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마차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언덕길이었다.
힐데가르트는 시트에 몸을 기댄 채, 저편에 보이는 아카락시아 저택을 눈에 담았다.
수년 전에는 레디스와 옥신각신하며 당나귀를 탄 채 올랐던 길이었다.
‘그땐 정말…… 저택에 귀신이라도 들린 줄 알았는데.’
지금은 그 무렵의 흔적이 하나도 남지 않은 아카락시아 저택이다.
골조만 남기고 모조리 갈아엎는 대공사 끝에 공작저는 황궁 부럽지 않을 만큼 번쩍이고 있었다.
레온하르트가 살아 있다면 저 모습을 보고 뭐라고 할까?
잘했다며 고생했다며 칭찬을 해줄까?
“…….”
힐데가르트는 픽 웃었다.
이제는 오빠가 무슨 말을 해도 괜찮았다.
가문의 영광을 운운했던 예전과는 달리, 지금은 미하일이 이끌어갈 공작가가 무너지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미하일과 레디스의 그림자에 드리워진 불행을 뻥 차서 쫓아낼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리고 키스케를 만나서 다행이다.
그런 마음뿐이다.
“다녀오셨어요, 아가씨? 어째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들켰어?”
“힐데, 왔니?”
저택으로 들어선 힐데가르트를 반긴 건 로빈과 미하일이었다.
평소 이 시간이면 집무실에 있어야 할 미하일이건만.
“다녀왔어. 근데 오빠가 일부러 아래층에 내려올 것까진 없었는데.”
“아냐. 안 바빴으니 괜찮아. 그리고 조금 전 사람이 왔다 갔거든.”
“사람? 누구?”
“랑케르트 가문. 마우제네 공작의 비서관이 다녀갔어.”
“뭐?”
힐데가르트의 눈살이 자동으로 찌푸려지자, 미하일이 손을 내저었다.
“그렇게 세모 눈 뜰 거 없어. 안 좋은 이야기는 없었으니깐.”
“그건 자초지종을 들어봐야 알지!”
“알겠어. 일단 옷부터 갈아입고 이야기할까?”
힐데가르트는 냉큼 그러마, 하며 마차에서 들고 내린 양산을 로빈에게 건넸다.
곧 손발을 깨끗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아래층으로 내려온 힐데가르트는 차갑게 탄 홍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이야기를 정리했다.
“한마디로…… 다음 공회에서 아카락시아 가문도 카라딘의 선처를 바란다고 손들어달라?”
“응. 그리고 그 대가가 이거.”
미하일이 갈색 종이봉투를 힐데가르트 앞으로 밀었다.
그녀는 곧장 봉투를 열었다.
“진짜네?”
종이봉투에는 들어 있는 것은 랑케르트 광산의 소유권을 아카락시아 가문으로 넘기겠다는 서약서였다.
랑케르트 쪽에서는 이미 서명과 도장을 찍었다..
아카락시아 가문이 아래에 있는 공란을 채워서 보내기만 하면 일사천리로 끝나는 상황이이었다.
놀라운 일이다.
다른 곳도 아닌 랑케르트 가문에서 카라딘을 위해 보석 광산을 전부 내놓을 줄이야.
‘아닌가? 따지고 보면 그렇게 이상하지는 않나?’
로바르네 황자비가 유폐된 이후, 카라딘은 끈 떨어진 신세나 마찬가지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랑케르트 공작가의 입지를 책임지는 인물이었다.
아무렴 황제의 손자 겸 키스케의 대항점이라는 타이틀이 손쉽게 사라지는 건 아니었으니까.
‘마우제네에게 조금 더 각별한 존재였다는 건 의외였지만.’
죽을 때까지 만나지 못할 여동생이 남긴 유일한 아이고 조카니까 애가 탔던 걸까?
“그래도 순전히 카라딘 황손 때문만은 아닐 거야. 힐데 네가 데뷔탕트 때 랑케르트 지방에 이동 게이트를 설치하지 않을 거라고 엄포했다며.”
