 재밌다는 듯 호탕하게 웃고 있었다.
웃음 끝에 번들거리는 눈이 나에게 향했다. 나른한 만족감이 어린 시선이었다.
“피에르, 그 인생을 포기한 미친놈 밑에서 이런 게 나왔다고?”
그러나 날카로운 눈은 연신 나를 살펴보고 있었다. 퍽 흥미롭다는 듯이.
눈앞으로 주름지고 잘생긴 얼굴이 훅 다가왔다.
주름이 선명히 보일 정도로 가까웠다.
범고래 가문은 눈빛에 살기를 실을 수 있었다.
번들거리는 눈은 분명 호의만 담긴 것이 아니었다.
“머리털을 뽑아 버린 손주는 네가 처음이구나, 조막만 한 것아.”
“…웅?”
할머니가 침대에 나를 툭 떨어트렸다.
역시나 아기한테 할 만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침대가 푹신해서 아프진 않았다.
“좋다, 이것의 처분은 보류하겠다.”
앞 회차들에서 내가 회귀하자마자 가장 먼저 당한 일은, 본가에서 제일 먼 건물로 쫓겨나는 일이었다.
“이번 여름에 교육 기관에 처넣어.”
“……예, 가주님.”
길게 찢어진 눈이 내게 향했다.
범고래의 표피처럼 반질반질한 머리카락 아래, 살기 등등한 눈이 휘어졌다.
“듣거라, 조랭이 떡 같은 것아, 교육 기관에서 성과를 보이지 못하면 바로 냉골로 추방행이다. 알겠느냐?”
약하고 물의 힘을 각성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항상 쫓겨나던 내 처지.
‘오냐, 두고 보자고. 얼른 자라서 이 가문에서 꺼져 줄 테니까.’
그전에 저 할망구 얼굴이 찡그려지는 거나 봐야지.
‘침 흘릴 정도로 강해진 다음 용의 신부로 사라져 주마.’
짱이 될 테다. 짱이 되고야 말 테다.
그렇게 이번 생, 시작을 바꾸었다.
* * *
용의 신부로 팔려 갈 수 있는 건 10살.
그러나 나는 그 전에 번번이 다른 가문에 팔려 가곤 했다.
몇 번이고 반항하고 떼를 쓰고 도망치려 노력도 해 봤지만.
원작의 기억이 있는 것이 무색하게 힘이 없는 몸뚱어리로는 여기서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었다.
‘직전 회차에서 도망칠 수 있던 것도 목숨을 걸었기 때문에 가능했지.’
하지만 지금은 또박또박 말할 수 있는 요령을 드디어 터득한 덕분에 시간을 벌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하나였다.
‘일단 목표는 10살까지 무사히 생존하는 것.’
그리고 그 전까지 원작과 연관 있는 가문으로 팔려 가지 않는 것.
이미 비상한 두뇌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걸로는 부족했다.
‘10살이 되기 전까지 보호자가 필요해.’
능력은 차차 발전시키면 된다지만, 그전까지 나를 든든하게 받쳐 줄 보호자가 하나쯤 필요했다.
‘신체 능력이 너무 떨어져. 이건 부친을 닮아 어쩔 수 없다지만.’
내 위로 능력이 출중한 세 오빠야 가신들의 보호를 받거나 혹은 보호 따위 없어도 대단한 작자들이었지만, 지금의 나는 아니었다.
‘물의 힘이 그대로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렇다면 누가 성장할 때까지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웬만한 어른들은 내 보호자가 되려 하지 않을 거다.
아무리 똑똑하다고 한들 여기는 지력보단 압도적인 무력을 선호하는 가문이었으니까.
‘취향이 독특하고 방관도 해 줄 어른이 필요해.’
그리고 나는 이런 인간을 하나 알고 있었다.
‘내 아버지. 피에르 아콰시아델.’
내 아버지는 이 범고래 가문에서 묘한 위치에 있는 인간이었다.
가주인 할머니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와 둘째는 어린 시절부터 라이벌이라 불릴 만큼 서로 쟁쟁한 능력을 자랑했지만……. 셋째인 피에르는 날 때부터 달랐다.
몸이 매우 연약했던 것이다.
그러나 연약해서 무시당하는 나와 다르게 부친은 무시와 괄시를 받지 않았는데, 이는 엄청난 ‘물의 힘’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몸이 약해서 힘을 이용하는 데 제약이 따랐다는 거지.’
내 아버지를 표현하자면 이러했다.
모두가 두려워할 정도의 화력을 가졌으나 횟수 제한이 있는 무기.
할머니 또한 부친을 아쉽지만 쓸모없는 놈 취급했고, 아버지는 은둔해서 처박혔다.
이 와중에 정략결혼으로 아이를 보긴 했지만 형들처럼 제 아이를 돌보지도 않았다.
내 위로 오빠들 또한 아버지에게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하지만 난 지금 그 무심함이 필요하단 말이지.’
현재 나는 나를 데려왔던 시종의 품에 안겨 거주하던 곳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신기하게도 나를 안고 가는 손길은 출발할 때보다 조심스러워져 있었다.
‘할머니 눈에 든 걸 봤기 때문이겠지.’
방에 도착했을 때 시종은 내 눈치를 보더니 슬쩍 입을 열었다.
“아가씨, 일주일 뒤, 거처를 옮겨드릴 예정입니다. 그때 다시 오겠습니다.”
현재 내가 머무는 곳은 서쪽 끝의 허름한 방이었다.
시종은 본 건물 끝 쪽으로 옮기게 될 거란 말과 함께 물러났다.
‘권력이란 게 참 좋다니까. 할머니 눈에 들자마자 방을 옮기다니. 어쨌거나 이 방은 너무 낡고 위험했으니 잘됐네.’
나는 홀로 남기 무섭게 뒤뚱뒤뚱 움직였다.
이 낡은 건물에 나와 같은 아기들을 한 번에 돌보는 유모가 있었다.
죽지 않게 최소한으로 밥만 주는 사람이랄까.
범고래 가문의 아기들은 이 건물에서 시작해 두각을 보인 순간 이 건물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물의 힘을 가진 아기들은 당연히 여기 올 필요도 없이 본 건물에서 살게 되고 말이다.
나는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 * *
아기 칼립소는 한참이나 걸은 끝에 자신이 원했던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칼립소는 뺨이 통통한 얼굴을 연신 이리저리 돌리며 장소를 살폈다.
‘분명 이쯤일 텐데……. 아!’
곧 칼립소의 얼굴이 환해졌다.
원했던 인물을 찾아낸 것이다.
칼립소의 커다란 두 눈에 분수대 근처에 멍하니 앉아 있는 남자가 보였다.
이곳의 분수대는 낡고 금이 간 상태로 마치 폐허 속에 놓인 듯 허름한 자태였다.
그곳에 앉아 있는 남자는 키가 아주 크고 골격이 커다랬지만, 어쩐지 마른 듯한 인상을 주는 모습이었다.
목 부분이 라운드로 이루어진 셔츠 위로 빗장뼈가 그대로 보였고, 대충 걸친 카디건이 나른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얼굴은 나른한 분위기를 더욱 성숙하게 만드는 데다, 어딘가 퇴폐적인 인상마저 풍기는 성마른 생김새였다.
태어나 빛을 한 점 보지 못한 듯한 하얀 피부 또한 이러한 분위기를 증폭시켰다.
‘흐음, 힘이 강한 범고래 아니랄까 봐 잘생기긴 했네.’
칼립소는 간단하게 평했다.
눈앞의 남자가 바로 제 부친인 ‘피에르 아콰시아델’이었다.
칼립소는 놀랍게도 세 번의 삶 동안 살아 움직이는 부친을 몇 번 보지 못했다.
이유를 설명하자면 간단했다.
칼립소가 앞선 회차에서 팔려 가기 전에는 모습을 비춘 적이 거의 없었고, 팔려 간 뒤에는 얼마 가지 않아 병 때문에 죽었다.
최강이라 할 만한 힘을 가졌지만 약한 육체가 버티지 못하여 죽은 것이다.
‘직전 회차에서는 가주가 된 뒤에 초상화로만 실컷 봤지?’
이번 회차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상태였다.
부친은 칼립소가 태어날 때조차도 옆에 있지 않았다고 들었으니.
칼립소는 도도도 달려갔다.
피에르는 칼립소가 아주 가까워질 때까지도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어딘가를 느릿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아저씨!”
마침내 칼립소가 바로 앞에 도착했을 때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칼립소는 제 부친의 얼굴을 꼼꼼히 보았다.
역시나 살아 움직이는 피에르의 얼굴이 신기하기는 했다.
‘현재 할머니에 비할 정도로 강하지만 그 힘의 제약이 큰 사람.’
게다가 일찍 죽을 시한부.
본인의 처지를 아는지 몰라도 여기에는 없는 네온사인 아래 밤을 연상시키듯 묘한 분위기긴 했다.
“안녕, 아저씨.”
칼립소는 모른 척 방긋 웃었다.
“혹시 교육 기관이라는 거 어디 있는지 알아? 나 가야 해. 거기.”
물론 이는 말을 걸 핑계였을 뿐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피에르는 칼립소를 한참이나 보았다.
신기하게도 그건 보았다기보다는 그저 시선을 돌렸다, 정도로 표현해야 맞을 것 같다.
존재를 느끼지 못하는 듯 칼립소로 하여금 시선이 그대로 자신을 투명하게 통과하는 기분을 느끼게 했다.
무심함과 느른함만이 가득 담긴 눈이었다.
칼립소의 동글동글한 눈썹이 홱 치켜 올라갔다.
칼립소는 가족들 중에 가장 동그랗게 생겼다. 항상 이것이 콤플렉스였다.
세간의 범고래 이미지로 보자면 모두가 뾰족한데 홀로 둥글둥글했으니까.
하지만 이 순간엔 눈꼬리를 휙 올리고 싶었다. 어이, 나 기분 나쁘다고!
‘왜 대답이 없어?’
이렇게 생각하고도 한참 뒤에야 느릿한 대답이 들려 왔다.
“길, 한참은 잘못 들었는데.”
피에르의 목소리는 낮게 잠겨 있었다.
오랫동안 소리를 내지 않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