“당연하지. 그때 말씀드렸던 광산도 드릴 테니 잘 좀 봐주십사, 하는 아부성이 섞여 있을걸?”
“그런 거 같아. 원래는 널 찾아온 손님이었는데, 부재중이라 내가 대신 이야기를 들었어. 괜찮지?”
힐데가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였으면 이야기도 안 듣고 쫓아냈을걸. 차라리 오빠가 상대해 줬으니 그쪽 입장에선 다행이지.”
“쫓아내다니. 아무리 싫어도 한 번은 이야기를 들어줘. 미워도 다시 한번, 이라는 말도 있잖아.”
미하일은 소리 내서 웃었다.
“힐데 넌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카라딘 말이야?”
팔짱을 낀 힐데가르트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다가 흠, 하고 숨을 뱉었다.
“아직 잘 모르겠어. 하지만 그게 우리 가문에 더 이득이라면 한 번쯤은 차분히 이야기를 들어봐도 좋을 것 같긴 하네. ……오빠는?”
“주는 광산을 마다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못 말려.”
일부러 저와 똑같이 팔짱을 낀 채 따라 하는 미하일을 보며 그녀가 픽 웃었다.
이제는 제법 단호함을 갖췄지만, 여전히 다른 이들을 포용하는 온화함을 지닌 게 미하일의 장점이자 공작으로서의 그릇이기도 했다.
“뭣보다 힐데 네가 계속 랑케르트의 제안을 거절하거나 잘라내면, 단념한 랑케르트는 아예 적대적으로 돌아설 거야. 차라리 이동 게이트를 딱 하나만 설치해 주고 명분을 챙긴 다음, 그쪽이 더욱 다음 게이트 설치가 간절해지도록 목줄을 채우는 건 어때?”
“……오빠, 몰라보게 영악해진 거 아니야?!”
오브론 대공인가? 오브론 대공이 우리 귀여운 미하일의 머릿속에서 악마적인 계략이 나오도록 가르친 건가?!
힐데가르트는 황당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알겠어. 오빠가 그렇게 말하니 나도 진지하게 생각해 볼게.”
거참 잘 가르쳤다는 감탄이 절로 나오는 순간이었다.
차 한잔을 깔끔히 비운 힐데가르트는 오랜만에 가문의 묘지를 찾았다.
매번 찾아올 때면 레온하트르를 떠올리며 입안이 씁쓸해진 곳이었으나, 오늘은 마음이 가벼웠다.
힐데가르트는 깔끔하게 관리된 레온하르트의 묘비 아래에 하얀 아젤리아 한 다발을 내려놓았다.
“이제 다 끝났어, 레온 오빠.”
그녀는 무릎을 굽힌 채 비석을 쓸었다.
“있잖아, 오빠 말이 옳았어. 내게는 가문을 빛내는 것 말고도 다른 선택지가 많았어.”
너무 늦게 알았지?
힐데가르트가 배시시 웃었다.
“앞으로는 다른 선택지를 찾아보려고.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과 함께.”
오빠를 기쁘게 하고 누군가에게 사랑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스스로 행복해지기 위해서.
오래전의 레온하르트도 틀림없이 그것을 바랐으리라.
“그럼 앞으로도 지켜봐 줘. 언젠간 나도 오빠를 만나러 갈게.”
레온하르트를 다시 만난다면 그때는 제가 얼마나, 어떻게 행복했는지를 빠짐없이 들려주리라.
힐데가르트는 대답이 들려올 리 없는 묘비를 한참 뒤 바라본 뒤 몸을 틀었다.
“……아…….”
그리고 뒤돌아본 그녀는 감탄을 흘리며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환한 오후.
푸른 하늘에는 레온하르트의 대답을 대신하듯, 선명한 일곱 색 무지개가 걸려 있었다.
* * *
소란스러웠던 가을과 혹독했던 겨울이 지나면 기다렸다는 듯 눈부신 봄이 온다.
키스케는 녹음 가득한 황태자궁의 후원으로 발을 들이며 한낮의 태양을 손으로 가렸다.
‘아침에는 쌀쌀했는데, 지금은 괜찮네.’
힐데는 괜찮으려나.
중얼거린 키스케는 걸음을 재촉했다.
“전하. 오셨군요.”
“노바. 힐데는?”
“공녀님…… 이 아니라, 비 전하께서는 온실에 계십니다.”
“아직은 ‘비 전하’가 아니잖아.”
“어차피 성혼식도 얼마 안 남았잖아요?”
“그 말, 미하일 공작이 들으면 울지도 몰라. 그러고 보니 아까 기사단장이 널 찾던데 무슨 일 있었어?”
“기사단장이요?”
온실 앞을 지키던 노바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머지않아 기억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마 책봉식 당일에 경비 문제로 그럴 겁니다. 잠시 자리를 비워도 될까요?”
“그렇게 해. 난 계속 여기 있을 테니까.”
“네. 전하께서 다른 곳으로 샐 걱정이 없어서 제 마음이 편하네요.”
노바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노바가 자리를 떠난 뒤, 온실로 들어선 키스케는 일부러 발소리를 죽였다.
반년 전, 레디스와 유시스가 결혼할 때만 해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던 미하일 공작은 힐데가르트가 황실의 청혼서를 받을 때부터 울상이었다.
요즘은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대여섯 가지의 이유를 들어 성혼식을 미루는 게 어떻겠냐며 제안하는 통에 키스케는 책봉식 전까지 그를 피해 다니고 있었다.
정작 황태자비의 자리를 받아들인 힐데가르트는 그 이야기를 듣자 실컷 웃었다.
그러곤 제 오빠의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든 말든 수도와 공작저를 오가며 자유로이 지내고 있었다.
쏟아지는 티파티 초대장을 거절한 그녀는 오르녹스 신전에 들르는 것 말고는 두문불출해서 더욱 희귀한 존재로 취급받고 있었다.
최근에는 유독 황태자궁의 온실에 둥지를 튼 새처럼 붙어 있었는데, 이유를 물어보자 ‘여기선 복잡한 일은 전부 잊고 푹 쉴 수 있으니까’라고 대답해서 키스케의 입꼬리가 천장까지 솟도록 만들었다.
덕분에 키스케는 매일같이 신기록을 세우며 정무를 빠르게 마치고 있었지만, 그녀는 아직 그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힐데?”
키스케는 조심스레 유리문을 열고 그녀가 매일같이 앉아 있는 소파로 다가갔다.
“…….”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힐데가르트의 고른 숨소리가 그 자리를 메웠다.
힐데가르트는 푹 잠들어 있었다.
안온함에 젖은 얼굴은 아주 오래전, 장대비가 쏟아지던 선득한 밤에 보았던 모습과는 정반대였다.
모든 짐을 내려놓은 그녀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는 찰나의 시간.
곁에 앉은 키스케가 낮잠에 든 그녀를 받치듯 어깨를 기댔다.
그러자 힐데가르트는 기다렸다는 듯 그를 향해 고개를 늘어뜨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비 전하, 말씀하셨던 담요를…….”
쉿.
키스케는 다가오는 시녀를 향해 손가락을 들어 조용히 하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시녀는 어느새 나타난 키스케를 보고 깜짝 놀랐으나, 상황을 파악하고 곧장 물러났다.
다행히 푹 잠들었는지, 힐데가르트의 눈 주변이 파르르 떨릴 뿐 깨지는 않았다.
불행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다가오지만, 행복은 고요 속에서 꽃 피운다던가?
“힐데가르트.”
키스케는 잠에서 깬 그녀의 손에 끼워줄 반지를 꼭 쥔 채, 진주처럼 부드러운 상대의 뺨을 쓸어보았다.
키스케는 그녀의 뺨에 가볍게 입술을 내리눌렀다.
“사랑해, 힐데.”
다정한 침묵과 고요한 평온.
그것은 그와 힐데가르트 바라마지 않던 영원한 행복이었다.
完